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2년(2012) 9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72) 청계탑 벽화이야기 일각문(一覺文) 대원종 고사 한마디 금강산 이야기 온고지신 대순칼럼 참관기(학술대회) 대순광장 민간신앙 나누고 싶은 이야기 독자코너 독자사연 대학생 종교문화답사기 종교산책 생각이 있는 풍경 내가 읽은 책 퀴즈 및 퀴즈 정답자 알립니다

대원종 : 대순사상의 일심(一心)에 대한 이해 - 불교의 일심과 비교를 중심으로 -

대순사상의 일심(一心)에 대한 이해

 

- 불교의 일심과 비교를 중심으로 -

 

연구위원 강남규

 

 

 

머리말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일심에 대하여 언급하신 여러 구절들이 있다.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낙언(鄭樂彦)은 죽고 최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의 군함을 물리치리라”(교법 3장 20절)

“군자신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예시 50절)

“인간의 복록은 내가 맡았으나 맡겨줄 곳이 없어 한이로다. 이는 일심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라.(교법 2장 4절)”,

“내가 비록 서촉에 있을지라도 일심을 가지는 자에게 빠짐없이 찾으리라.(교법 2장 13절)”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면 그렇게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이라.”

(권지 1장 18절)

 

 

  이처럼 일심에 대한 용례(用例)는 『전경』의 곳곳에 나와 있지만 이에 대한 정의는 없고 다만 마음에 대한 정의만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불교에서는 일심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여 왔다. 그러므로 『전경』의 마음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불교의 일심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여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일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01의 일심

 

  일심(一心)의 ‘일(一)’은 단순히 숫자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닌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심은 전체의 마음, 큰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마음은 마음의 본체02와 그것을 가리는 심식(心識)03으로 구분된다. 또한 삼계유심(三界惟心)이라 하여 우주를 마음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일심은 마음의 본체, 만유의 본체인 진여(眞如), 삼라만상의 현상계인 법계(法界) 등의 뜻으로 쓰인다.

  일찌기 원효는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두 가지를 합하여 일심이라 하였다. 심진여문은 차별과 경계가 무너진 열반적정의 자리이다. 심생멸문은 청정한 일심이 무명번뇌에 쌓여 요동치지만 본래의 성품은 잠복하여 언제든지 수도를 통해 회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깨달음으로서의 일심은 차별과 경계가 무너져 마음의 본체를 자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번뇌가 소멸하지 않아 마음의 본체를 자각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의 본체를 잃은 것은 아니므로 일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유컨대 바다가 풍랑을 만나 파도를 일으키지만 바람이 지나고 나면 그 파도는 본래의 고요한 바다로 돌아간다. 원효는 이를 ‘일심의 바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넓은 바다는 본각인 일심의 본원을 의미하고 바람은 무명을 뜻하며 파도는 불각인 중생심을 뜻한다. 그리고 바람에 의하여 일으키는 파도를 심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일심 수행은 개체의식을 소멸04시키고 마음의 본체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대순사상의 일심

 

 『전경』에서 상제님께서는 마음에 대해 정의하시기를 “마음이란 귀신의 중추기관이요 문호요 도로이다. 추기를 열고 닫고 문호를 출입하고 도로를 왕래하는 신은 혹은 선한 것도 있고 혹은 악한 것도 있다. 선한 것은 스승으로 삼고 악한 것은 고친다. 내 마음의 추기요 문호요 도로는 천지보다도 크다.05(행록 3장 44절)” 라고 하셨다.

  이상의 정의를 보면, 마치 마음은 귀신들이 사용하는 그들의 소유물처럼 보여 정작 마음의 주인은 왕래 출입하는 귀신들의 선악에 따라 스승으로 삼느냐 고치느냐만을 결정할 수 있는 매우 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귀신들이 왕래하고 출입하는 데에 따라 마음이 팔린다면 마음의 주인은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추기요 문호요 도로’라는 것은 귀신들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내 마음이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사용하는 추기요 문호요 도로는 천지보다도 크다고 한다. 이때 내 마음이 사용한다고 할 때의 그 마음은 용사(用事)기관으로서의 마음이 아니라 본체(本體)로서의 마음 즉, 심령(心靈)06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대순진리회요람』의 마음에 대한 설명을 보면 마음이 외부로부터 귀신이 왕래하고 출입하는 수동적인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여지는 구절이 여럿 있다. 즉, 마음은 일신의 주(主)로서 행동과 기능을 주관하며 전체를 통솔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귀신이 드나드는 창구이기만 해서는 이러한 기능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마음은 다른 표현으로 심령(心靈)이라고도 한다. 유교나 불교에서 마음은 허령불매(虛靈不昧) 또는 불성(佛性)이나 성자신해(性者神解)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영(靈)적인 혹은 신(神)적인 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추기요 문호요 도로는 용사기관으로서의 마음으로 외부적으로 귀신이 드나드는 창구인 동시에 내부적으로 영이 바깥과 교류하는 통로07이기도 하다. 본체로서의 마음 즉, 영이 용사기관을 통하여 바깥과 교류할 때 그 용사기관으로서의 마음은 천지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령(心靈)으로서의 마음은 정직과 진실이라고 하는 가치를 저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심은 본체적인 심령(心靈)을 자각하여 외부적으로 교류하는 통로를 확보한 상태로서 이것이 곧 심령(心靈)의 통일인 것이다. 이 심령이 통일된 경지가 가히 일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만화도제(萬化度濟)에 이바지 한다는 것이 『전경』의 일심의 용례08와 유사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의 일심에 관한 다른 용례 중, 일심의 속성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최면암의 일심, 군자신의 천추혈식,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는 경우 등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최면암의 일심은 의리(義理)와 같은 도덕적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한 경우이고, 군자신이 천추혈식(千秋血食)한 경우는 오랜 세월 일관된 마음으로 꾸준히 수도를 한 것이며, 세 번째 경우는 짧은 시간이지만 일관된 마음과 형식으로 행동을 한 경우이다. 이 세 경우의 공통점은 심령(心靈)의 속성 즉, 불변성과 도덕적 가치의 내재성에서 나온 마음이라는 것이다.

  불변성에 관하여, 『전경』의 구령삼정주(九靈三精呪)에 의하면 우리 몸 안에 구령(九靈)과 삼정(三精)이 있고 이는 하늘의 북두구신과 삼태성(三台星)과 상응되어 있어 하늘 위에서 우리의 몸을 비추어 주고 우리의 몸은 밑에서 그에 응한다. 더구나 영성불이(靈星不移)라 하여 별과 영은 다른 데로 옮겨가거나 변하지 않는다.09 즉, 영이 몸과 마음에 붙박이로 있다는 것이다.10 그런데 흔히 불교에서 깨달은 경지를 부동심(不動心)11이라 하고 대순사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12 그러므로 일심은 그 속성으로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성질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도덕적 가치의 내재성에 관하여, 『전경』에서는 ‘선자사지(善者師之) 악자개지(惡者改之)’라 하여 마음의 본성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인성(人性)은 본래 천성(天性) 그대로인 것으로 정직과 진실한 것이라 하였다. 정직(正直)은 사곡(邪曲)과 대비되는 것으로 직(直)은 ‘곧다,올바르다, 의롭다’라는 가치 판단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마음의 본성은 이러한 정직과 진실이라는 가치(價値)를 이미 함축하고 있어 ‘선자사지 악자개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심은 도덕적 가치나 불변성이라는 마음의 본체의 속성이 발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속성의 발현이 지속되어 완전한 깨달음이 이루어진 경우와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심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양심은 여전히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둑이나 사기꾼도 자기 자식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 일심으로 구하려 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도의 완성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 하더라도 마음의 본체가 사심에 가려지지 않고 온전히 발현된 경우 또한 일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심은 심령이 지속적으로 통일된 경지로서의 일심과 일시적으로 본성의 작용이 발현된 일심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일심의 수양

 

1) 불교적 시각

  불교에서 일심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마음의 본체의 자각이라면 우리의 일상의식으로는 일심을 자각할 수 없다. 그것은 일상의식이 주관과 객관, 너와 나로 이원화되어 있는 마음으로 항상 시비분별, 선악투쟁, 번뇌 망상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日常)의식은 주관과 객관 등으로 나뉘어진 대상(對象)의식이다.13 이때 보여지는 대상인 객체는 보는 주체와 무관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객관적 대상은 나의 주관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은 나의 마음의 투영에 불과한 것으로 주관과 객관 모두가 다 나의 마음인 것이다. 이는 곧 객관적인 외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맺힌 상(像)을 보는 것이다.

 

 

 

  마음에 맺힌 상이란 인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마음 속에 저장된 그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해석해 내는 것인데 이것을 식(識)이라 한다. 우리가 의식이라 함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대상의식은 근본적으로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감각작용으로서 육신(肉身)에 의존해 있는 마음이다.

  대상의식은 인체의 감각기관(안, 이, 비, 설, 신, 의)에 의한 인식작용이다. 이 인식작용은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온 빛과 소리의 파동을 뇌에서 분석하여 그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외부와 소통한다. 이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뇌에서 해석한 의미전달을 위하여 언어가 필요해진다. 언어에 의한 관념에 의해 즉, 모르스 기호와 같은 암호에 의해 서로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암호에 의한 소통은 암호에 대한 해석능력과 암호 자체의 표준화 문제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로 소통의 장애를 가져 온다. 또한 뇌에서의 해석으로 인한 소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상호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이미지화 된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나 모든 사물은 순간순간 시시각각 변함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나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에 뇌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객체에 덧씌워 현재의 모습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들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이미지화 한 그대로 생각하고 보고 듣고 한다. 즉, 마음의 상태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본래적 기능을 회복한 상태에서는 육신이나 자신이 처한 물질적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육신이 처한 물질적 환경에 의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같은 물을 사람이 보는 것과 물고기가 보는 것은 엄청 다를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럴까? 물고기는 물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이는 물고기는 자신의 육신이 물 속에 살고 있어 물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기 때문에 봐야 할 대상인 물이 보는 자인 물고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속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마음이 육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의 이야기이다. 마음이 육신의 제약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아상(我相)이 생기고 마음은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된 대상의식으로 전도(顚倒)된다.

  이와 같이 이원화된 대상의식으로는 실상(實像)을 볼 수 없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듯이 의식이나 행동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본체는 이러한 이원화된 대상의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知識)으로 아는 것일 뿐 실상을 본 것 즉, 깨달은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일상의식은 주객으로 이원화 된 대상의식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일심을 위한 수도는 이러한 상대적인 마음을 통일하여 절대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한 수도는 자신의 마음이 이원화된 대상의식임을 자각함으로써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이 다 자신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여지는 대상은 내 마음의 분열된 파편들이므로 조각모음을 하는 것은 일심으로 가는 첩경일 것이다. 일심이 되는 과정은 이원화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으로서 정신 통일의 과정이다. 또한 마음이 이원화 된다는 것은 상대(相對)가 있다는 것으로 대립된 경계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일심은 경계와 분별심과 자아의식의 무너짐이다. 스스로 경계를 지은 대상의식의 무너짐이므로 이것을 적멸(寂滅)이라고도 한다. 이는 자기 안에서 싸움이 사라져 평화가 찾아왔다는 의미이다. 대상의식에서는 투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이는 옳고 그름, 선과 악,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며 이것이 번뇌의 원인이다. 이러한 번뇌가 끊어진 상태에서 마음의 본체를 자각한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한다.

 

 

2) 대순사상의 시각

  사람의 마음은 천성 그대의 본성인 양심(良心)과 물욕에 사로잡힌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일심 수도는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회복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심을 버리는 과정이 수심연성(修心煉性) 세기연질(洗氣煉質)이고 양심을 회복하는 과정이 인륜 도덕과 경위를 밝혀 나가는 것이다. 양심은 천성(天性)으로 도덕적 가치가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천리(天理)가 이미 인간에게 내려와 있는데 인간은 물욕에 젖어 본래의 성품이 발현이 잘 안 된다. 사심을 발생시키는 물욕(物慾)은 단순히 물질적인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인체에 대한 욕망에서 나오는 모든 유형의 마음을 포함한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아의식(自我意識)에서 비롯된 시비심(是非心), 시기 질투하는 마음, 명예욕, 권력욕, 색욕 등 모든 상극(相剋)적인 마음이 포함된다. 이러한 자아의식이 있으면 나와 남을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고 비교하는데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생기고 여기서 온갖 부정적인 마음이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욕에서 비롯된 자아의식을 포함한 사심이 소멸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정적인 마음이 발생하므로 결국 무사지공(無私至公)한 마음이 될 수 없게 되고 천성인 양심 속에 내재된 도덕적 가치가 발현될 수 없게 된다.

  또한 물욕에서 발동하는 사심은 외부적인 환경이 바뀌면 따라서 바뀌는 성향이 있다. 애초에 사심의 발동근거가 외부적 요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심은 자신에 내재해 있는 도덕적 가치에서 발동하는 것이므로 외부적 환경의 변동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부동적 성격을 갖는다.

  즉 변함없는 마음으로 오로지 무사지공하게 되어 양심만의 발로인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고 사심이 범접하지 않았을 때 마음의 본체인 심령이 용사기관으로서의 추기요 문호요 도로를 전일(專一)하게 사용하게 됨으로써 심령이 통일된다 할 것이다. 이때 통일된 심령은 외부적으로 신명과 용사기관으로서의 마음을 통하여 서로 소통함으로써 그 신명의 좋은 것을 스승으로 삼아 배워서 경지가 신명과 같아짐으로써 신인조화가 되어 만화도제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위의 경우와 같이 사심이 완벽히 배제되지 않고서는 일심이 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전경』에서의 일심에 대한 용례를 보면 상제께서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면 그렇게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이니라.”(권지 1장 18절) 하셨다. 이는 일심의 속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비록 심령이 통일된 상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누구나가 이러한 속성이 실현된 마음이라면 그것 또한 일심이라는 것이다.

사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도 양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마음의 깊은 근저에는 본성인 양심이 그 부동적 속성을 발현한다면 이것도 일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동적 속성의 발현을 위한 방법으로는 양심의 발로인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거나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념(想念)에 의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定)한 일정한 규칙에 의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맺음말

 

  이상 지금까지 일심에 대하여 논한 것을 정리한다면, 불교의 일심은 깨달음의 경지로서의 일심과 번뇌 속의 일심이 있다. 전자의 일심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원화된 일상의식을 넘어선 것으로 자아의식이 소멸하여 마음의 본체를 자각한 상태를 말하고, 후자의 일심은 번뇌 속에 있을지라도 마음의 본체에서 분리된 것은 아니므로 일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대순진리회의 일심은 깨달음의 경지로서 심령이 통일된 상태가 있고 깨닫지 못한 상태의 일심으로서 심층의 부동하는 영적(靈的)인 마음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 부동의 속성이 일상 속에 실현된다면 그것도 또한 일심이라는 것이다.

  일심의 자각이 불교는 개체의식 혹은 자아의식이 소멸한 경지에서 일어나고, 대순진리회의 심령통일은 도즉아 아즉도의 경지에서 일어난다. 불교의 일심이 마음의 본체와 삼라만상의 법계 전체를 의미한다면, 대순진리회의 일심은 마음의 본체인 심령의 통일과 심령의 속성의 발현을 의미하고 인륜을 바로 행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진법을 수행하여 만화도제에 이바지 하는 것이라 하겠다.

 

 

 


01 여기서의 불교는 대승불교로서 한국 불교이고 일심 사상은 원효의 사상이다.

 

02 자성(自性) 청정(淸淨)한 진여의 마음 또는 불성(佛性),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도 없어지지 않으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한다.

 

03 이 심식에는 여덟 가지로 팔식(八識)이 있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식(六識)과 칠식(七識)인 자아의식의 말나식(末那識)과 팔식(八識)으로 아뢰야식이 있다. 앞의 오식(五識)은 감각기능이고 육식(六識)은 사고에서 나타나는 정신인식이다. 아뢰야식은 의식을 초월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초개체적인 진여에 뿌리박고 있지만 그것은 개체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므로 아뢰야식은 진여로 돌아가려는 성향과 무명(無明)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04 불교의 심우도를 보면 견성의 단계에 이르면 소도 사라지고 동자도 사라진다.

 

05 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

 

06 정신(精神)의 근원(根源)이 되는 의식(意識)의 본바탕. 곧, 마음 속의 영혼(靈魂),육체(肉體)를 떠나서 존재(存在)한다는 마음의 주체(主體). 주자(朱子)는 영(靈)적인 것은 마음이요 명덕(明德)은 성(性)이라 하였다.

 

07 이는 신인조화의 통로이기도 하다. 신인조화란 자각적인 영이 외부적 신명과 통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아 나중에는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여 경지가 같아진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08 상제님께서는 일심을 가진 자는 능히 만리 밖의 군함을 한 손가락으로 튕겨 물리친다고도 하셨다.

09 “하늘에는 탐랑 거문 녹존 문곡 염정 무곡 파군 좌보 우필의 아홉 개의 별이 있고 사람에게는 천생 무령 현주 정중 자단 뇌뇌 단원 태령 영동의 아홉의 영이 있다. 하늘에는 허정 육순 곡생의 삼태가 있고 사람에게는 태광 상령 유정의 삼정이 있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이고 별과 영은 옮겨가지 않고 서로 따르며 인간을 수호하고 나의 몸을 위에서 비추고 아래에서 응한다.(교운 2장 41절)”

10 이는 청정한 본성이 숨어 잠복해 있는 상태로서 우리가 깨닫지 못한 상태라도 우리에게 부단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불교의 여래장과 유사한 것이다.

11 의상의 법성게(法性偈)에 ‘구래부동 명위불(舊來不動 名爲佛)’라고 한 구절이 있다.

12 『대순진리회요람』의 삼요체 중 신(信)에서는 “한 마음을 정한 바엔 … 만고를 통하되 사시와 주야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을 경과하되 강하와 산악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 .”라고 설명하고 있다.

 

13 한자경, 『일심의 철학』참조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