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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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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여(女) 별을 관장하는 부준(傅俊) 신명

여(女) 별을 관장하는 부준(傅俊) 신명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여수(女宿)
  여수(女宿)는 28수 가운데 열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세 번째 별자리로 현무의 몸에 해당한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동물은 박쥐[蝠]이다.01 여수의 속성(屬性)은 금(金)으로 이 별자리의 조합이 ‘여(女)’자(字) 같은 모습이어서 여수라 한 것이다. 여수를 의인화하여 북방여토복성군(北方女土蝠星君)이라 하며, 천상의 사녀(仕女, 궁녀)로 인식되는데 베를 짜는 직무를 맡았다고 여겨진다. 상징 동물인 박쥐[蝠]는 복(福)과 같은 음으로 중국에서는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부준
  부준(傅俊, ?-31)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부준의 자(字)는 자위(子衛)로 영천군(潁川郡) 양성[襄城, 현재 하남성(河南省)] 사람이다. 유수가 양성을 순행할 때 부준은 현의 정장(亭長)02이었다. 부준이 유수의 군대를 맞아들이니 유수는 그를 교위(校尉)에 임명하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자. 전한(前漢) 말 황실의 외척으로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은 왕망(王莽, BCE 45-CE 23)은 서기 8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양(禪讓)이라는 궁정쿠데타를 통해 한(漢)을 타도하고 스스로 등극하여 신(新, 8-23)을 세웠다. 그런데 정권 수립 이후 왕망의 급진적이고 복고적인 개혁정책이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기근까지 겹치면서 각지에서 도적이 창궐하게 되어 중국은 거대한 도적의 소굴로 변하였다. 극도의 혼란으로 당시의 민심은 한나라의 부흥을 염원했다.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한나라의 후예들인 남양(南陽, 지금의 하남성)의 유씨들도 반란에 합류하게 되었다. 반란 세력들 가운데 일단의 세력들이 남양 유씨들과 결합하여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을 옹립하였다. 이때 후한의 창업자 유수는 그의 형인 유연(劉縯)과 함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유수가 부준을 만난 시점은 이제 막 경시제가 옹립된 시점이었고, 유수의 신분도 경시제 휘하의 일개 장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부준이 유수의 군대를 맞아들인 것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는 할지라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상황이 어렵기는 했지만 아직은 정권을 잡고 있던 왕망의 입장에서 부준의 행위는 반역이었기 때문이다. 부준의 반역행위에 대한 왕망 정권의 보복은 참혹했다. 왕망 정권은 양성에 살고 있던 부준의 어머니와 동생을 비롯한 그의 친족들 모두를 잡아 죽였다. 후한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28장 가운데 부준과 같이 이른 시기에 유수를 도운 것은 드문 일이었다. 또한, 부준과 같이 유수를 도왔다는 이유로 가족과 친척들이 동시에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은 인물도 드물었다.
  가족과 친족들이 동시에 몰살당하는 비운 속에서도 부준은 유수를 수행하여 왕망 정권을 멸망으로 이끈 곤양대전(昆陽大戰)에서 왕심(王尋)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다. 이때가 23년으로 경시 원년에 해당한다. 전쟁사에서 곤양대전은 소수의 군대가 중과부적의 대군을 물리친 전쟁으로 유명하다. 유수는 불과 수천 기로 왕망의 42만 대군을 물리친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승리였다. 유수의 목숨을 건 모험과 정확한 형세 판단으로 이룬 대승이었다. 곤양대전으로 유수의 이름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왕망 정권의 허약성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
  부준은 유수와는 별도로 경(京), 밀(密) 지역의 도적을 격파했다. 이후, 유수는 부준을 영천에 파견하여 가족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유수가 경시제의 명으로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도 부준은 그의 빈객(賓客) 10여 명과 함께 그를 따랐다. 부준은 한단(邯鄲)에서 유수를 만날 수 있었는데, 유수는 그로 하여금 영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항상 정벌에 따라다니게 하였다.
  25(건무 1)년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즉위 후 부준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부준을 곤양후(昆陽侯)로 봉하였다. 이듬해에 적노장군(積弩將軍)에 임명하고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잠팽(岑彭)과 함께 진풍(秦豊)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들은 강동(江東), 양주(揚州)를 돌아다니며 이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31(건무 7)년 부준이 죽으니 시호를 위후(威侯)라 하였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19.
02 역참(驛站)의 장(長), 향촌의 장(長)으로 진한(秦漢)에서는 10리(里)에 1정(亭)을 두었는데, 도적의 체포와 취조를 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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