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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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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가야리(伽倻里)의 어원을 찾아서

가야리(伽倻里)의 어원을 찾아서
 
 
연구원 조광희
 
 
  2013년 9월 23일은 여주(驪州)가 군에서 시로 승격한 날이다. 승격되기 전 여주의 행정구역은 1읍 9개 면이었으나 현재는 1읍 3개 동 8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이중에서 여주본부도장은 여주시 8개 면 중 강천면 가야리에 있다. 여주의 행정구역도를 보면 강천면은 면의 최북단이 양평군 양동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동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시, 남쪽으로는 여주군 점동면과 서쪽으로 오학, 중앙, 여흥 3개 동 그리고 북내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강천면은 여주군의 최동남단이자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을 이룬 곳이다. 강천(康川)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물을 많이 접하고 있는 고장이다. 예부터 섬강(蟾江)과 남한강이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래서 많은 배들이 이곳을 오갔고 ‘모든 배가 편안하게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 강천(康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천면은 본래 강원도 원주군 관할 구역이었다. 마감, 걸촌, 기은, 가야, 적금, 굴암, 강천, 대둔, 탑전, 전거론, 원심, 도성, 간매, 가정, 이호의 15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여주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가정리를 북내면에 넘겨주는 동시에 원주군 부론면의 칠리 일부를 병합하여 걸은, 이호, 가야, 적금, 굴암, 강천, 대둔, 부평, 도전, 간매의 10개 리로 개편 관할하게 되었다가 95년 3월 1일자로 대둔리가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으로 편입되어 9개 리가 되었다.
  여주본부도장은 9개리 중 가야리와 이호리의 경계지역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대에서 신축회관까지가 가야리이고 주차장 A동·B동, 대운동장은 이호리에 속한다. 도로명을 중심으로 보면 도장은 가야리에서 북쪽 이호리 방면으로 나있는 강천로와 마감로 사이에 위치한다. 영대가 도장 남쪽 방향 가야리 지역에 있고 구주소지에도 강천면 가야리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여주본부도장은 가야리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야리라는 지명을 볼 때 대개 고대 삼국 중 하나인 가야와 해인사가 있는 합천의 가야산을 생각할 것이다. 가야와 가야산은 한반도 남부의 경상남도에 속해 있고 가야라는 지명 역시 낙동강 일대와 남부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왜 경기도 지역인 여주에 가야라는 지명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가야리의 지명유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여주군사』의 지명유래 편을 보게 되면 “가야리는 본래 강원도 원주군 강천면의 지역으로서 남한강가가 되므로 개골, 갯골 또는 개곡, 가야동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개골, 갯골은 ‘물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말은 순수 우리말 가람[江]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가람은 강을 뜻하는 우리말인데 이것이 가락이 되고 가야가 되었다. 실제로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 하나인 가야는 강이나 호수, 바다를 기반으로 형성된 국가01이며 전국 강가의 주변에 갯골, 개골, 가야라는 지명이 분포하고 있다. 가야리가 여강 주변에 형성되어 있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가야리 서쪽 여주읍 방향에 ‘부라우 나루’ 와‘신진나루’라는 옛 지명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가야리의 지명이 강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주군사』에는 이외에도 가야리의 지명유래에 대한 다른 기록이 존재한다. 그것은 합천 이씨 이효성(李孝誠, 1379~1457)02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설이다. 이효성이 춘천도호부사를 그만두고 한양까지 수로로 상경할 때 섬강을 지나 여강의 중류 여주지역에 이르러 주변 경치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여강과 어우러진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경치에 신성함을 느꼈고 불현듯 자신의 고향인 합천 가야산에 최치원이 생을 마치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각나 가야동(伽倻洞)이라 이름 짓고 정착했다는 이야기다. 이 설에 따르면 여주 가야리의 지명은 결과적으로 합천 가야산의 지명이 경기도 여주에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야산의 지명 유래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 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즉, 가야산의 이름은 고대 가야국의 국명(國名)에 관한 기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야(伽倻)의 기원은 알기가 어렵다. 확증된 정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몇 가지 유력한 학설이 있어 소개한다. 먼저 가야 국명(國名)에 관한 기원은 순수 우리말 거무 또는 검[神]03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그 의미는 신(神) 또는 거북04으로 풀이한다. 가야는 불교가 전파되기 전 거북을 신의 대리자로 보았으며 따라서 거북을 토템으로 숭배했다.
 
 

  거북신앙에 대한 근거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노래한 ‘구지가(龜旨歌)’05에서 찾을 수 있다. 구지가는 제왕의 출현과 관련한 주술적 제의에서 불려졌다. 구지가에서 거북은 신성한 군주의 출현을 촉구하는 백성의 뜻을 신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자였다. 즉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龜何龜何 首其現也), 안 내놓으면 구워먹으리(若不現也 燔灼而喫也).”06의 노래 문맥에서 거북은 왕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초자연적인 신성한 존재에게 인간의 뜻을 전하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따라서 거북은 신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으며 거북의 옛 발음인 ‘거무’와 ‘검’을 한자로 표기할 때 신(神)자를 쓴 것이다.
  거무(검)는 후에 발음과 형태가 거북과 비슷한 가마솥에서 음을 빌려 ‘가마’로 불려 지다가 다시‘감라(가마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완곡법 내지는 에두름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에두름법이란 우리 조상은 흔히 돌아가신 선조와 스승 그리고 신성시하는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을 불경하게 생각했고 그와 비슷한 대응물을 차용하여 부른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의미로는 청동기 문화에 머물렀던 토착민을 철기문화를 가진 북방민족이 내려와 다스리면서 농경문화가 정착된 것을 상징한다.07 감라는 후에 이두식 한자표기인 가락(駕洛)이 되고 다시 음운변천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가야에 이른다. 따라서 이 설에 따르면 가야의 의미는‘거북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쇠를 다스리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다른 견해로는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가야라는 이름이 전래했다는 설이 있다.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로 소를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가야산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梵語)에서‘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은 가야는 가나(駕那)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는 가야 사람들이 끝이 뾰족한 고깔을 쓰고 다닌 데서 유래한 말이고, 이를 중국인들이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으로 쓴 것은 그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뒤에 한치윤 등 많은 실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다.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최남선은 가야라는 말의 어원은 한국어의 ‘겨레[族]’와 ‘갈래[支派]’에 있으며, 만주어의 ‘교로[宗族]’, ‘할라[姓, 一族]’, 몽고어의 ‘갈라[部落]’, 핀란드-위구르어의‘굴라[村]’, 사모예드어의‘가라[村]’등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들이라고 하였다. 뒤에 일본의 언어학자인 오노는 ‘가라(加羅)’가 ‘일족(一族)’의 뜻으로서, 만주어·퉁구스어·터키어에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언어학자인 최학근은 ‘가야’가 ‘겨레[姓, 一族]’라는 말의 기원이고, 그 근원은 알타이 제어(諸語)의 ‘Xala(姓, 一族)’에 있으며, 그것이 Kala(가라)> Kaya(가야)> Kya+e> Kyore(겨레)로 음운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여주군사』의 가야리에 대한 지명유래 기록과 가야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지 학설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야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우나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종합해 보면‘가야리’의 명칭은 지리적인 요소의 강, 거북의 토템신앙, 고대 우리말의 음운변천 과정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함축한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김태식, 『우리말어원사전』, 태학사, 1997.
안옥규, 『어원사전』,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6.
양성모, 『한국문화 상징사전Ⅰ』, 두산동아, 1992.
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제1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여주군사 편찬위원회, 『驪州郡史제1권 ~ 7권』, 경기도인쇄정보산업 협동조합, 2005.
홍기범, 『한국지명유래집-중부편- 』 (수원: 국토지리정부원 2008)
김태식, 『미완의문명 7백년 가야사 』 (서울: 푸른역사 2002)
이은식, 『지명이품은한국사』 (서울: 타오름 2010)
정호완, 「가야(伽倻)의 지명 연구 」, 한국어문학교육학회, 1998.
국립 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main.jsp
네이버 어학사전, 지식대백과 사전 http://dic.naver.com/
여주군사 홈페이지 http://history.yj21.net/
 

01 안재홍은 가야 제국은 낙동강가에 있었으므로 ‘가람[江]’이라는 말에 국명의 기원을 두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뒤에 양주동은 가야제국이 여러 갈래로 나뉜 낙동강 지류에 인접해 있으므로, 금관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 등의 6가야 명칭에서 가야는 ‘강(江)’ 또는 ‘가=갈래[分岐]’의 뜻을 가진다고 하였다. 풀이하면 ‘강가나 그 주변에 갈라져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02 조선 세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계순(繼舜), 호는 붕암(朋岩)이고, 서운관판결사(書雲觀判決事) 이사강(李斯江)의 아들이다. 1402년(태종 2) 문과급제 후 교리와 수찬을 거쳐 춘천도호부사를 지냈다.
03 검은 신(神)을 뜻하는 고대 우리말이다. 거북이를 거무 또는 검이라 부르고 한자로 표기할 때 神을 쓴 것으로 보아 거북을 신처럼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04 현재 거북이란 말의 형태는 거무(검)-거뭄-거붑-거북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05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조에서는 “구지(龜旨) 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거북이(十朋之龜)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라고 세주를 붙여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십붕상지상(十朋伏之狀)’은 『주역(周易)』65 손괘(損卦)에 언급되는 거북이를 지칭하는 ‘십붕지구(十朋之龜)’의 약칭으로 구지는 곧 거북이의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06 구지가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에 등장한다.
07 김수로왕(金首露王)은 가야건국의 시조이다. 김은 쇠[金]를 의미하며 이는 철기 문화를 가진 북방민족이 지배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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