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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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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 : 『典經』에 나타난 손병희(孫秉熙) 연구

『典經』에 나타난 손병희(孫秉熙) 연구

 

 

글 연구위원 김성호

 

Ⅰ. 머리말

Ⅱ. 손병희가 일으킨 사건

    1. 조선정부정복계획 2. 갑진개화혁신운동 3. 3ㆍ1운동

Ⅲ. 손병희의 사설

    1. 귀국 후의 활동 2. 손병희의 순회강연 3. 종교국가론

Ⅳ. 맺음말

 

 

Ⅰ. 머리말

 

  『典經』을 읽다보면 천도교(天道敎) 3대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 1861~1922)와 관련된 내용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전반적인 내용은 그가 일으킨 사건이나 행위를 통해 상제님께서 그의 인물됨과 사상적인 면모를 평(評)하신 것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典經』에는 손병희가 일으킨 사건의 정황과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세세히 드러나 있지 않아 수도인들이 상제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여 필자(筆者)는 이에 관한 사실의 보다 세세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연구방법과 범위를 미리 상정한다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상제님께서 예견하신 ‘조선지말(朝鮮之末)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01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사건의 전말(顚末)을 구체적으로 고찰할 것이고, 둘째는 ‘손병희가 사설(邪說)로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진다는 상제님의 말씀’02에서 과연 손병희의 사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고, 당시 그가 교도(敎徒)들에게 강연한 교설(敎說)의 어떠한 내용이 교도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이에 관한 자료를 찾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손병희가 일으킨 사건

 

  상제님께서는 “조선지말에 이란(吏亂)이 있으리라 하는데 그러하오리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손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고 하시며 조선 말기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와 그 일의 성사여부까지 예견하셨다. 그렇다면 조선 말기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는 무엇이며, 그 거사는 왜 성공치 못했던 것일까?

  의암(義菴) 손병희는 천도교 3대 교주로서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은 밀양, 본명은 응구(應九)이며, 의암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도호(道號)이다. 그는 충북 청주(淸州)에서 아전(衙前)의 서자로 태어나 22세(1882년)에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후 1884년에 교주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1897년 12월 24일에 최시형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했다. 최시형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한 손병희는 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게 된다.

 

 

1. 조선정부정복계획

 

  손병희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손병희는 북접(北接)03의 우두머리로서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04의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官軍)을 격파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결국 1895년 원산(元山)ㆍ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한편 이 해(1895, 고종32)에는 고종의 단발령05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의 세력 강화를 획책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시행되면서 국민들로부터 일본 및 친일내각에 대한 반발이 거세져 전국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그러자 동학농민전쟁 후 관군에게 계속 쫓겨다녀야 했던 동학의 잔여세력들은 의병들의 봉기를 또 한번의 기회로 여기고 속속 의병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나가는 듯했던 의병운동도‘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 급기야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으로 도피’06함으로써 그 활동도 시들해졌다. 이에 동학의 잔여세력들은 활로를 바꾸어 영학당(英學黨)07ㆍ남학당(南學黨)ㆍ활빈당(活貧黨)08등의 조직에 가담하여 항쟁을 계속했지만 그 결과는 동학에 대한 국가의 탄압이 가중되어 전국 각처에 동학 교인들이 피살되는 사례를 낳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1897년) 그는 교주 최시형의 뒤를 이어 종통을 계승하고 3년 동안 교세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01년 동학의 지도급 인물인 손천민이 관군(官軍)에 체포되어 처형 당하고, 연이어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손병희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ㆍ이용구와 함께 몸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亡命)하게 된다.

 

▲ 일본 망명 당시 손병희와 그의 동지들. 앞줄 왼쪽으로부터 조희연ㆍ권동진ㆍ손병희ㆍ오세창. 뒷줄 왼쪽 첫 번째 인물이 손병희의 사상(思想)을 정리하여『천도교대헌』을 집필한 양한묵이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한 손병희는 이름을 이상헌이라 개명(改名)한 뒤 국내에서 국헌 문란 죄로 망명해있던 오세창, 권동진, 조희연, 박영효, 이진호 등과 교류하면서 동학(東學)의 재건을 위해 여러모로 고심하였다. 그는 장차 한국에서 개화와 혁신운동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국내의 동학교도 자제들 중 뛰어난 인재 64명을 선발하여 유학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젊은이들을 새로운 문명과 접촉시켜 세계적인 문명사조에 호응시킴으로써 부강한 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계획 아래 추진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과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한창 제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국이 이러하다보니 당시 두 나라에 비해 약소국이었던 조선은 러ㆍ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꼼짝없이 승전국에 예속되어야만 했다. 손병희는 장차 조선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세계정세를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고, 이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없었던 그로서는 발 빠르게 그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생각 끝에 그는 러ㆍ일 양국 간의 지리적 조건과 정신자세ㆍ군사전략의 차이 등을 들면서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전국이 될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조선은 미리 승산이 있는 나라에 우의를 표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조정에 상소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손병희 혼자만의 생각일 뿐 당시 친러파가 요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만무한 상황이었다. 이에 손병희는 국가의 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친러파 정권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그의 계획에 일본군의 힘을 빌리고자 권동진으로 하여금 당시 일본군 참모장이던 다무라〔田村〕09를 대면하여 그의 의중을 떠보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곧 다무라는 손병희의 계획에 동참하겠노라며 흔쾌히 승낙해왔다. 이에 손병희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뻐하며 장차 자신의 계획이 잘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자신의 친동생인 손병흠을 불러 일본군과의 합동 거사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내에 결집된 동학교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계획은 동학교도들이 모두 상인으로 가장하여 우리나라의 각 항구에 대기하였다가 다무라가 지원하기로 한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이들과 함께 도성(都城)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거사를 목전에 두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고국에 건너가 자신의 거사계획을 전달하고자했던 동생 손병흠이 부산에서 원인모를 이유로 급사(1903년 8월 3일)한 것이다.10 이와 동시에 든든한 동조자 다무라마저 손병흠이 급사한 이틀 뒤 (1903년 8월 5일) 연이어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하였다.11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손병희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12

 

 

2. 갑진개화혁신운동

 

  손병희가 다무라를 위시하여 일본의 군부세력과 국내교도들의 힘을 규합하여 시행하고자 했던 조선정부정복계획은 예기치 않은 동조자들의 급사로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하였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침식하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실의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국에 있는 법무대신 이윤용과 의정대신 윤용선을 시켜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동학을 국교로 지정하고 전국 360여 군에 민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정부에 상소문을 보냈다.13

  그러나 당시는 군권(君權)이 통치이념과 방법으로 절대시 되던 시기였던지라 민회(民會:=1903.3 대동회→1904.7 중립회→1904.9 진보회 등으로 변경됨)를 설치하여 민권과 민주이념을 고취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수용되기 힘든 사안이었다. 하여 손병희는 스스로라도 강력한 정당조직을 결성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동학교단의 중진들을 일본에 오게 하여 개혁에 관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민회(民會=大同會)14를 조직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한 중진들은 곧 그의 의사를 교인들에게 전달하고‘개혁(갑진개화혁신운동)’15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표증으로 단발흑의(斷髮黑衣)차림을 할 것을 당부했다. 당시는 고종의 단발령이 철회되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손병희가 이용구를 시켜 국내 교도들에게 명한 이 지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교도들의 마음을 또 한 번 불타오르게 했다. 이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전해져 1904년 8월 30일 단 하루 만에 상투머리를 자르고 검은 색 옷을 입은 사람이 16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민중이 어지러운 사회풍토를 바로잡아 새로운 사회문화를 창조하려는 개혁의지가 손병희의 강한 영향력으로 인해 한순간에 폭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중의 이 같은 노력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에서는 그들이 조직한 민회가 동학의 잔여세력임을 알아차리고 탄압을 가해왔다. 이로 인해 손병희는 같은 해 9월 조직명을 진보회16로 개칭하고 자신은 여전히 일본에 머물면서 국내에 있는 이용구로 하여금 진보회의 조직운영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은 이용구는 지체 없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전국적인 개화운동을 펼쳤지만 역시 관군의 탄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보회가 여러 번에 걸쳐 조직명을 개칭했다 하더라도 진보회의 구성원 자체가 10년 전 반란을 일으켰던 동학당이라는 것이 극명한 사실로 밝혀진데다, 더욱이 진보회의 강령에는 ‘현 정부를 개혁한다는 것’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어 정부와 진보회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친일파 송병준에 의해 설립된 일진회(一進會) 측은 대중의 기반을 가지지 못한 명칭뿐인 일진회의 미약한 세력으로는 자신들의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국행위를 일삼는 일진회측이 이 같은 고민에 빠져있을 당시 진보회가 과거 동학당이란 사실이 만방에 밝혀지자 그들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당시 다른 단체들에 비해 많은 교도들로 구성된 진보회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일진회에서는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지금 정부에서는 갑오동학란 토벌 때와 같이 일본군과 협력해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이니 진보회가 살아남는 길은 오직 일진회와 결탁하는 길밖에 없다고 유혹적인 합동제의를 해왔다. 이에 당시 관군의 탄압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그로서는 일진회와의 결탁을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결국 동학교도들과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 매국행위를 일삼는 일진회와 손을 맞잡고 그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어찌 보면 이용구의 배신행위는 이미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시 그와 함께했던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평이 나있었던 그의 성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용구는 영리하긴 하지만 매사에 경솔하고 용맹 과감한 대담성과 인내심이 많이 부족하여 대단위의 단체를 통솔할 만한 역량이 되지못하였다고 한다.17 이런 그에게 손병희는 친러파를 타도하여 정권을 바로세우고 나아가 정략적으로 일본을 이겨야 할 너무나도 막중한 일을 부하(이용구)에게 일임(一任)하고 자신은 뒷전에서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었으니 애당초 그의 거사는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손병희가 몇 차례에 걸쳐 혁신을 위해 조직명을 개칭하면서까지 추진하고자 했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조선지말에 손병희가 난리를 꾸미지만 실패할 것이라는 상제님의 예견대로 몇 차례에 걸쳐 시도한 손병희의 거의(擧義)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중요한 일을 자신이 몸소 뛰어들어 실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처리하려 한 그의 태도였지 않았을까? 쿠데타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국의 운명을 좌우할 거사를 진행함에 있어 현장에 가 보지도 않은 채 일을 도모하려 하였고, 진보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리인을 내세웠으며 러일전쟁(1904년)이 끝나 신변의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典經』속에 기록된 상제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 손병희가 거사를 실행에 옮김에 있어서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사를 하였기에 성공치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바 있듯이 그는 스스로 죽음을 무릅쓸 각오로 희생정신을 발휘하지는 못한 듯하다. 물론 그의 지략적인 면모만을 보아서는 상제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이 가히 영웅이라 보여지지만 이렇게 손병희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던 듯하다.

 

 

3. 3ㆍ1운동

 

  지도자로서 희생정신이 결여된 손병희의 면모는 그의 생애 마지막 거사인 3ㆍ1운동에서도 계속된다. 3ㆍ1운동이 일어나기 전, 1918년 당시 천도교 일각에서는 이종일(李鍾一)을 중심으로 민중봉기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 봉기의 주된 내용은 천도교가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면 9년 동안의 질곡과 신음 속에 있었던 민중들이 호응할 것이므로 대중시위운동을 펴야 한다는 것이었다.18 하지만 이종일이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노선을 비폭력으로 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1910년대 초부터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조직하여 민중을 봉기,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론을 손병희에게 지속적으로 주장하여왔다.19 이런 그의 의견이 1918년 이후 천도교단의 독립운동계획에 반영되기는 했지만, 그 운동노선이 비폭력으로 급선회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계기가 있다.

  그 계기는 첫째, 손병희 및 대다수 천도교 중진들이 1918년 11월경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板每日新聞)』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의 강화원칙 가운데 ‘민족자결 조항’20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21, 둘째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서‘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력으로써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대해서 그 취지를 건의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의 현상에 맞추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22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손병희가 3ㆍ1 운동을 비폭력으로 추진한 것은 그들이 폭력적 민중시위를 할 경우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그들이 추진한 3ㆍ1운동의 사전계획은 전적으로‘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추진된 것’23이라 할 수 있다.24 이처럼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중진들이 3ㆍ1운동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이에 호응한 상해ㆍ미주ㆍ동경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이 직접적인 요소로 작용했다.25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제창되자 천도교의 중견간부인 권동진ㆍ오세창ㆍ이종일ㆍ최린 등은 그해 12월에 이르러 민족자결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 후 1919년 1월 20일이 되어 그들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저인 상춘원(常春園)을 찾아가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에 관해 상의하고 이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손병희는 이를 허락하였고, 구체적인 사항은 천도교의 중견간부들에게 위임되었다. 이에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여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19년 2월 초순경부터 구체적인 준비 활동에 들어가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기독교도와 불교 측의 동참을 이루어 냈다.26 이처럼 각계 종교인사들의 합동거사계획이 성사되자 그들은 곧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이 날인된 독립선언서의 초고작성을 계획하였는데, 이는 최남선27에 의해 비밀리에 준비되었다. 최남선에 의해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후에 만해 한용운의 검토에 의해 추가 작성된 후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이종일에 의해 인쇄, 전국의 배포담당자에게 전달되어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도시에 일제히 배포되었다.28

 

▲ 3·1운동 때 종로 거리에서의 만세 시위 모습.

 

 

  모든 인쇄물이 배포 된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인산일(因山日:국장)인 3월 1일을 기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여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손병희를 포함한 민족대표들은 거사를 실행하기로 한 오후 2시에 약속을 어기고 처음 계획과는 다른 태화관(泰和館) 요릿집으로 거사장소를 변경했다.29 이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까지도 변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만해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式辭)로 이를 대신하고서는 간단하게 만세삼창을 외친 후 곧 축배를 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 같은 행위를 거사당일 처음부터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후 진행하였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본경찰에게도 단 한 번의 저항 없이 의연하게 연행되기까지 했다.30 거사를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도했던 인물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운동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더욱 더 중요한 사명은 포기해 버린 것이다.31 그들의 이 같은 행위 즉, 3ㆍ1운동 이후 대중운동으로의 확산단계에서 지도력 행사를 포기한 것은 오늘날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32 이 같은 민족대표들의 애매모호한 투쟁에도 불구하고33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 및 일반 민중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높이 고양되어 갔으며, 그 열기는 이윽고 각 지방에까지 파급되었다.34 이로 인해 민족대표들은 반일운동에서 스스로 지도성을 잃어버렸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단재 신채호 또한 3ㆍ1운동은 힘의 중심이 결여된 것이었으므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35 이렇듯 이 운동은 거사를 주도한 천도교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자진 연행으로 인해 실패로 일단락되었다. 물론 3ㆍ1운동이 실패하였다 하더러도 이 운동이 독립운동의 점화점으로 작용하여 대중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전국적인 반일 항쟁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는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손병희가 거사과정에서 운동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사명을 포기한 것은 거사를 계획한 총책임자로서 희생정신이 결여된 것이라 하겠다.36

 

 

Ⅲ. 손병희의 사설

 

  『典經』에 기록된 손병희(孫秉熙) 관련내용 중에는 상제님께서 그의 교설(敎說)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하시고, 장차 그 교설로 인해 야기될 폐해를 염려하시어 손병희의 순회강연을 제지시킨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은 손병희가 호남 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全州)에 머물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 박공우를 시켜 손병희를 경성으로 돌려보내게 하신 일인데37, 과연 상제님께서는 그의 교설 중 어떠한 부분이 그릇되었다고 판단하시고 손병희의 순회를 중지시키신 것일까?

 

 

1. 귀국 후의 활동

 

  1897년 12월 24일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교단을 넘겨받은 손병희는 망명 중이던 일본에서 귀국하기에 앞서 실추된 동학의 오명을 회복하고자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교명(敎命)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인 1906년 1월 그는 일본당국으로부터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은 뒤 귀국하여 곧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2월 16일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 나아가 각 군에도 교구를 설치하는 등 교단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분주하게 활동하였다.38

 

▲ 러일전쟁이 끝난 후 1901년 1월 귀국하여 효창공원에서 찍은 손병희 환국기념사진.

 

 

  특히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 그는 교단을 배반하고 교명을 팔아가며 동학의 지도자인양 행세한 일진회의 앞잡이 이용구와 그와 함께 일진회로 넘어간 두목급 61명을 교단에서 출교시켜 교(敎)와 회(會)를 분리시켰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직접 천도교 교단 총책임자의 직무와 더불어 교도(敎徒)들을 설교(說敎)하는데 주력하며 교세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손병희가 주로 민중들에게 강조한 사상은 종교국가론 즉, 교정쌍전(敎政雙全)이라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교(敎)는 정치화되고 정(政)은 도덕화 될 때 둘이 완전해 진다는 즉, 권력의 도덕화와 도덕의 권력화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손병희는 도(道)를 교정쌍전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도교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운동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운동을 전개한다는 의미를 뚜렷하게 표명했다. 그가 이 같은 사상을 종교적 이상으로 내세운 까닭은 아마도 집권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된다.

  한편 그는 자신이 꿈꾸는 종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을 주체세력으로 하여 사회를 개혁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교도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귀국 후 그는 근대 문명주의자로 변하여 있었는데, 그의 이 같은 면모는 망명지 일본에서 문명개화의 첩경이 언론과 교육의 창달에 있음을 절감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인지 그는 귀국 당시 일본에서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와 일간지 신문인 『만세보(萬歲報)』39를 발간하여 문명개화의 통로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창간한 『만세보』창간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만세보 창간사에서 “나는 민중을 계도하고 우리 민족이 장차 노예의 기반에서 벗어나 희생참독(犧牲慘毒)을 면하게 하기 위해 오로지 국민의 교육을 위해 이 신문을 창간하였다”고 주장했다.40 하지만 『만세보』에는 국민들의 의식계몽이라는 취지 아래 정치에 있어서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민중들의 사상적 전환을 위한 서구의 근대적 국가론을 소개41, 민중들로부터 은근히 새로운 국가형성의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게다가 손병희의 『만세보』 창간의 저변에는 이용구가 천도교인들을 유혹하여 일진회에 가담시키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어찌 보면 귀국 후 그는 과거 자신이 획책한 거사에 자신이 직접 가담치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절체절명의 위기를 뒤늦게 수습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는 만세보가 이용구 등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주로 비난했던 신문이었다는 사실만 눈여겨보더라도 쉽게 납득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1906년 9월 6일자 『만세보』 신문에는 이용구가 진보회를 통째로 친일파 일진회에 넘김으로 인해 빚어진 교단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일진회와 천도교를 분리하는 교정분리[敎政分離,이를 당시에는 교회분석(敎會分析)이라 했다]를 공포하고 앞으로 교인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준수사항을 주요기사로 다루기도 했다.42

  또한 9월 18일자 신문에는, 모든 교인은 일진회에서 탈퇴하여 천도교로 복귀하고 교구장은 교인들의 퇴회여부를 중앙총부로 보고하되 이를 어기면 교구장직은 물론 교인자격까지 박탈시킨다고 강력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미 이때는 그가 천도교를 선포하고 일진회와 천도교를 분리시킨 이후인지라, 한동안 동학의 지도자인양 행세했던 이용구의 친일행각과 나아가 이용구와 손병희 자신의 노선이 같지 않다는 사실이 탄로나 있었던 시기였다. 이 같은 시기에 손병희가 공식적으로 신문에 교인들의 복귀지시를 선포하니 교인들은 일진회를 탈퇴하고 다시 천도교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한편 교인들이 천도교로 속속 복귀하고 있을 당시 교단의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손병희가 교(敎)와 회(會)를 분리시키면서 이용구를 비롯한 61명의 두목급 인사들을 출교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출교당한 두목급 인사들이 교단의 재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재정적인 부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은 교단의 쟁쟁한 두목들이었던 것만큼 교단의 동산(動産)과 부동산(不動産)을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43 이처럼 손병희는 교단의 재정(財政)이 바닥난 상황에서 힘겹게 교단을 재정비해 나갔다. 당시 그의 곤궁함은 집세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집주인으로부터 대문을 봉쇄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44

  한편 이를 기회로 여긴 일진회의 이용구는 또다시 그의 숨통을 죄여왔다. 이용구가 출교당한 61명의 두목들과 함께 천도교우동지(天道敎友同志) 구락부를 조직해 천도교를 가장하며 ‘천도교와 일진회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천도교 교단 자체의 활동을 방해, 공공연히 싸움을 걸어오는 등 그를 계속해서 음해 중상해 온 것이다.

  이에 손병희는 자신의 실수 즉, 일국(一國)의 운명을 좌우할 큰 거사를 자신이 직접 실행치 않고 대리인〔이용구〕을 내세워 안일하게 일을 도모하여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진회라는 기형적인 매국단체를 낳아 이 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을 한탄스러워 했다.45

  하지만 그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 겨를도 없이 이용구 일파의 만행은 더욱더 악랄해졌다. 이용구가 함께 출교당한 61명의 두목들을 거느리고 마침내는 천도교에 항거하기 위해 시천교(侍天敎)46를 세우고 교주가 되어 또 다시 천도교에 응수해 온 것이다. 그는 교도들을 현혹하며 심지어는 교내재정이 바닥난 손병희의 상황을 비꼬아 ‘손병희는 반년 이내에 굶어죽을 것’이라는 악의에 찬 망언을 퍼붓기도 했다.

  한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병희가 천도교의 4대 교조로 지목했던 김연국(金演局)도 대도주직을 버리고 이용구의 시천교로 넘어가 버렸다. 이용구의 유혹에 넘어간 김연국 또한 시천교와 합세하여 그를 중상모략 해왔는데, 이로 인해 장차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 건설의 주체세력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교도(敎徒)들이 시천교로 잇따라 넘어가자 손병희는 예기치 않은 위기를 벗어날 방안을 찾느라 고심에 빠진다.

  당시는 그의 언론기관이었던 『만세보』 신문 또한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사주를 받은 이인직으로 인해 『대한신문(大韓新聞)』47으로 제호(題號)를 바꾸고 친일내각 기관지로 탈바꿈해 있었던 상황이라 시천교의 만행을 빠른 시일 내에 전국의 교인들에게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 손병희의 순회강연

 

  교단의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 일진회와 시천교의 음해중상까지 겹치자 천도교단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손병희는 신앙과 포교에 지장을 초래한 그들의 행위를 더 이상 관망할 수 없다고 여겨 각 지방에 있는 일진회원48들을 인도하여 다시 천도교로 복귀시키고, 두목급 61인의 출교로 인해 바닥난 교내재정을 해결할 차로 당시 전체교인의 7할이 분포되어 있는 ‘황해도와 평안도’49로 권동진 등 자신의 측근을 대동하고 순회강연에 나선다.(1908년 2월 6일)50

 

▲ 충청북도 청원군에 소재한 손병희 생가.

 

 

  이때 강연의 주제로 권동진은 ‘종교의 효력’을 손병희는 ‘종교의 본령’ 즉 ‘종교의 정의’와 ‘국가와 종교’를 주로 강연하였는데, 아마도 그가 강연에서 이 같은 주제를 내세운 것은 이용구와 김연국의 말에 동요된 교인들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함으로 이해된다.

  그는 ‘종교의 본령’을 정의 내림에 있어서는 당시의 학자(學者)들의 학설(學說)을 일체 부정하고 종교는 오직 지(知)ㆍ정(情)ㆍ의(意)의 통일된 인격적(人格的) 숭고(崇古)에 의해서만 종교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어떤 학자들의 이견에 의하여 영치불변(永不變)할 것이 아니고, 종교는 고상한 인격(人格)에 의하여 불연자연(不然自然)으로 화출(化出)된 것을 이름이라 말하고, 천도교가 바로 그러한 종교라고 주장했다.51

  한편 손병희와 같이 순회강연에 나선 권동진은 이때 ‘종교의 효력’에 관해서도 설교(說敎)하였다.52 이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교단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그는 교인들에게 교정쌍전(敎政雙全)의 국가건설은 민중이라는 말과 함께 새로운 민(民)은 천주(天主)를 모신 존엄하고 평등한 인격일 뿐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도덕적 주체라고 하여 앞으로 이러한 세상이 건설되면 천도교인들이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손병희의 종교국가론을 통해 종교의 효력을 주장한 듯하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의 양도를 순회할 당시 어느 날 밤, 그의 처소에 자객이 침입하여 그는 몸에 상처를 입고 신의주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날(1908년 4월 9일) 『대한매일신보』53 에는 손병희와 관련해서 ‘혹세무민함이 어찌그리 용이한지’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의 요지는 당시 손병희의 측근들이 손병희가 문명공기를 받은 사람 즉, 신문명을 받아 사회를 개혁시킬 사람이라 말하며 민심을 동하게 했다는 것이다. 기사에서는 이 내용을 동학농민전쟁에 빗대어 그 당시 나를 따르면 장생불사하고, 칼이 와도 몸이 상하지 않고, 적들의 총기에 물이 난다던 몇몇 괴수들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민중들을 감언이설로 혹하게 하였다고 기록하며 손병희가 지금 또 그러한 방법으로 민중들을 피폐케 하고 있는 듯하다고 그의 강연으로 인한 폐해를 걱정하는 듯했다.

  한편 이 같은 사건이 있은 후 그의 순회강연도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곤궁한 교내재정을 채우기 위한 자금마련과 이용구에게 빼앗긴 교도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한시가 다급했기에 심신(心身)을 다잡고 다시 계획대로 순회강연 길에 오른다.

  그가 황해도와 평안도 순회를 마치고 교도들의 마음을 제고하기 위해 또 다시 강연을 떠난 장소는 인천ㆍ군산ㆍ익산ㆍ전주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주로 강연한 주제는 「國之有敎가 如人之有心」 즉, 나라에 국교(國敎)있는 것이 사람에게 마음있는 것과 같다고 국가와 종교를 주테마로 강연했다.54 이처럼 그는 일진회와 시천교에 빼앗긴 교도들의 마음을 되돌려 곤궁한 교내재정을 해결, 나아가 이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여 교도들과 교정쌍전의 사상에 걸 맞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설교한 이상국가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교도들이 앞장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의식계몽이라는 취지 아래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국교(國敎)가 되어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종교국가론을 주장했다.

  추측컨대 상제님께서도 아마 손병희의 이러한 점을 염려하여 그 불씨가 더 커지기 전에 그의 순회를 중지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상제님께서 그의 순회를 중지시키지 않으셨다면 손병희의 잘못된 강연으로 인한 민중들의 피폐는 더욱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교도들을 앞세워 자신의 종교국가론을 실현하기 위해 의식계몽이라는 명분으로 교도들을 혹하게 하여 그들을 주체세력으로 내세워 또다시 혁명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동학농민전쟁으로 죽어간 동학도를 비롯해 진보회 등 동학의 잔여세력들의 처절한 죽음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손병희는 그들에게 또 한 번 재민혁세(災民革世)를 꿈꾸게 한 것이다.

  이 당시 민중들에 대한 상제님의 마음을 『典經』 ‘행록 3장 14절55과 15절56’을 토대로 살펴보면 상제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57 위의 두 구절은 진보회가 점차 동학임이 밝혀지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동학농민전쟁 이래로 정부는 동학군이라면 무자비하게 씨를 말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진보회원들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와 ‘그대들이 이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어날 줄 모르니’라고 말씀하시고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겨우 살아난 민초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반면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에 박절58하게도 자신이 꿈꾸는 종교국가론을 실현하기 위해 힘없는 민중들을 앞세우려 했다. 아마도 상제님께서는 손병희가 몇 번에 걸쳐 실패한 혁명을 또다시 꿈꾸어 불쌍한 민초들을 잘못된 길로 몰아가는 상황을 염려하시어 그 폐해가 더 커지기 전에 그의 순회를 중지시킨 것이라 사려된다.

 

 

3. 종교국가론

 

  종교국가론을 실현하기 위한 손병희의 마음은 3ㆍ1운동 이후 진행된 일제의 심문조서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운동의 전개방식에 있어서는 폭력적이던 기존의 거사방식에서 비폭력이라는 방식으로 선회하였지만, 이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고종황제의 독시(毒弑)설’을 기회로 삼은 기회주의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만약 그가 비폭력이 아닌 무장독립투쟁으로 3ㆍ1운동을 진행하였다면 3ㆍ1운동 당시 서양으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하지 못한다는 가정 또한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59

  한편 3ㆍ1운동 이후, 그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심문을 받으며 “나의 뇌리에는 국가라는 관념은 없다.”,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하여지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라고 말하며, 국가의 실체인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민족보다 종교를 상위개념에 두고 우선시하였다. 이는 종교우선주의라 할 수 있다.60 물론 손병희의 독립운동이 민족독립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획책한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저에는 당시 세계의 동향에 조선의 상황을 비추어 이를 기회로 삼아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주관하여 민중들로부터 인망을 얻고, 향후 이를 기회로 어떠한 집권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61 이 같은 그의 마음은 아래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사려된다. 아래의 내용은 천도교 원로인 조기주 종법사가 1985년 4월 5일 천일기념일에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내가 손병희성사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3ㆍ1운동 직후 무슨 민간정부를 만들었다고 들었죠. 그게 무엇이냐고 하니깐 쉬쉬하면서 그것이 뒷날 바로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곧장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기구라고 들었죠. 그게 바로 대한민간정부의 출시가 아닐까 해요.’62

  위 증언에 따르면 손병희는 3ㆍ1운동 이후 민간정부의 출현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데 문제는 그가 이 민간정부에서 자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서고, 자신의 측근인 오세창을 부통령에 두었다는 것이다.63 이 내용을 몇몇 단행본64에서는 천도교 중진인 묵암 이종일이 1919년 4월 1일을 기해 비밀리에 결의하였다고 하지만 앞서 살펴본 조기주 종법사의 증언에 따르면 손병희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Ⅳ. 맺음말

 

  앞서 살펴보았듯이 손병희는 다무라와의 합동거사와 갑진개화혁신운동, 나아가 3ㆍ1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획책한 모든 거사에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도들을 설교함에 있어서 세상이 혼란한 모든 잘못은 사람에게 있기에 일차적으로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교도들에게 종교와 국가를 빙자한 근대국가론과 교정쌍전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 효력, 그리고 천도교가 국교가 되어야만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나라에 국교 있는 것이 사람에게 마음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게다가 그는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동학농민전쟁으로 죽어간 동학도를 비롯해 진보회 등 동학의 잔여세력들의 처절한 죽음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그들을 주체세력으로 내세워 또 한 번 혁명을 꿈꾸게 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위와 같은 취지 아래 일진회와 시천교에 빼앗긴 교도들의 마음을 되돌려 쇠약해진 천도교의 교세를 확장, 나아가 많은 교도들을 앞세워 자신의 종교국가론에 걸 맞는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마음은 3ㆍ1운동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손병희는 종교국가론을 바탕으로 한 국가체제를 구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국가보다 종교를 상위개념에 두고 우선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획책한 거사들에서 나라의 안위와 독립을 위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종교를 통한 집권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01 상제께서 “조선지말에 이란(吏亂)이 있으리라 하는데 그러하오리까”고 묻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손 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예시 60절)

02 천도교 손 병희(孫秉熙)가 호남 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에 내려와서 머물었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네가 전주에 가서 손 병희를 돌려보내고 오라.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고 분부를 내리셨도다. 이에 그가 복명하였으되 이튿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겼느니라. 며칠 후에 손 병희는 예정한 순회를 중지하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도다.(권지 1장 33절)

03 충청도 지방의 동학 교단 조직.

04 전라도 지방의 동학 교단 조직.

05 조선 고종 32년(1895) 11월, 상투 풍속을 없애고 머리를 짧게 깎도록 한 명령.

06 아관파천(俄館播遷).

07 1898년 12월과 1899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서 봉기한 무장농민조직. 영학당은 동학당(東學黨)의 잔여 세력들이 1898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 대신 ‘영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재건한 조직이다.(『브리테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9~2004.)

08 1900년 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 활빈당에는 동학혁명군과 화적(火賊) 출신들이 많이 가담해 있었다. 출신지는 일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모인 혼합부대였다. 또한, 활동 범위도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각지를 기동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게릴라부대였다.(『브리테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9~2004.)

09 『天道敎會月報』, 1922년 6ㆍ7월호, p.11.「聖師一代記」에 ‘참모총장 다무라(田村怡與助)’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여, 일본 측 군사관련 자료를 검토해 본 결과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위치에 있었던 다무라란 참모차장 田村怡與造(たむらいよぞう)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陸軍主要ポスト遷表」, 1890年~1945年 참고. / 최기영, 「韓末 東學 天道敎로의 개편에 관한 검토」, p.101 참고.

10 天道敎中央宗理院, 『天道敎創建史』, 1933, p.33~34. / 손병흠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는 이도 있다. ‘손병흠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본국에 이르러 여러 두목과 상의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8월 3일에 부산과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 구축함과 러시아 순양함이 충돌한 파편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다.’(李光淳, 『偉大한 韓國人 5 義菴孫秉熙』, 太極出版社, 1979, p.161.)

11 天道敎中央宗理院, 『天道敎創建史』, 1933, pp.33~34 참고. / 당시 육군 참모차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다무라(たむらいよぞう)의 사망경위와 사망시기, 그리고 당시 그의 계급에 관련된 문제는 천도교 측 자료와 일본 측의 자료가 서로 상반(相反)된다. 먼저 당시(1903~1904) 다무라의 계급을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천도교 자료에 의하면 그는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계급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일본 군사기록이나 일본에서 발행된 대부분의 인명사전에 의거하면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은 오가오 마타지였고, 다무라는 그의 수하로서 참모차장의 계급이었는데, 사망 후에 육군중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다무라의 사망경위와 사망시기에 대해서도 천도교에서는 다무라가 1903년 8월 5일에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나,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다무라는 1903년(메이지36년) 10월 1일에 과로, 또는 파상풍에 의한 심장앙진증에 의해 일본 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新撰大人名辭典』4, 平凡社, 1937, p.219. / 『新聞集成明治編年史』,12, 財政經濟學會, 1936, p.114. / http://ja.wikipedia.org 田村怡與造./相邦衛 『日露陰の主役田村怡造』, 山梨ふるさと文庫. / 篠原昌人, 『知謀の人田村怡造』, 光人社 / http://www007.upp.so-net.ne.jp 田村怡與造. / 軍人デ一タベ一ス 『サクラタロウ DB (Purunus DB)』 田村怡與造. / http://imperialarmy.hp.infoseek.co.jp 田村怡與造.]

12 위 각주 7과 9의 내용에 의거하여 1903년 손병희가 다무라의 세력 즉, 일본의 군사세력에 기대어 계획한 쿠데타(조선정부정복계획)의 진위여부를 살펴보면 일본 측의 자료가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 측과 천도교 측의 기록에 나타난 다무라의 사망시기가 약 두 달 정도의 차이가 나는 점을 감안 할때 만약 일본 측의 자료가 정확한 것이라면, 사실상 천도교 측에서 주장하는 다무라와 합동거사를 계획하여 조선의 친러파정부를 타도하고자 한 손병희의 정부정복계획은 실상 일본군과는 무관하게 손병희와 망명객들이 국내의 동학세력을 전제로 하여 계획한 논의에 불과했던 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측에서 장차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두려했던 조선을 그것도 일개 망명객의 말에 일본의 군사가 합동거사를 도모하다 갑자기 사망했다는 기록은 일본당국에서 수치로 여겨 관련기록을 삭제하고 사망시기를 조작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또한 손병희가 실제로 정부전복계획을 실행하였다 하더라도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친러파 정권을 타도하여 동학을 국교로 지정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된다.

13 李光淳, 『義菴 孫秉熙』, 太極出版社, 1979, pp.163~169 참고. / 義菴孫秉熙先生紀念事業會, 『義菴孫秉熙先生傳記』, 1967, 183~188 참고. / 『근대 인물한국사 손병희』, 동아일보사, 1995, pp.70~71 참고. / 『皇城新聞』 1903년 7월 29일 참고.

14 泰仁 郡守 孫秉浩氏가 東匪巨魁 李利老 爲名漢 捕捉하여 所謂 錄名冊子를 取得 하였는데, 從黨이 數千名이더라. (『황성신문』, 1904년 6월 2일.) 이 기록은 당시 민회에 가입된 회원의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5 손병희가 일으킨 이 개혁에 관해서는 사전류에서도 내용이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는 부분도 있다. 1904년 동학교도를 주축으로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던 대중문화혁신운동.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 동학교단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합동하여 1904년 8월부터 1906년 9월까지 추진한 근대화 개혁운동. (『브리테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9~2004.) / 광무 8년(1904)에 동학 신도들이 주축이 된 진보회가 전국적으로 추진한 대중문화 혁신운동. (『네이버국어사전』)

16 당시 진보회의 전국 회원 수는 117,735명이었다. 회원들 중에는 역원이 무려 881명으로 벼슬아치로 관리를 지낸 자가 20명, 진사(進士)가 4명, 사인(士人)이 403명, 농민이 316명, 상인이 138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회원 60%는 평안도에 분포되어 있어 당시의 교세확장이 서북지방에 편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新人間』, 2005년 1월호, pp.101~102.)

17 『新人間』 379호, 신인간사, 1980, pp.22~25 참고.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7』, 탐구당문화사, 2000, p.308.

19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묵암이종일선생비망록」3) / 한국사상연구회, 『한국사상 18』, 1981.

20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21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市川正明編, 「권동진 경찰신문조서」) / 『3ㆍ1獨立運動』1, 「朝鮮獨立運動」 별권, 1984, p.46(「이승훈 지방법원 예심신문조서」), p.288.

22 『3ㆍ1독립운동』1, p.12(「최린검사신문조서」), p.202(「손병희 고등법원예심조서」).

23 손병희를 비롯한 최린ㆍ권동진ㆍ오세창 등은 당초 윌슨의 민족자결을 ‘자치’로 이해, 자치운동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 일을 계획하면서 설사 독립이 안 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치’나 ‘총독정치의 개선’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 일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0. / 『3ㆍ1독립운동』 2, p.48(「손병희 고등법원예심조서」), p.228(「권동진 지방법원예심조서」), p.241(「오세창 지방법원예심조서」)].

24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p.97, p.100~101 참고. / 1919년 5월 8일 京城地方法院 「한용운심문조서기록」에 의하면 당시 만해 한용운은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면 일본은 반드시 이를 승인하여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이 같은 확신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호응한 해외의 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 한국민족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오면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노심초사 고대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은 암흑 속에서 헤매던 우리민족에게 갈 길을 제시하여 주는 이정표가 된 것이다.(大韓民國功勳史發刊委員會, 『大韓民國功勳史』1, 1986, p.146.)

25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97 참고.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2, pp.295~296 참고.

2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7』, 탐구당문화사, 2000, p.320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6』, 탐구당문화사, 2000, pp.207~208 참고.

27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어 친일 활동을 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2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6』, 탐구당문화사, 2000, pp.207~208 참고.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참고. / 大韓民國功勳史發刊委員會, 『大韓民國功勳史』1, 1986, p.150 참고.

29 이 부분에 관해 몇몇 사전류와 단행본에서는 ‘폭동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거사장소를 변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8집에 기록된 1919년 8월 21일 고등법원의 「손병희심문조서기록」을 참고하면, 그는 스스로 ‘지금 지방법원의 예심결정서를 보면 우리들이 선언서를 발표하기 때문에 각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써 있으나,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기치 않았다.’ 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폭동의 우려 때문에 거사장소를 변경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게다가 손병희는 이 날 심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을 ‘지식정도가 앝은 사람들이 오해해서, 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할까봐서 주의를 하고 있었다’ 고 밝히고 있다.

3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1995, p.379 참고.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참고. /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서해문집, 2004, pp.307~308 참고. / 韓國宗敎協議會, 『韓國社會와 宗敎』, 1989, p.93 참고.

31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서해문집, 2004, pp.307~308.

32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p.238. / 한국사연구회, 『韓國史硏究入門』 2판, 1987.

33 민족대표들의 애매모호한 투쟁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엄격한 비판이 있어왔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姜德相, 「3ㆍ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と朝鮮人民」, 『思想』537, 東京, 岩波書店, 1969년 3월호./ 康成銀, 「3ㆍ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の活動に關する一考察」, 『朝鮮學報』130.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6』, 탐구당문화사, 2000, pp.208~209.

35 이우성, 『韓國의 歷史認識』, 창비, 1976, PP.444~445.

36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래과 같이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민중을 생각이 천박한 존재로 불신하여 민중의 주체적 역량에 의거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의식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3월 1일 당일에도 독립선언식 거행장소를 민중들이 운집한 파고다공원에서 일방적으로 명월관 종로분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여, 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투쟁적인 역량을 결집시켜 운동의 목적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그들은 3ㆍ1운동이 진행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민중들과 유리될 수 밖에 없었고, 운동을 끝까지 지도하지 못하였다. 민족대표들은 이러한 대외의존적이고 무저항주의적인 이념과 자세 때문에 3월 1일의 독립선언과 시위를 계획하고 운동을 촉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평가에 있어서 많은 비판의 여지를 갖고 있다.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102.)

37 권지 1장 33절 참고.

38 1906년(광무 10) 『황성신문』 3월 16일자 기사에 의하면 당시 천도교에서는 각 지방에 대교구(大敎區)를 설치하였는데 교구는 교인 10만 명 이상으로 정하며 교구수(敎區數)는 72, 구장(區長)의 성명은 如在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교구는 교인 10만 명 이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대교구가 모두 72개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도교인이 칠백만 명 이상이나 된다는 계산이다. 좀 과장된 통계라고 볼 수 있으나 천도교의 교세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종교협의회, 『韓國社會와 宗敎』, 신명출판사, 1989, p.106.)

39 1906년(광무 10) 6월 17일 손병희의 발의로 천도교에서 창간한 일간신문.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에 이인직(李人稙)의 진용으로 발족하였는데,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난과 일진회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40 『만세보』, 1906년 6월 17일 참고.

41 『만세보』, 1906년 9월 19일 참고.

42 1. 교인이 일진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그 성명과 함께 사유를 중앙총부에 통지할 것.

2. 교직을 갖고 일진회에 입회한 자는 그 교무의 겸직을 불허함.

3. 이미 민회에 들어간 자는 비록 다수 연비(聯臂)의 천주(薦主)라도 개인의 교인 자격만 가짐.

4. 교인으로서 일진회에 들어가 교단의 규칙을 위배하는 자는 교헌에 따라 처리함.

43 『신인간』 379호, p.27 참고.

44 『신인간』 379호, p.28 참고.

45 ‘자기 개인의 창도아래 그리고 자기 독단의 책임 밑에 추진되었던 이번 갑진대혁명이 이처럼 수포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국권의 약화까지 초래하게 됨을 본 선생의 흉중에 참을 수 없는 자괴와 분노와 초조함이 일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孫秉熙先生記念事業會, 『義菴孫秉熙先生傳記』, 1967, p.217.) / ‘갑진개화운동은 선생께서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도제(徒弟)들에게 지휘 명령하여 진행한 운동이었으므로, 나중에 이용구 등이 배신하여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진회라는 기형적인 매국단체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나라사랑 제 7집」, 의암 손병희 선생 특집호, 외솔회, 1972, p.49.) / ‘의암도 일본에서 때때로 이용구의 보고를 받으면서 의심이 없지도 않던 차에 두목들의 자세한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때는 이미 지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로 남게 되었다. 실로 그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한 것이 이용구의 배신으로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된 것이다.’(李光淳, 『義菴 孫秉熙』, 太極出版社, p.181.) / ‘의암은 자신의 실수로 이런 무서운 결과가 나타난 것이 한없이 원통하고 수운ㆍ해월 두 선사께 여간 죄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李光淳, 『義菴 孫秉熙』, 太極出版社, p.185.)

46 이용구가 손병희의 천도교 계열에서 이탈하여 창립한 동학의 한 종파.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47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던 친일신문. 천도교의 기관신문 『만세보(萬歲報)』의 시설을 인수하여 1907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는데, 9월 7일부터는 한글판을 따로 발행하였다. 사장은 『만세보』 주필이었던 이인직(李人稙) 이었고, 일진회의 기관지였던 『국민신보(國民新報)』와 나란히 친일선전을 일삼아 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는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국권피탈(國權被奪) 이후인 1910년 8월 30일 『한양신문(漢陽新聞)』으로 개제하였으나, 9월 1일로 폐간하였고 독자는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인수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48 이때 일진회라 하면 시천교도와 일진회들도 모두 포함한 것. 당시 이용구가 일진회장도 역임하고 있었음.

49 그가 권동진 등 그의 측근을 대동하고 순회강연 하였던 황해도와 평안도의 구체적인 지명은 서흥·영변·박천·가산·곽산·선천·철산이다.

50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2월 6일 참고. / 천도교중앙총부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 약사』, 2006, pp,136~137 참고.

51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인문화사, 1970, p.69. /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p.319 참고.

52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p.265 참고.

53 1904∼1910년 사이에 발행되던 일간지.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E. 베델[裵說(배설)]과 함께 창간했으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베델이 사장을, 양기탁은 총무를 담당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이 한국의 언론에 대해 철저한 검열과 직접 탄압을 가했는데,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 명의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 검열할 수 없었다. 주필 박은식(朴殷植)을 비롯하여 신채호(申采浩)·장도빈·안창호(安昌浩) 등 집필진은 자유롭게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정책을 비판하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논문, 고종의 친서를 싣는 등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하여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시켰다. 일본은 베델을 추방하려 여러 번 시도하였고, 결국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와 논설을 근거로 베델과 양기탁을 고소해, 베델은 3주간 금고형을 받고 양기탁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 뒤 1908년 발행인이 베델의 비서인 A. 만함으로 바뀌었고, 1910년 8월 28일 1461호로 총독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처음에는 순한글판 신문을 발행하였으나 곧 국한문 혼용으로 바꾸었고, 1907년부터는 국한문 혼용판과 한글판을 따로 발간하였다. 1905년부터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도 발행하였다. 1개월 구독료는 당시 30전이었으며, 발행부수가 3종류를 합쳐 1만부가 넘는 큰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폐간 전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킨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54 이현희, 『근대인물 한국사 304 손병희』, 동아일보사, 1995, p.88 참고. / 서울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 참고. / 李光淳, 『義菴 孫秉熙』, 태극출판사, 1979, p.203 참고.

55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七월에 있었도다. 최 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군 각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행록 3장 14절)

56 이후에도 얼마간 상제께서 그 주막에 머무르셨도다. 밤마다 부내의 순검들이 순회하면서 사람들을 조사하여 일진회원을 색출하는지라. 상제께서 일진회원에게 “그대들이 이 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 무슨 일을 하느뇨.……”(행록 3장 15절)

57 이 두 구절에 기록된 일진회가 진보회를 뜻하는 것임은 이미 연구된 바 있다. 『상생의 길』 2호, 「일진회에 대하여」, 대순진리회 교무부.

58 인정이 없고 야박함을 뜻함.

59 손병희 등 천도교 상층부에서는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였다.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 참고.)

60 한국사연구회, 『韓國史의 國際環境과 民族文化』, 2003, p.169 참고.

61 천도교계의 일부 인사들이 의암을 정점으로 하여 은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홍보하여 의암은 50만 한국교포사회에서 거의 영웅화되다시피 하였다. 나아가 의암의 명성은 국외 한인사회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회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의암이 뒷날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결론인 것이다. 〔『동학학보』 제10권 1호(통권 11호), p.268 참고.〕

62 이현희, 『3ㆍ1혁명 그 진실을 말한다』, 신인간사, p.311.

63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Ⅰ』, 집문당, 1983, pp.54~56 참고. / 『묵암비망록』, 1925년 1월 10일.

64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Ⅰ』, 집문당, 1983, pp.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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