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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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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전간재(田艮齋)

전간재(田艮齋)

 

 

글 교무부

 

 

 

  상제께서 무신년 七월에 구릿골 약방에 계실 때 양지에 글을 쓰시더니 전 간재(田艮齋)의 문도(門徒) 五ㆍ六명이 대립(大笠)을 쓰고 행의를 입고 나와서 “선생님 뵈옵겠습니다” 하며 절을 하기에 상제께서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선생이 아니로다” 하시며 절을 받지 아니하시니 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섰다가 물러갔도다. (행록 4장 32절)

 

 

  우리나라의 19세기 중반에서부터 20세기 초반은 외세 침략과 사회적 동요로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가치관까지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더욱더 다양한 학파와 학풍을 형성하였다. 그들 중에 율곡과 우암으로 대표되는 기호유학(畿湖儒學)01의 학맥을 계승한 학자로, 전북 부안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라는 인물이 있었다.

  초명은 경륜(慶倫)ㆍ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ㆍ추담(秋潭)ㆍ간재(艮齋)이다. 그는 관향이 담양(潭陽)으로 1841(헌종 7)년 음력 8월 13일 전주부 청석리(지금의 전북 전주)에서 아버지 전재성(田在聖)과 어머니 남원 양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간재는 9세(1849년)에 눈 내리는 겨울날 즉석에서 시(詩)를 읊어 천재성을 보였다. 14세에 당시의 석학들과 교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려는 부친의 배려로 서울 정동(貞洞)에 이사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퇴계집』을 읽고 나서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자신의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21세 되던 해에 전재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그의 뜻은 더욱 확고해졌다.02

  그의 학문적 경향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주체인 심(心)이 성(性)에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존성적(尊性的) 사상에 뿌리 두고 있다. 즉, 그는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이라 하여 성(性)을 심(心)보다 존귀하게 보았다.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 또한 그의 심성론(心性論)이다. 그는 성사심제설을 통하여 ‘성이란 스승이요, 심이란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조선후기까지 부동의 자리를 지켜온 심통성정설(心統性情說)과 다른 점을 보인다. 심통성정설은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포함하면서 주재(主宰)한다’는 뜻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만이 본성을 바르게 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성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도덕적 본성이요, 정은 감정을 의미한다. 즉 성리학에서 성과 심을 존비, 사제의 관계로 설정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전간재의 성사심제설은 독창적인 특징을 가진다. 그리고 그의 이기론(理氣論)은 기호학 이기론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리(理)와 기(氣)는 서로 주재한다는 입장이므로 리가 동정(動靜)함을 주장하였다고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리의 동정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주재한다는 것을 ‘자재하는 것’, ‘자연(自然)한 것’으로 의미를 두어 ‘규범(規範)’으로서 가만히 있으면 기가 그것을 보고 알아서 그 규범대로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03 이러한 특징적인 사상들을 통해 그가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높이고 지선한 성을 회복하여 천명을 받들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인간성의 회복, 곧 선의 실현으로써 당시의 사회적 병폐를 구제해야겠다는 의지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를 바로잡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학문적 태도와 인품이 점차 명성을 얻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가 42세 때에 선공감역(繕工監役),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 강원도사(江原都事)를 제수(除授)하였다. 54세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55세에는 순흥부사(順興府使), 66세에는 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04

  1905년 일본과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전간재는 그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크게 한탄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1908년 그의 나이 68세에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항해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 하고 부안의 위도(蝟島) 서쪽에 있는 왕등도(旺嶝島)에 들어갔다. 그 후 1912년에 고군산(古群山)으로 옮겼다가 마지막으로 부안의 계화도에서 후진의 양성에 힘쓰다 192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05 이때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제자가 하루에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의 문하생은 3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선악과 시비에 관한 가치관의 혼란을 바로잡는 것은 인간 본성의 회복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로지 도학을 강론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길만이 유자(儒者)의 도리라고 여기고 학문 연구와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가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지만, 한편으론 그의 처신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는 난세를 피하여 도피하였다는 비난과 함께 3ㆍ1운동 직후 진행된 파리장서06에 서명하지 않아 실천적 위정척사론자들의 비난까지 받았다. 이 일을 보고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의 저자 현상윤(玄相允)은 전간재를 ‘부유(腐儒)’라고까지 혹평하였다. 전간재는 망국(亡國)에 도(道)마저 없어진다면 진정 나라를 잃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명예보다 도(道)를 보존하고 전수하여 항일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의 맥을 이어 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 행동이라 전한다. 또한 개화파인 박영효가 변복령과 단발령을 반대하는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조정에 건의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전간재는 전통 예법을 고수하고 회복하는 일이 무너진 국가 민족의 재건을 위한 토대라고 생각하였다.07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자 무력항쟁 의거나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일 등 시사(時事)에 참여하지 않고 평생 일제가 지배하는 육지를 밟지 않겠다며 섬으로 숨어버린 전간재의 처세에 의문을 가지는 문도들이 있었다.08 전간재가 왕등도로 떠난 해에 그의 문도 중 일부가 상제님을 찾아간 일도 있었다.(행록 4장 32절)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의 생전 때부터 자결을 통해 굳건한 항일의지를 보여주던 문도들도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의 문도들은 일본이 지급한 은사금을 일체 거절하여 고초를 겪었고, 호적에 입부되기를 거부하는 등 나름의 저항을 하였다. 그리고 독립지사들의 행적을 담은 문집을 발간하고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저항정신을 실천에 옮겨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09

  1922년 9월 13일 전북 익산군 삼기면 현동 후록(後麓 : 뒷산 높은 곳) 선영(先塋)에 전간재의 장사를 지내니 상복을 입고 영구 뒤를 따른 이가 2,000여 명이었으며 장례에 참례한 사람이 60,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10 후일 그의 제자들이 전간재의 유덕을 추모하여 근흥면 안기리에 영당을 건립하여 영정을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 제향을 올리며 참배하고 있다. 가히 우리나라 유문(儒門) 최후의 대종(大宗)이라 이를 만하다.

  그의 저서로는 원집 43권, 속편 16권으로 총 59권이며 원집 59권 가운데 34권은 편지로서 총 4,224편이라는 방대한 양이 실려 있다. 이후 그의 문도들이 『간재사고(艮齋私稿)』, 『간재선생문집(艮齋先生文集)』, 『추담별집(秋潭別集)』 등을 간행하였다.

 

   


01 기호유학은 리(理)와 기(氣)가 떨어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나일 수도 없다는 전제 하에 “理氣之妙”를 철학의 핵심에 전제한다. 따라서 이상에 빠지지도, 현실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독특한 철학을 기반에 두고 예학의 뿌리가 되기도 하고, 실학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이 학파는 양명학을 수용하고, 당시 이단학(異端學)으로 치부되던 노(老)·불(佛)의 해석도 단행했다는 특성이 있다.

02 간재사상연구회, 『艮齋思想硏究論叢』 제 1집, 간재사상연구회, 1994.

03 이상익, 『艮齋 田遇의 異說 비판과 그 의의』, 학술논문, 2005.

04 안진오, 『호남유학의 탐구』, 심미안, 2007, pp. 211∼224.

05 정보제공 : 부안군 문화관광과(http://www.gojb.net)

06 1919년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파리 평화 회의에 올린 한국 독립 청원서.

07 金文俊, 『艮齋 田愚의 抗日精神과 韓國 精神史的 意義』, 학술논문, 2004.

08 金文俊, 『艮齋 田愚의 抗日精神과 韓國 精神史的 意義』, 학술논문, 2004.

09 朴鶴來, 『艮齋學派의 學統과 사상적 특징』, 학술논문, 2007.

10 간재사상연구회, 『艮齋思想硏究論叢』 제1집, 간재사상연구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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