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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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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한마디 : 노마지지(老馬之智)

노마지지(老馬之智)

 

        

           

  관중의 성(聖)과 습붕의 지(智)로도 모르는 곳에 이르면 그 지혜가 노마나 개미도 스승으로 삼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지금 사람은 그 어리석은 마음에도 성인의 지(智)를 스승으로 삼는 것을 모른다.

 

 

  기원전 770년, 주(周)나라 왕조가 동쪽 낙양으로 옮겨간 이후, 그 통제력은 쇠해지고 제후는 각기 서로 다투었다.

  이때부터 진시황(秦始皇)이 열국(列國)을 병합ㆍ통일할 때까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는바, 춘추시대란 명칭은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역사기록을 기본으로 해서 편찬했다는 <춘추>에서 유래한 것이고, 전국시대란 명칭은 전한(前漢)시대 유향이 편찬한 <전국책>이란 책이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춘추시대는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져 제후들은 서로 싸움을 일삼아 몇몇 강력한 제후들이 등장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제후들이 바로 춘추오패이다.

  관중은 춘추시대 오패의 한 사람인 제환공을 도운 명재상이나, 그 관중의 병이 무거워졌을 때, 자기의 후임을 환공께서 질문받고 소위 관포지교』를 맺은 포숙아보다 도리어 적임이라고 추천한 인물은 습붕이다.

  환공이 이 관중, 습붕들을 이끌고 소국인 고죽을 토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공격을 시작했을 때는 봄이었으나 싸움이 끝나고 귀로에 오를때는 계절도 어느덧 겨울이 되어 있었다. 살이 에이는 듯한 찬바람과 악천 후 밑의 행군은 갈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 고생이 대단했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넘어 고생고생하면서 군을 진군 시키고 있을 때, 환공의 군사가 돌아가는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지독한 추위 속에서 덜덜 떨면서도 대장들은 저쪽이 아닌가, 아냐, 이쪽 못을 건너야 하지않나, 하며 확신도 없이 쩔쩔 매고 있을때, 관중이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이런 때는 늙은 말이 본능적 감각으로 길을 찾아 낸다그래서 짐말 중에서 한 마리의 노마(老馬)를 골라 수레에서 풀어 주었더니 말은 잠시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는 듯 싶자, 잠시후 어느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것을 따라 길없는 길을 가는 동안 노마는 마침내 제길을 찾아 병사들은 무사히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험한 산속 길을 진군 했을 때 - 전군은 휴대하고 있던 물을 다 마셔 버렸다 - 가도 가도 샘은 커녕 냇가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군사들은 목마름에 허덕여 더 이상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게 되었다. 허나 이때 습붕이 이렇게 말했다. 개미란 것은 겨울에는 산의 남쪽에 집을 짓고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 집을 짓는 법인데, 개미집이 있으면 그 아래 8척이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개미집을 찾아 그 지하를 파본 즉 물이 콸콸 용솟음쳐 나왔다고 한다.

  한비자의 <설림(說林)>에서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명민한 머리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뽑내고 있다하며 풍자하고 있다.

  관중의 성(聖)과 습붕의 지(智)로도 모르는 곳에 이르면 그 지혜가 노마나 개미도 스승으로 삼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지금 사람은 그 어리석은 마음에도 성인의 지(智)를 스승으로 삼는 것을 모른다. 노마의 지(智)란 뭐든지 안다고 제 아무리 잘난척 해도 그 지혜가 노마나 개미만도 못한 때가 있는 법이다. 즉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 할 지라도 각각 장점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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