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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9년(1999)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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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壁 별, 관장하는 왕패(王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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壁 별, 관장하는 왕패(王覇)

영천군 영양현 사람으로 기질이 강개
광무제 배알, 王尋ㆍ王邑치는데 동참

    

       

  왕패(王覇)의 자(字)는 원백(元伯), 영천군(潁川郡) 영양현(潁陽縣)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법률(法律)을 좋아하여 왕패의 아버지는 군(郡)의 결조연(決曹掾)이 되었고 왕패 또한 젊어서 옥리(獄吏)가 되었다. 그러나 왕패는 늘 강계하며 옥리의 직을 기꺼워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상하게 여기고 서쪽으로 보내 장안(長安)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한(漢)이 군대를 일으켜 영양을 지나게 되었을 때 왕패는 빈객(賓客)들을 거느리고 광무제를 배알했다. 그리고는 『장군감이라면 의병을 일으켰겠지만 제 자신이 그 정도의 역량이 못됨을 익히 알던 터에 공(公)의 위덕(威德)을 흠모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행오(行伍)에 끼워나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다. 이에 광무가 이르길, 『꿈에서조차 현사(賢士)를 생각했거늘 함께 공업(功業)을 이루는 일에 다른 무엇이 있으리오?』하고는 그를 따라 곤양(昆陽)에서 왕심(王尋), 왕읍(王邑)을 치게 했다. 싸움이 끝나자 왕패는 향리(鄕里)로 돌아가 쉬었다.

  광무가 사예교위(司隷校尉)가 되어 영양을 지날 때 왕패는 그의 아버지에게 청하여 그를 따라가자고 했다.

  왕패의 아버지가 이르길, 『나는 이미 늙어 군대의 일을 맡을 수가 없다. 너나 가서 열심히 하거라.』라고 하였다. 이에 왕패는 광무를 따라 낙양(洛陽)까지 갔다. 광무가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왕패를 공조령사(功曹令史)로 삼고, 왕패를 따르게 하여 하북(河北)으로 건너갔다.

  애초에 빈객(賓客)으로 왕패를 좇던 자들이 수십 명이 되었으나 조금씩 조금씩 떠나버렸다.

  광무가 왕패에게 이르길, 『영천에서 나를 따라온 자들은 모두 가버리고 이제 그대 혼자만 남았구려. 노력하시오. 질풍(疾風)이라야 굳센 풀을 알아낼 수 있는 법이라오.』라 하였다.

  왕랑(王郞)이 봉기를 했을 때 광무는 계에 있었는데 왕랑이 격문을 돌려 광무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광무가 왕패를 시켜 시중(市中)으로 나가 모병하게 하고 장차 왕랑을 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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