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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2년(2012)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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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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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부평9 방면 교감 김인수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합니다. 도장에 수호를 선 지 3년, 그리고 도장 종사원으로 생활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제 나이 오십, 인생에서 오십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뜻으로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는데, 지난날을 돌아보면 참으로 무지몽매(無知蒙昧)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만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지난날을 반성(反省)하고 참회(懺悔)하여 새롭게 수도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김해 김가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여주군 강천면 적금리가 본가입니다. 조부(祖父) 때 손(孫)이 너무 귀해 작은 집에서 두 분을 양자로 들였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얻으셨던 조부께서는 손(孫)이 너무 귀해 아버지를 일찍 결혼시키셨습니다. 저는 장남으로 성장했습니다. 집안은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형편은 넉넉하였습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모님께서는 저에 대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여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는 대도시로의 유학인 셈이었습니다.

  1981년 대학에 입학한 후, 교사가 목표였던 저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낭만과 학구열로 가득해야 할 교정은 투쟁구호와 최루탄 가스가 난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국은 참으로 혼란했습니다. ‘왜 현실은 이래야만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참담한 현실에 분노하고 고뇌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 스님(강사)으로부터 불교학개론이라는 교양과목을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강의를 듣고 난 후,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자문(自問)해 보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서적을 읽게 되었습니다. 불경, 사서삼경, 노자, 장자, 철학서적, 크리슈나므르티 등등. 그러나 그 당시 학문에 대한 깊이나 다양한 시각을 갖추지 못했던 저로서는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의욕만 앞서서 수박 겉 핥기식으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방학 때는 고향 친구와 함께 절이나 암자에 가서 스님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암자에서는 고맙게도 방을 내주어 그곳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생의 근원적인 것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인간은 왜 생로병사의 틀에서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과 고뇌에 빠져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고가 성숙하지 못했던 저로서는 그 해답에 근접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릿속만 점점 더 복잡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것은 인간이 한평생 의식주에 대한 욕심만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도 허망(虛妄)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한때 인간의 근본을 너무나 알고 싶어 출가도 생각했지만, ‘과연 불교를 통해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면서 5년이 넘는 세월을 방황했습니다. 이런 현실과 대학생활에 고뇌하던 저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를 공부해 새로운 뭔가를 얻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근본 명제인 생사(生死)의 뿌리를 찾아야만 이 답답한 현실의 모든 부조리나 갈등에 대한 해답이 나오고, 그로 인해 인간이 인간답게 양심에 따라 살 수 있는 세상이 이루어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근원을 찾는 데 저는 일생을 걸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젊은 혈기로 판단할 때, 오십대 초반이면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뭔가에 이끌린 듯이 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일곱이던 1987년 6월 6일이었습니다. 입도 후에 저는 포덕을 하여 선무, 선사, 차선감을 거쳐 1992년에 선감이 되었습니다. 어려움도 더러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원으로 사업을 해 나가며 5년여가 지났을 때, 도심(道心)과는 동떨어진 과욕으로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한 문제가 날이 갈수록 표면화 되어갔고, 또 설상가상으로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직접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방면사업을 하며 10여 년의 세월이 아주 덧없이 흘러간 것 같습니다.

  서른여덟에 사회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에게 현실은 만만치 않은 곳으로서 마치 외딴섬에 홀로인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분수에 맞게 살겠다며, 밑바닥에서부터 다져 나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굳은 결심으로 새벽 1시 30분에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직업을 택해 열심히 하니 나날이 형편은 나아졌지만 늘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습니다. 처자식이 있어 사회생활을 했지만 다시 도(道)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새벽 일을 빠질 수가 없어 다른 일은 할 수 없었지만 성을 모시고 방면에 치성은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수도에 전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습니다. 다른 한편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과거 때문에, 10년 사회생활로 평생 의식주를 해결하겠다고 한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좀 더 노력하면 되겠구나 하는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사회생활 10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월급쟁이로 시작하여 개인사업까지 경험해 봤고, 또 말못할 고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결국 직원의 사고가 발단이 되어 모든 일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안팎으로 모든 겁액(劫厄)이 밀려와 도저히 어찌해 볼 수가 없는 벼랑 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장인·장모님과 같이 살지 않았다면 저는 길바닥에 나 앉을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며칠에 한 번씩은 청심환에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저희 부부는 위의 임원을 찾아갔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도장에 들어갈까 한다는 뜻을 위 임원께 상의를 드렸더니 도장에 들어가 종의실 수호를 서라는 뜻밖의 말씀을 해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2008년 5월 3일 본부성 날에 도장에 왔습니다. 제생(濟生)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마흔여덟인 저에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고 또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화기(火氣)로 가득 찬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머리털은 희어지고 몸에 진기가 다 빠져 수건을 짜면 뼈가 시린 듯하고, 눈은 고추 가루 뿌린 듯 따갑고, 맥박은 1분에 100번을 넘게 뛰었고, 밤에 잠을 청하려고 할 때에는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시학원 숙소에서 책상 앞에 앉아 거의 매일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께 ‘이 죄 많은 도문소자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지난날 방면에서 사업을 하며 많은 죄를 지은 제가 참회하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십사고 말입니다. 더불어 예전에 도전님 훈시를 한번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일을 생각하니 임원으로서 너무나 죄스러워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종의실 수호를 철저히 서고 아침·저녁 회의에 참석하며 기도를 모셨습니다. 나머지 시간엔 가급적 시학원 숙소에서 정좌하고 대순진리에 대한 공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는 상제님 품 안에 있다는 것이 꿈같이 느껴졌습니다. 갓 입도했다 생각하고 앞으로 3년 동안에 걸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서 저 자신을 뜯어고치겠다고 개심(改心)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망령되고 삿된 길로 나아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심고(心告)를 드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와 큰아들이 점차 건강을 회복해 갔습니다. 또 서울에 사시던 장인·장모께서는 가족들과 의논하여 집을 정리하고 도장 근처로 이사하시게 되었습니다. 나날이 몸이 회복되어 간 저는 덕화(德化)에 억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또 예전에 학교 지을 때 작업했던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대진대학교 대진교육관 골조공사에 참여하여 5개월 정도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몸의 고통이란 말할 수 없었지만 수시로 심고를 드리며 일했고 일과 후에는 『전경』이나 『대순지침』 한 구절이라도 보려고 했습니다. 일을 마친 후 다시 도장에 와 종의실 수호를 서며 몸은 더욱 회복되어 갔습니다.

  지난 4년여를 돌아볼 때 이 모든 것이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의 덕화(德化)가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듯합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된 것이지요. 과욕이 초래한 감내하기 힘든 고통, 극한 상황에서 재기를 위한 갈망, 죽음의 문턱에서 공포에 떨다가 건강을 회복한 일, 가정이 새롭게 평온을 되찾은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수도해 가면서 “함지사지(陷之死地)와 치지망지(致之亡地)” (『대순지침』, 94쪽)의 상황일지라도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전경』에 “천지지중앙심야(天地之中央心也) 고동서남북신의어심(故東西南北身依於心)” (교운 1장 66절)이라 말씀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상제님을 모시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려갈 것입니다. 오직 덕화(德化)입니다. 이것이 제가 절실히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 실천 방법으로 『대순진리회요람』에 있는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님에 대한 공부를 매일 반복했습니다. 항상 먼저 심고를 드리고 시작했고 또 깊이 생각해 보고 실천하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제님에 대한 성(誠)·경(敬)·신(信)이 아주 미미하게 시작되겠지만, 나날이 더해 쌓여 가면 갈수록 극성(極誠)·극경(極敬)·지신(至信)을 향하여 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무한대로 가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도주님께 도전님께 그리고 천지신명께 그리고 모든 사람 모든 사물로 퍼져, 마치 동심원을 그리듯이 나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의 덕화로 이제 저는 예전과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수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시각각 과거를 망각하고 나태와 자만이라는 사심(私心)이 발동하여 요동을 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며 일심(一心)을 향해 수도에 전념(專念)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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