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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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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 역사인물 : 무왕武王

무왕(武王)

 

 

 글 교무부

 

 

 

  하루는 종도들이 상제의 말씀을 좇아 역대의 만고 명장을 생각하면서 쓰고 있는데 경석이 상제께 “창업군주도 명장이라 하오리까.”고 여쭈니 상제께서 “그러하니라.” 말씀하시니라. 경석이 황제(黃帝)로부터 탕무(湯武)·태공(太公)·한고조(漢高祖) 등을 차례로 열기하고 끝으로 전 명숙을 써서 상제께 올리니……. (공사 1장 34절)

 

 

  무왕은 아버지 문왕과 더불어 성군(聖君)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우리에게는 『채지가』 「뱃노래」에서 “문무주공 돛을달고 안증사맹 노저어라 걸주풍파 이러난들 이배파산 어이하리”라는 구절로 귀에 익은 이름이다.

  무왕(武王, ?~ 기원전 1043?)의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이다. 뒷날 문왕으로 추존된 서백(西伯) 창(昌)의 둘째 아들이므로 중발(仲發)이라고도 한다. 형 백읍고(伯邑考)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피살당함으로써 아버지를 뒤이어 기원전 1050년 무렵부터 관중(關中)평야에 중심지를 둔 주(周)을 이끌고 있었다.

은(殷)이 망하고 주(周)나라가 세워지던 역사에 있어, 주왕을 살펴보는 것도 창업 당시의 무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은나라는 중국역사문헌과 은허(殷墟)01에서 출토된 궁터 유적 등에서 증명하듯 그 실재가 구체적으로 고증된 최고(最古)의 왕조이다. 하(夏)의 폭군 걸왕(桀王)을 멸하고, 탕(湯)이 건국한 은나라는 기원전 1600~1046년까지 600여 년, 31대 주왕 때까지 존속했다. 이때의 주왕은 하(夏)의 걸왕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악덕스런 천자의 표본이 되는 인물로 이후부터 극악무도한 존재를 일컬을 땐 “걸주(桀紂)와 같다”고 하였고, 이들처럼 천명을 저버리고 난법을 행하는 것을 “걸주풍파를 일으킨다”라 했다.

  그러나 천하에 악명을 남기고 간 주왕은 처음부터 어리석거나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왕은 용모가 준수하고 신체가 장대하였으며 두뇌가 명석하여 모든 일의 진상을 꿰뚫어 볼 수가 있었고, 완력은 맹수를 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었다. 지혜가 풍부하여 어떠한 간언이라도 튕겨버릴 수가 있었고, 또 말솜씨가 뛰어나서 틀린 것도 옳다고 논증하기에 충분했다. 자기의 비행을 적당한 구실로 얼버무려 납득시킬 줄도 알았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을 덕(德)을 쌓는 데 쓰지 않고, 거꾸로 덕(德)을 파괴하는 방향으로만 썼던 것이다. 신하를 향하여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자긍심을 품었으며 천하에 자신의 명성이 떨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주색(酒色)에 있어서도 호탕하여 달기(己)를 미친 듯이 사랑했다. 달기가 칭찬하는 사람은 중용하고 달기가 미워하는 사람은 죄를 씌워 죽였다. 녹대(鹿臺)02, 포락지형(烙之刑), 주지육림(酒池肉林) 등의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주왕의 악행이 극에 달하고 있었지만, 600여 년에 걸쳐 내려온 은나라는 전통(傳統)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은나라를 유지하는 가장 큰 힘, 왕족과 충신(忠臣)들의 간언이었다. 그러나 주(紂)는 이마저도 물리치고 만다. 상식을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 못한 충신들이 간하면, 주왕은 도리어 그들을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불충자로 몰아 가차 없이 포락지형에 처해버렸다.

미자(微子)03와 기자(箕子)04, 왕자 비간(比干)05 등도 목숨을 걸고 간언하였지만, 결과는 살해되고, 갇히고, 망명하게 된다.

  무왕의 아버지 서백도 은나라 천자의 정치를 보좌하는 최고 기관인 삼공(三公) 중 한 사람이었다. 주왕 때의 삼공은 구후(九侯)·악후(鄂侯)·서백후(西伯侯)였다. 구후를 죽여 장조림하고, 악후를 죽여 포로 만들었을 때, 생각이 깊은 서백은 탄식만 했을 뿐인데, 그 탄식을 밀고한 자가 있어 유리(里)06의 옥사에 갇히고 만다. 산의생(散宜生), 굉요(夭) 등의 도움으로 방면된 서백이 덕(德)의 군주로 인망을 쌓자 많은 제후들이 주(周)에 복속해 들어왔다.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서백이 죽자, 그 아들 발(發-훗날 周 武王)이 제후가 되었다. 그는 활발한 기질 그대로 외부적 활동을 본령으로 삼아 스스로 주왕(周王)임을 칭하고, 아버지 서백을 문왕(文王)이라 시호했다. 강태공을 스승으로 삼고, 동생 주공(周公) 단(旦)의 보좌를 받아 내정을 정비하며 아버지의 유업을 이루고자 군사력을 증강시켜 나갔다.

  정사(政事)에 힘쓰기 9년, 무왕은 동정(東征)하여 맹진(盟津)07에 이르렀다. 이 군사 행동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주왕을 반성시키고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나라의 성망(聲望)이 실질적으로 얼마만큼이나 천하에 알려졌는가를 확인하는 데에 있었다.

  맹진에 이르렀을 때 특별한 약속이 없었음에도 800여 제후가 모였고, 이들은 “다시 없이 포악한 주(紂)를 쳐서 천하만민을 구제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이 기꺼이 종군하겠습니다.”라고 입을 모아 외쳤다. 무왕은 이 군사행동을 통해서 주(周)의 성망이 천하를 덮고 있음을 확인했으나 주왕이 반성하는 지는 한동안 정관(靜觀)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에 무왕은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돌아갔다.

  주왕에겐 조금도 반성의 빛이 없었을 뿐 아니라 간언은 무시되고 음탕함은 더해 백성들의 원망은 극에 달했다. 그러한 가운데 은의 태사(太師)·소사(少師)가 제사용 악기를 들고 주(周)로 망명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악기가 주(周)로 옮겨 온 것이다. 이에 무왕은, 천명(天命)이 은(殷)에서 주(周)로 옮겨 온 것이라 여겼다. 이제 주왕을 쳐서 천하의 악을 없애야 한다고 은 정벌을 제후들에게 고(告)했다

  문왕 12년, 은을 정벌하고자 다시 동정(東征)하여 맹진(盟津)을 넘은 무왕의 군사와 제후들은 은나라 교외의 목야(牧野)에 진을 쳤다. 주왕도 사태의 긴박함을 알고 노예로 급조한 70만의 대군을 발하여 목야에 방어진을 폈다. 병력을 비교하면 수적으로는 은나라 군대가 많아 보였으나 전의(戰意)는 정반대였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주왕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잡고 무왕의 군대에게 길을 내주었다. 백성들은 밥과 물을 가지고 나와 무왕의 군사들을 환영하였다. 주왕은 도망쳐 자신의 녹대에 불을 지르고 보석 옷을 입고 불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기원전 1046년의 일이다.

  무왕은 은나라 수도를 점령한 이튿날 아침 몸소 천단(天壇)에 나아가 상제(上帝)께 제사를 드렸다. 천단은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다. 주(紂)가 하늘에 제사지내고 천명을 받들어야 될 천자로서의 임무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왕은 천단을 수리하면서 화려했던 은나라가 망한 이유를 생각하며, 자신은 하늘의 명을 경건히 받들어 백성의 기대에 보답하고 조종의 유덕을 추모하여 천하에 인정(仁政)을 베풀 것이라 다짐하였다. 망국(亡國)의 원인을 눈으로 보았던 무왕이었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은나라 백성은 다년간 거친 폭정에 시달려 비참한 생활을 해 왔는데, 이제는 망국(亡國)의 백성이 되어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은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왕의 아들 녹부(祿父)를 찾아 은나라 백성들이 의지하도록 했다. 타다 남은 녹대의 재화를 나누어 주고,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케 했다. 정도를 지키다 비참한 최후를 마친 비간의 묘도 정비했다. 은의 혼란을 수습한 무왕은 군사를 거두어 서쪽으로 돌아갔다.

  주(周)로 돌아온 무왕은 도읍을 풍읍에서 호(鎬)로 옮겼다. 이어서 공신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누어 영토를 분배했다. 특히 조종의 유덕을 추모하고, 성왕들의 덕에 의하여 백성들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을 본받아 자신도 꼭 천하에 인정을 베풀고자 했던 처음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옛날 성왕들의 후손을 찾아 제후로 봉했다. 이로써 봉건제도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약 800여 년,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유지되었던 주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천하는 밝아지고 만민은 무왕의 인정(仁政)에 환호했다.

  그러나 무왕은, 자신이 현인을 등용치도 못했고, 정책도 충분히 세우지 못했으니 하늘의 도움을 잘 지킬 수 있을지 염려되어 밤에도 노심초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경(鎬京)에 자리 잡고 정무에 힘쓰던 무왕이 결국 병들어 누웠다. 주공 단이 목욕재계하고 무왕 대신 죽거나 병들겠다고 빌자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였으나 완쾌를 보지 못하고 붕어하였다. 은을 멸(滅)한 지 3년, 그의 나이 93세였다.

 

 

 

 


01 은나라 도읍의 유적으로,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 해당한다.

02 주왕은 10만여 명을 동원하여 7년에 걸쳐, 길이 3리, 높이 1000척, 대궁전 100여 개, 소궁전 72개를 지어 달기에게 결혼 예물로 주었다.

03 주왕의 배다른 형(兄).

04 기자는 주왕의 친척이며 이름은 ‘서여’이고 양국의 ‘몽현’에 기자묘가 있다.

05 주왕의 삼촌,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이라는데 확인해 보겠다며 죽였다.

06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문왕은 이곳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 은나라 이전인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다스릴 때(약 4200여 년전) 출현한 낙서(洛書)의 이치를 깨달아 복희팔괘와 배열을 달리 한 팔괘를 지었는데, 이를 문왕팔괘라고 한다.

07 지금의 하남성 맹현에 있는 나루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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