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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9년(1999)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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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神明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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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神明열전

              

               

  조회가 끝나자 왕은 중황문(中黃文)으로 하여금 보배·의복·전백(錢帛) 을 풍이에게 하사하게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위급한 때 무루정(無蔞亭)에서 콩죽을 바치고 호타하(虖沱河)에서 보리밥을 바쳤었는데 그 고마운 뜻을 오래도록 갚지 못하였소.』라고 하였다. 풍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관중(關中)은 환공(桓公)에게 「원컨대 공께서는 허리띠쇠에 화살이 박히던 때를 잊지 마소서 신은 죄인 호송수레에 태워져 끌려오던 일을 잊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제(齊)나라는 관중에게 의지하였습니다. 신도 지금 원하옵기는 주상께서는 하북(河北)에 있었을 때의 어려움을 잊지 마소서. 소신도 감히 건거(巾車)에서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그 후 여러 번 잔치자리에서 보고 이야기하며 촉(蜀)을 정벌할 것을 의논하다가 10여일 머물러 있은 뒤에 풍이의 처자식에게 풍이를 따라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건무 6년 여름, 왕은 장수들을 파견해서 농(隴)지역을 점령하라고 하였으나 외효(隗囂)에게 패하여 풍이에게 명령을 내려 순읍(栒邑)에 주둔하게 하였다. 풍이의 군대가 이르기 전에 외효는 승세를 타고 그의 장수 왕원(王元)·행순(行巡)으로 하여금 2만여 병사를 이끌고 농(隴)지역에서 벗어나게 하고 행순은 순읍을 점령하도록 파견하였다. 풍이는 곧장 군대를 몰아가 먼저 그곳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말하였다.

  『적병의 기세가 성하고 새로이 승세를 타고 있으므로 함께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땅히 군대를 편리한 곳에 주둔시켜 놓고 서서히 방략을 생각해 보지요.』풍이가 말하였다.

  『적병이 경계에 임박하였으니 그들은 사소한 이익에 급급하여 더 깊숙이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오. 만약 순읍을 얻게 되면 삼보(三輔)가 위태로와질테니 그것은 우리가 걱정하는 일입니다. 대개「공격하는 자는 부족해 하고 수비하는 자는 여유있다.」고 하였소. 지금 먼저 성을 점거하여 안일함으로 피로함을 대한다면 싸울 바도 못될 것이오.』

  풍이는 몰래 가서 성문을 닫고 군기와 북을 내리게 하니 행순이 그 사실을 모른 채 급히 달려왔다. 풍이는 그가 뜻하지 않은 순간을 이용해 갑자기 북을 두들기고 깃대를 세워 출병하였다. 행순의 군대가 놀라 어지럽게 달아나니 풍이는 그들을 수십리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제준(祭遵)도 왕원을 연에서 격파하였다. 그러자 북지(北地)의 여러 호장(豪長) 경정(耿定) 등이 모두 외효를 버리고 항복하였다. 풍이는 진상을 상서(上書)하고 감히 공훈을 자랑하려 들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이 혹 그의 공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자 왕은 그것을 근심하여 편지를 내려 말하였다.

  『대사마(大司馬)·호아(虎牙)장군·건위장군(建威將軍)·한충장군(漢忠將軍)·포로장군(捕虜將軍)·무위장군(武威將軍)에게 명령을 내린다. 적병이 왕성히 쳐내려 와 삼보(三輔)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순읍(栒邑)이 위급하여 망하는 것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북지(北地)의 진영과 보루에서는 군대를 억류하고 관망하였다. 지금 성마다 위급함을 면하고 적병을 꺾어서 경정(耿定)의 무리로 하여금 다시 군신의 의(義)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의 공훈은 구산(丘山)과도 같이 크지만 그는 오히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맹지반(孟之反)이 분연히 달릴 수 있으나 후진으로 남았던 것과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 태중대부(太中大夫)를 보내 정서장군의 관리·병사 중 사상자(死傷者)에게 의약과 관을 보내니 대사마 이하의 장군들은 친히 죽은 이를 조상하고 상한자를 위문하여 겸허하게 받들라.』

  그리고 풍이로 하여금 의거(義渠)로 진군케 하고 북지(北地)의 태수일을 아울러 맡도록 하였다. 청산(靑山)의 호(胡)가 만여 명을 이끌고 와 풍이에게 항복하였다. 

  풍이는 또한 노방(盧芳)의 장수 가람(賈覽)·흉노(匈奴)의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을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상군(上郡)·안정(安定)도 모두 항복하였다. 풍이는 다시 안정(安定)의 태수일을 맡게 되었다.

  건무 9년 봄, 제준(祭遵)이 죽자 왕은 풍이에게 정로장군(征虜將軍)을 배수하고 그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다. 외효가 죽자 그의 장수 왕원(王元)·주종(周宗) 등이 외효의 아들 외순(隗純)을 다시 세우고 여전히 병사를 모아 기(冀)땅에 근거하니 공손술(公孫述)이 장수 조광(趙匡) 등을 파견해 구조하였다. 광무제는 다시 풍이에게 천수(天水)태수 일을 하게 하고 조광등을 공격하게 하니 1년이 지난 후에 그들을 모두 목베었다. 여러 장군들이 함께 기(冀)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잠시 돌아와 병사들을 쉬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풍이는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고서 항상 여러 군대 중 선봉대가 되었다.

  그 다음해 여름, 여러 장군들과 낙문(落門)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기 전에 병이 나서 군(軍)중에서 죽었다. 시호를 절후(節侯)라 하였다. 큰아들 풍창(馮彰)이 뒤를 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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