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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변산 불사의방(邊山 不思議房)
변산 불사의방(邊山 不思議房)
연구위원 장선렬
예로부터 방장산, 두승산(영주산), 변산은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이라 불러왔다. 그중에서 변산은 『전경』에도 언급된 곳으로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라 하였다. 변산은 절경이라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계산(仙溪山)이라 했고, 고려시대에는 현계산(賢戒山)이라 했으며, 호남의 금강산이라 하여 봉래산(蓬萊山)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변산은 곳곳마다 산세가 험하고 등산로에 사다리와 로프를 설치할 만큼 초행자는 오르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산마다 특징이 있듯이 지리산이 높고 험준하며 거친 남성적인 산이라면, 변산은 낮으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적인 산이라 할 수 있는데, 가는 곳마다 기암으로 둘러싸여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상제님께서는 변산에 24혈이 있다 하시고 해왕(海王)이라고도 하셨다. 변산은 진표율사가 득도한 ‘불사의방(不思議房)’이 있는 곳이어서 친숙하게 느껴지지만 웬만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찾아 나서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불사의방’을 가려고 오래 전부터 답사계획을 세워놓고 기다리다가 날씨가 좋은 날을 잡아 변산으로 출발했다.
저수지 위쪽의 소방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소방도로 중간 중간이 험하게 유실되어 있어 지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끝나는 지점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도로의 끝지점에서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골짜기를 따라가는 길은 중간에 길이 유실되어 갈 수 없었다. 다른 길은 오른편 산 능선을 따라 가는 것으로 이 길을 따라 1시간 반 남짓 올라가니 ‘불사의방’이 있는 절벽에 도착하였다. 절벽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약 100m쯤 가면 좌측으로 ‘불사의방’ 입구가 나오는데 초행길이면 좀처럼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이번이 두 번째 산행으로 올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내심 산행에는 자신 있었지만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오만에 불과했다. 가는 곳마다 절벽으로 한참을 헤매다가 결국 공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입구를 찾은 적이 있었다.
불사의방이 위치한 의상봉은 의상대사가 지은 의상사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의상봉 자락의 절벽 위에 서서 바라본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여 올라오면서 힘들었던 생각은 사라지고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상쾌했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절벽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여기서 간신히 사람 하나 지날 정도의 좁은 통로를 타고 돌아들어가니 깎아지를 듯한 절벽 중간에 폭 3m의 타원형구조로 된 3평 남짓한 공간이 나왔다. ‘불사의방(不思議房)’이 지닌 뜻처럼 ‘마음을 비우고 신에게 올바른 것을 묻는 방’으로 이 낭떠러지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방이었다. 언제 조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와조각들이 있고 주춧돌로 사용했을 만한 바윗돌이 있었다. 절벽 중간에는 쇠사슬로 묶었던 흔적이 있는 굵기 5cm정도의 사각형 모양의 쇠가 바위에 박혀 있었다. 지금도 주변 마을에서는 불사의방을 ‘다래미절터’ 또는 ‘다람쥐절터’라고 부르는데, 쇠사슬로 집을 달아매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인 듯하다.
( 『동국이상국집』 제23권 「남행월일기」 )
▲ 불사의방에서 본 전경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출가할 뜻을 품으니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금산수(金山藪)의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순제법사가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고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彌勒)ㆍ지장(地藏) 두 보살 앞으로 가서 간절히 참회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율사는 가르침을 받들어 하직하고 물러나와 두루 명산을 유람하였다.
위 글은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의 내용으로 이 기록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기미년(1199)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진표전간」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의 내용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인 맥락은 같다.
▲ 원효굴
불사의방을 나와 병풍같이 펼쳐진 절벽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절벽이 끝나는 지점에 원효대사께서 수도했다는 자연식 동굴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 불사의방에 비해 상당히 넓은 동굴로 안에는 맑은 샘물도 나와 족히 4~5명은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원효대사(617~686)께서 입적하신 후에 진표율사께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면 당시에도 이 동굴은 있었을 것이다. 1년을 기약하고 수도에 들어갔으나 이루지 못하고 3년이란 세월을 벼랑 위에서 눈비를 맞으며 수도를 할 때, 불과 1~2백 미터 떨어진 이곳의 안락한 수도처를 두고 벼랑 끝에서 일심으로 수도에 정진을 했다고 생각하니 산을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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