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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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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나의 모든 것

나의 모든 것
 
 

사천방면 선무 서현규

 
 
 
  2003년 3월 5일. 이날은 내가 대순진리회에 입도한 날이다. 그 당시 나는 어디에도 쓰일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불편했었다. 그래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도를 했다. 그리곤 바로 ‘여주본부도장 수호’라는 목적으로 여주에 올라왔다. 수호의 목적 외에도 어디엔가 1년간 머물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머니와는 1년 후에 다시 만날 약속도 했다. 처음 도장에 와서, 어디에도 쓸모없고 필요 없을 줄로만 알았던 내가 어딘가에 쓰임이 된다는 자체 만으로도 참으로 좋았다.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것을 받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만 견디자. 1년 후에 다시 어머니랑 만날 것이다.’라는 생각에 힘들었지만 견디고 또 견뎠다.
  식당에서는 밥을 남기지 말라고 했다. 순간, 어렸을 적 할머니께 많이 들었던 ‘밥 남기지 마라. 복 나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치 할머니께서 옆에서 지켜 보고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훈회를 공부하면서 ‘거짓말 하지 마라.’고 하셨던 어머니 말씀도 떠올랐다. 어머니께서도 항상 내 주위에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거짓말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신다.
  주문을 외우고 기도, 치성, 수강을 들어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가다가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다치고를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넘어지지 않게 되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모든 것을 걸고 제대로 한 번 도를 닦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대순진리회에 입도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대순진리회의 덕을 많이 봤다. 그 덕에 내 몸이 이렇게 좋아졌고 가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다. 열 살 때 나는 교통사고가 나서 몸에 심한 장애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걷는 것이 좀 많이 불편했고 다리뿐 만 아니라 내 몸 전체가 부자연스러웠다. 마음먹은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거친 말을 하고 자주 신경질을 부렸다. 친구들과 친해지려는 방법이었는데…. 표현이 좀 거칠었는지 친구들과 다툼이 자주 일어나고 그때마다 약자인 나는 항상 피해자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도 좋았다. 항상 따돌림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좋았다. 그러한 행동이 습관이 되어서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말을 더욱 심하게 했고 결국 중1 때 친구에게 맞아서 코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좋지 않은 말을 했으니 좋지 않은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극단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 ‘고등학교 때까지만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학창시절을 하루하루 이어 나갔다. 그런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어느 날 중3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인생의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만한 말씀을 해주셨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었다. 한 번 듣고 나니 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어딜 가나 떠올랐다. 나의 이런 상황은 모두 내가 만들었기에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의 그 말씀은 나에게 ‘딱’이었다. 그래서 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윽고 나는 힘은 들지만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때처럼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좌우명을 떠올리면서 견뎌 나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어갔다. 여전히 힘은 들었지만 나름 즐길 만했다. 그러다 보니 좌우명 역시 조금씩 바뀌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즐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이다. 동시에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살아보고 싶다.’는 삶에 대한 희망적인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능을 볼 시기가 왔다. 하지만 성적이 바닥이라 대학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현규야 니가 어디가 못나서 그러노? 대학을 나와야 사회에서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을 것 아이가? 전문대학이라도 가라.”고 하시며 나를 전문대학에 넣어 주셨다. 나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대학을 갔다.
  영상미디어학과였다. 일명 사진학과라고 불린다. 어머니는 친구분께 부탁해 중고 카메라까지 구입해 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대학 생활. 대학은 내 생각과 달랐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왠지 모르게 구속된 듯한 느낌이었다면 대학은 그 구속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대학생활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쯤 남을 돕고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래서 경주시 장애인 종합 복지관에 봉사활동도 갔었다. 또 ‘따뜻한 세상 만들기’(따세) 다음카페에도 가입해서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데도 내 힘을 보탰다. 나도 장애인이지만 나보다 더 심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먹었던 마음이 상생의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들과 술도 마시며 자유를 만끽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닫혔던 나의 길이 대학 들어와서 서서히 보이는 듯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가끔 시간 나는 대로 복지관에 가서 봉사하고, 또 한 달에 한 번씩 따세 모임에도 참석해서 남을 돕는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활에 문제가 생겼다. 바로 돈이었다. 고등학교까지는 잘 마칠 수 있었으나 대학교는 힘들었다. 대학 등록금과 내가 한 번 사진을 찍을 때마다 드는 필름 값 등등 드는 돈이 어머니께서 하시는 가게의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학자금 대출을 받으셨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버텨내다가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끝내 우리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마지못해 나는 친척 집에 의지하기로 했다. 삼촌이 계신 고향 집에도 있어 보고, 외가에도 있어 보았지만 결국에는 나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부산에 갔을 때 우연히 대순진리회를 알았고 입도까지 했다. 석회 시간에 홍선감께 ‘우리 도는 가랑비에 속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렇게 우리 몸에 온다.’는 말씀을 들었다. 처음에는 실감이 잘 안 갔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두 달 쯤 되니 선감께서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알게 된 대순진리회는 ‘밥 남기지 마라.’는 할머니 말씀과 ‘거짓말하지 마라.’는 어머니 말씀을 실행에 옮기는 곳이다. 또 최종목적인 도통을 향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자세로 수도하는 단체이다. 요즘에 와서 ‘어릴 때부터 나는 도통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감히 해보곤 한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꿈을 이루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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