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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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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 역사인물 : 진시황

진시황

글 교무부

 

  경석이 상제의 명을 받들어 양지 二十장으로 책 두 권을 매니 상제께서 책장마다 먹물로 손도장을 찍고 모인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것이 대보책(大寶冊)이며 마패(馬牌)이니라.” 또 상제께서 한 권의 책명을 “의약복서 종수지문(醫藥卜筮 種樹之文)”이라 쓰시고 “진시황(秦始皇)의 해원 도수이니라” 하시고 한 권을 신 원일의 집 뒷산에 묻고 또 한 권을 황 응종의 집 뒤에 묻으셨도다. (공사 3장 17절)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기원전 221)를 마감하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이가 진시황이다. 아버지 자초(子楚)가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진(秦)이 여러 차례 조를 공격했으므로 조나라는 자초를 우대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진 왕실의 서손(庶孫) 중의 한 사람이라 생활이 궁핍하였다. 한(韓)나라 양책[陽翟,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의 큰 상인이었던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가 한단에 왔을 때 자초의 딱한 형편을 듣고 가엾게 여겨서, “이건 진귀한 물건이다. 사두어야겠다.”라고 말하고 자초를 찾아갔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현재 진나라 왕실 내부형세를 말한 뒤 자초가 장차 태자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써보겠다고 말했다. 자초는 여불위의 말에 감동하여 “만약에 당신의 계획대로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에게 나누어주겠소.”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사기』「여불위열전」에 전한다.

  여불위는 500금을 자초에게 주며 많은 사람을 사귀게 하였으며, 500금을 들여 진귀한 물건들을 산 뒤 진나라로 가서 태자인 안국군(安國君)이 총애하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언니를 만난다. 그녀를 설득, 화양부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결국 화양부인의 양아들로서 안국군의 후계자가 되게 하였다. 어느 날 자초는 여불위가 초대한 술자리에서 여불위 애첩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자신에게 양보해 줄 것을 청했다. 여불위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기꺼이 자초에게 바쳤다.

  이때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열두 달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후에 진시황이 되는 영정(政)이다. 진소왕(秦昭王) 50년(기원전 257)에 장군 왕기(王)를 시켜서 한단을 포위하자 위기에 처한 조나라에서는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의논하여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황금 6백 근을 주고 탈주하여 진의 진영으로 올 수 있게 되어 마침내 귀국할 수 있었다. 조나라에서는 자초의 처자를 죽이려 했으나 다행히 몸을 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뒤 6년의 세월이 흘러 진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진효문왕(秦孝文王)이다. 그는 화양부인을 왕후로, 자초를 태자로 봉했다. 조나라 왕은 자초와 잘 지내고자 그의 처자를 진나라로 돌려보냈는데 당시 정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진소왕이 56년을 재위하다 보니 그의 아들 효문왕은 53세가 되어서야 등극할 수 있었다.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시름시름 병을 앓아오던 효문왕은 등극한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으로, 자초가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진장양왕(秦莊襄王)이다. 보위에 오른 그는 화양부인을 태후로 봉하고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아 문신후(文信候)에 봉하고 하남 낙양(洛陽)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모든 것이 여불위의 계획대로 된 것이다.

  장양왕이 즉위 3년 만에 서거하고 태자 정이 왕위를 이었다. 진시황은 이때 나이 13세(기원전 247)였다. 그는 여불위를 높이어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 불러 우대했다. 진시황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후는 남의 눈을 피해 여불위와 사통하고 있었고, 여불위의 집에는 하인이 1만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여불위는 천하의 인재를 초빙하여 우대하니 식객이 3천 명에 이르렀다. 그는 식객들에게 각자 견문한 것들을 쓰게 하여 20여 만 자로 된 『여씨춘추(呂氏春秋)』01를 편찬(기원전 239)하였다. 이 책을 통해 통일제국의 치국이념과 함께 하나의 위대한 제국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통합의 서막을 열고자 했다.

  한편, 진시황이 장년이 되었는데도 태후의 음란은 그칠 줄 몰랐다. 여불위는 일이 발각되어 자기에게 화가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사내구실을 잘할 것 같은 노애(嫪毐)라는 자를 몰래 구했다. 그에게 거짓으로 궁형을 가해 환관을 만든 후 태후를 모시게 했다. 태후는 노애와 사통하여 임신하게 되자 궁을 옮겨 살게 되었고, 노애는 장신후(長信候)에 봉해졌다. 하지만 진시황 9년(기원전 238)에 친정(親政)을 하기 시작하였고 태후와 노애의 일을 밀고하는 자가 있어 이 사건에 여불위까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마침내 알게 되었다.

  결국, 진시황은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가 낳은 두 아들도 죽였다. 다음 해에 상국 여불위의 직책을 파면하고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하남의 영지로 가 있게 했다. 여불위에게 면회를 청하는 제후의 빈객(賓客)이나 사자(使者)들이 끊이지 않자 진시황은 그가 역모라도 꾸미지 않을까 두려워 그에게 ‘일가를 이끌고 촉(蜀) 땅으로 떠나도록 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여불위는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다고 생각하고, 또 처형되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짐독(毒)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집정한 12년 동안 진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신장하였고, 진이 천하를 통일한 후 얻은 총 군(郡) 수의 절반에 가까운 영토를 얻는 등 천하통일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잠깐 진시황의 탄생설화에 대해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당시는 전국시대 말기로 이미 오랜 전쟁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일반 민중에게 통일제국에 대한 염원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염원을 한데 모아 여불위는 그 무렵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진나라의 승상으로 통일의 초석을 닦았고, 많은 지식인과 『여씨춘추』를 편찬했다. 이런 숭고한 뜻을 가진 여불위의 인격으로 보아 진왕조에 아들일지 딸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과연 자기 혈육을 밀어 넣을 수 있었을까? 또, 승상의 신분으로 무슨 연유에서 태후와 그렇게 사통하였을까?

 

 

 

  물론 『사기』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한(漢) 대에 와서 한고조의 애첩이었던 여태후(呂太后)가 자기가 진시황의 혈통을 이은 여씨라는 정통성을 세워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조작한 설화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로부터 80여 년 후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를 썼으니 당시에 진시황의 혈통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항간에 퍼져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역사는 꼭 진실만을 기록하지는 않으니 말이다.02

 

 

 

  진시황이 등극할 당시 진은 이미 부강하여 파(巴), 촉, 한중(漢中)을 합치고 영()을 차지하여 남군(郡)을 두었고, 북쪽으로는 하동, 태원, 상당 등의 군을 차지했다. 동쪽으로는 형양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를 멸망시키고 삼천군을 두는 등 통일제국 진나라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것은 진효공(秦孝公)이 변법(變法)을 시행한 이후 6대에 걸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진나라는 진양공(秦襄公)이 동주 초기에 봉지를 받고 나라를 세운(기원전 770) 후 백여 년 동안의 피나는 노력으로 진목공(秦穆公)에 이르러 마침내 중국 서부를 호령하는 강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진목공 이후 200여 년 동안 내란이 끊이지 않아 진의 국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진나라는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멸시를 받았으며 제후들의 동맹에서도 제외되었고 국제적인 일에서도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효공은 상앙(商)03을 등용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법관념을 확립하고, 십오연좌제(什伍連坐制)를 통하여 국가의 통제와 감시 속에 백성을 두고 법령을 일관되고 효율적으로 집행하였으며, 현제(縣制) 실시, 군공(軍功) 장려, 농지경작 장려 등을 골자로 하는 변법을 시행하였다. 이 상앙의 변법은 정치  경제  군사적으로 강한 진나라를 만들었으며 진시황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크게 도움을 가져다준 개혁이었다.

  진시황 10년 대규모로 빈객을 색출하여 추방하려 했다. 이사(李斯)가 글을 올려 설득하니 축객령(逐客令)을 거두었다. 이사의 말에 따라 한(韓)나라를 공격하자 한은 한비자(韓非子)를 파견하여 진의 공격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이사의 간언으로 죽게 된다. 진시황 17년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기점으로 조(趙, 19년)  위(魏, 22년)  초(楚, 23년) 연(燕, 25년)  제(齊, 26년)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마침내 진시황 26년(기원전 221)에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진시황은 스스로 공(功)은 오제(五帝)04 때보다 많고 땅은 삼왕(三王)05 때보다 넓다 하여 다른 임금들과 같이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그의 자손을 ‘2대 황제’, ‘3대 황제’라고 부르도록 하여 그 이름이 만세에 이르도록 했다. 자신을 짐(朕)이라 칭했으며, 왕명(王命)을 제(制), 왕령(王令)을 조(詔)라 부르게 했다. 또한,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제(封禪祭)를 거행하였으며 서불(徐市)을 보내 어린 남녀 수천 명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로초를 구하게 했다.

  이사의 건의에 따라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어 그 산하에 현을 두는 군현제(郡縣制)와 관료행정 기구를 통해 중국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 정치적 실체로 바꾸었다. 그는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하고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전 지역과 소통할 수 있는 도로를 건설하였으며, 화폐  도량형(度量衡)  문자[예서(隸書)] 통일 등을 단행했다. 이것은 정치적 통일에 호응하여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도 통일을 촉진하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통일 정책은 후대의 중국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사의 건의로 의약(醫藥)  복서(卜筮)  종수(種樹) 이외의 서적을 모두 불사르는 분서령(焚書令)06을 통해 사상의 통일을 기했으며, 유학자 460여 명을 파묻어 죽이는 갱유(坑儒)를 단행하는 참혹함을 보이기도 했다.

 

 

▲ 만리장성: 험난한 대 토목공사에 동원되었던 당시 백성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통일이 되기 오래전부터 북쪽의 흉노가 남하하여 약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연(燕)과 조(趙)와 진(晉)은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는데, 이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고 서쪽으로는 임조(감숙성 북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요동의 연무에 이르는 전체 길이가 만 리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하였다. 만리장성은 이민족과 적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민족이 하나로 응집할 수 있는 정신적인 결속력을 제공했다. 또한, 죄수 20만을 동원하여 아방궁(阿房宮)과 여산릉(驪山陵)을 조영(造營)하였다.

  진시황이 각종 명목으로 동원한 백성은 약 2백만 명인데, 그 당시 전국 인구는 2천여 만 명 정도였다. 역사는 진시황 때를 ‘저의반도[衣(주황색의 죄수복)半道]’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은 과장해서 도로에 다니는 사람의 절반이 죄인이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법이 가혹하고 엄정했으며 비정상적인 사회였음을 알 수가 있다. 엄정한 법을 시행하여 강국을 만들고 짧은 기간에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시대의 잦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고통과 손실을 종식했지만, 과도하게 엄정한 법의 시행은 폭정(暴政)으로 이어져 결국 진의 멸망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였는데 동쪽으로 순행하던 중 사구(沙丘)의 평대(平臺, 하북성 평향현)에서 진시황 37년(기원전 210) 7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온량거(凉車)07에 실려 함양으로 돌아와 9월 여산릉에 장사를 지냈다.08 환관 조고(趙高)는 이사와 모의하여 장남인 부소(扶蘇)를 자결케 하고 막내인 호해(胡亥)에게 제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2세 황제의 잔혹한 통치와 정치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봉기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영향을 끼쳐 반진(反秦) 풍조가 매우 빠르고 광범위하게 고조되어 갔다. 유방과 항우 등이 진에 대항하여 거병하였고 2세 황제의 자결로 부소의 장남 자영(子)이 황위를 계승하였으나 결국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진시황이 사망한 지 겨우 3년이 지났을 때 최초의 통일제국 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기원전 206).

 

 

참고문헌

ㆍ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본기』, (주)을유문화사, 2007.

ㆍ사마천, 「여불위열전」 『사기』.

ㆍ사마광/ 권중달 역, 『자치통감1』, 삼화, 2007.

ㆍ천징/ 김대환ㆍ신창호 역, 『위대한 폭군 진시황 평전』, 미다스북스, 2001.

 

 

 


01 「십이기 十二紀」ㆍ「팔람 八覽」ㆍ「육론 六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道家)ㆍ유가(儒家)ㆍ법가(法家)ㆍ음양가(陰陽家)ㆍ농가(農家) 등의 여러 설과 시사(時事)를 수록하고 있어 선진(先秦)시대의 사상사 등을 연구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총 26권.
02 이 내용은 작가이자 학자인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이 『사기』보다 좀 더 앞서 쓰인 『전국책』에는 진시황 탄생설화가 없고, 사실 여부를 추론해볼 수 있는 증거도 없다며 주장한 내용이다. 또한 다른 견해로, 청(淸)대의 왕세정(王世貞)은 여불위가 자신이 생부임을 암시하여 부자의 정리를 환기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목적, 또는 여불위의 죽음을 보고 분노한 그의 식객들이 화풀이로 진시황이 사생아라는 유언비어를 일부러 유포시킨 것이라고 한다.(천징/ 김대환ㆍ신창호 역, 『위대한 폭군 진시황 평전』, 미다스북스, 2001, pp.38~44 참조)
03 위(衛)나라 군주의 후손으로 위앙(衛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이라 불렸다. 어릴 때부터 형명지학(刑名之學)을 좋아하여 법가의 선구인 이리(李悝) 등의 사상에 심취했다. 진효공에 의해 등용되어 변법을 시행, 강국 진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나 진효공 사망 후 구세력의 반발로 거열형을 받고 죽음.
04 고대 중국의 다섯 성군(聖君).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이르는데 소호 대신 황제(黃帝)를 넣기도 한다.
05 하(夏)나라 우왕(禹王), 상(商)나라 탕왕(湯王), 주(周)나라 문왕(文王).

06 이사가 ‘옛것으로 지금의 진나라 정책을 비난한다(以古非今者族…)’는 명분으로 『詩(시경)』, 『書(서경)』 및 제자백가의 서적을 모두 불태우게 건의하였다. 의약ㆍ복서ㆍ종수에 관해 『사기』「진시황본기」에는 “所不去者醫藥卜筮種樹之書”(태우지 않아도 될 것은 의약, 점복, 농사와 나무에 관련한 서적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07 창문을 만들어 더우면 열고 추우면 닫을 수 있게 장치한 수레.
08 …아들은 벌써 숨을 거뒀도다. 운익이 돌아간 후에 종도들이 구월음의 뜻을 여쭈었더니 가라사대 “구월 장시황어 여산하(九月葬始皇於驪山下)라 하니 이것은 살지 못할 것을 표시함이로다. …(권지 1장 10절). 이 구절은 상제님께서 ‘구월 진시황을 여산 아래에 장사지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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