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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소개(상제님편) : 상제님·도주님·도전님과 관련한 지명소개 말도[末島, 말점도(末店島)] 편

상제님·도주님·도전님과 관련한 지명소개
 
말도[末島, 말점도(末店島)] 편
 
 
글  종단역사연구팀
 
 
 
◎ 해당 『전경』 구절
 
  상제께서 정미년 三월 초에 광찬을 대동하고 말점도(末店島)에 들어가시려고 (광찬의 재종이 말점도에서 어업을 경영하고 있었음) 갑칠과 형렬을 만경 남포(南浦)에 불러 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지금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됨이니 너희들은 성백(成伯)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四十九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라. 그 신을 천하 사람에게 신게 하고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 하셨도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성백의 집에 가서 그대로 시행하였도다. 그 후 상제께서 말점도로부터 나오셔서 그 짚신을 원평 시장에 가서 팔게 하시고 그 종이등에는 각기 “음양(陰陽)” 두 글자를 쓰셔서 불사르시니라. (공사 2장 1절)
 
◎ 지명 유래와 변천사: 말도(末島)는 섬 둘레가 3km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고군산군도의 끝에 있으며 예전에는 ‘끝도’ 또는 ‘끝점’이라고도 불렸다. 말도는 본래 전남 지도군 고군산면 소속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옥구군 미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대동여지도』에 ‘난말(蘭末)’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1872년지방지도』에 ‘말도리(末島里)’, 『신구대조(新舊對照)』에 ‘미면 말도리(末島里)’로 기록되었으며 『한국지명총람』에도 ‘말도리(末島里)’로 기록되었다. 한편 윤두서(尹斗緖, 1668∼1715)01의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에는 ‘말도(末島)’가 아닌 ‘말점(末占)’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경』에는 ‘말점도(末店島)’라 하였다. 현재 공식 지명은 ‘말도’이며, 주변 해역이 황금어장인 탓에 1909년에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등대가 들어서 관광 명소로 알려졌다.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 중엽으로 한양에서 심판서(沈判書)라는 사람이 귀양 오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심판서를 추모하며, 마을의 액운을 몰아내고 풍어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영신당(靈神堂)에서 지냈다. 영신당의 상량문을 보면 1907(丁未)년 4월에 중수 상량한 것으로 나온다. 이 마을에서는 가장 청렴한 사람을 뽑아 영신당을 관리하고 제사용 돼지를 새끼 때부터 손수 기르게 하여 일 년에 두 번 동짓날과 봄에 200근이 나가는 돼지를 잡아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 당산제의 전통은 끊긴 상태다. 말도에 사는 인구는 2001년 조사 기준으로 68명이며, 말도의 면적은 0.36㎢이다.
 
▲ 말도 위성사진 지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자연환경: 섬 대부분은 구릉지이며, 중앙부가 저지대로 이곳에 촌락이 있다. 주민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며 지낸다. 부근 수역은 대륙붕이고 연안수와 황해난류에 의해 수온과 염분이 거의 균일하여 주위 해수와 식별할 수 있는 해수 덩어리의 경계가 형성되어 조기·고등어·새우·갈치 등 어족의 회유가 많아 4∼5월 성어기(盛漁期)에는 각지에서 어선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백합·바지락 등의 조개류도 양식한다.
  특히 이 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모양의 습곡지형이 아름답게 노출되어 있다.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이 습곡은 원래 얕은 바다에 쌓여서 이루어진 퇴적암이 지각운동으로 융기하면서 옆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파동상으로 주름이 생기게 된 지층으로 추정된다.
 
▲ 말도 해변 도로에서 본 습곡단층(2009.11.9 촬영)
 
 
◎ 『전경』과 관련된 곳: 말점도는 1907년 3월 초에 상제님께서 김광찬과 함께 공사를 보시기 위해 들어가신 곳이다. 말점도로 들어가신 후 종도들에게 성백(成伯)의 집에서 49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게 하셨는데 그 시기는 1907년 3월 초에서 49일 후인 1907년 4월 중순쯤이 된다. 이는 영신당을 중수 상량한 때와 비슷하다.
 
 
[참고문헌]
『전경』
『두산세계대백과사전 』, (주)두산동아, 2000.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D GX』,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0.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군산시사』(上), 군산시사편찬위원회, 2000.
『군산문화 제7편』, 군산문화원, 1993.
『군산문화 제11편』, 군산문화원, 1997.
『군산문화 제12편』, 군산문화원, 1998.
『군산문화 제13편』, 군산문화원, 1999.
『군산문화 제16편』, 군산문화원, 2003.
『한국지명요람』, 건설부 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 11』(전북 편 上), 한글학회, 2003.
 이병운, 『한국 행정지명 변천사』, 이회, 2004.
 송호열, 『한국의 지명변천』, (주)성지문화사, 2006.
 
 

01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로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자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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