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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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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구순(寇恂) 神明열전

구순(牛星) 神明열전 

       

             
  그리고 구순은 그들을 맞으러 길을 나섰다가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돌아왔다. 가복은 병사틀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였으나 사졸들이 모두 취해버려서 결국 하는 수 없이 영천을 지나쳐 버렸다. 구순이 곡숭을 보내 그 진상을 왕에게 들려주니 왕은 곧 구순을 불러들였다. 구순이 이르러 왕을 인견(引見)하는데 가복이 먼저 그 자리에 있다가 일어나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왕이 말하였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두 장군께서 어찌 사사로운 다툼을 할 수 있소? 오늘 짐이 그대들을 화해시키리다.』

  그리하여 구순과 가복은 함께 앉아 매우 즐거워하다가 끝내는 같이 수레를 타고 나가서 친구의 의리를 맺고 헤어졌다. 구순은 영천으로 돌아왔다.
  건무(建武) 3년 왕은 사자를 보내 구순을 여남(汝南)의 태수로 배수하고 또한 표기장군(驃騎將軍) 두무(杜茂)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구순을 도와 도적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도적떼들이 조용해지고 군(郡)에는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

  구순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향교(鄕校)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좌씨춘추(左氏春秋)에 능통한 사람을 초빙해다가 몸소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건무 7년 주부(朱浮)를 대신해서 집금오(執金吾)가 되었다. 그 다음 해, 왕을 따라가서 외효(隗囂)를 공격하였으나 영천(穎川)의 도적들이 떼지어 일어나 왕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면서 구순에게 말하였다.

  『영천은 장안(長安)에 가까우니 때맞추어 평정하는 것이 좋소. 그러나 오직 경만이 그들을 평정할 수 있을 따름이었는데 짐의 행렬을 쫓아 출병하였으니 그대의 우국충정(憂國忠情)을 알 수 있겠오.』
  구순이 대답하였다.

  『영천의 도적들은 경솔하여서 폐하께서 멀리 험난한 지대를 넘어 농(朧)ㆍ촉(蜀)땅에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활하게 그 틈을 타서 난리를 피우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폐하의 군대가 남쪽으로 향해 온다는 소식을 그들이 든는다면 반드시 놀라고 당황하며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원컨대 신이 무장하고 선봉대가 되게 하여 주소서.』
  왕은 그 날로 군사를 남쪽으로 돌렸다. 구순이 왕을 따라 영천에 이르자 도적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러나 왕은 구순에게 영천군을 끝대 배수해주지 않았다. 백성들이 길을 막고서, 『폐하께서 구군(寇君)을 1년만 더 이곳에 머무르게 해주시길 원하옵니다.』라고 말하므로 왕은 구순을 장사(長社)에 남겨두어 관리와 백성을 진정시키게 하니 구순은 나머지 도적 무리들의 항복도 받아 내었다. 

  이전에 외효의 장수인 안정(安定)의 고준(高峻)이 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고평현(高平縣) 제일성(第一城)에 근거하고 있었다. 왕은 대조(待詔) 마원(馬援)을 시켜 고준의 항복을 받아내니 그 이후로 하서(河西)의 길이 뚫렸다. 중랑장(中郞將) 래합(來歙)은 법제에 따라 고준을 통로장군(通路將軍)에 배수하고 관내후(關內侯)로 봉해주었는데 그 뒤 고준은 대사마(大司馬) 오한(吳漢)에게 속하여 함께 기(冀) 땅에서 외효를 포위하였다. 한(漢)의 군사들이 패퇴하자 고준은 옛 군대로 돌아가 다시 외효를 도와 농저지방을 지켰다. 외효가 죽게 되자 고준은 고평현에 근거하면서 주살 당할까 두려워 굳게 지키고 있었다.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합(耿盒)은 태중대부(太中大夫) 두사(竇士), 무위(武威) 태수인 양통(梁統) 등을 이끌고 고준을 포위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건무 10년 왕은 관내(關內)로 들어와 장차 몸소 그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구순이 왕을 따라다니고 있다가 간언하였다.

  장안(長安)은 낙양(洛陽)과 고평(高平)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접전하기가 가깝고 편리하며 안정(安定)ㆍ농서(朧西)지역도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을 터이니 이것은 한 곳에 조용히 거하면서도 사방을 제어할 수 있는 요새라는 뜻입니다. 지금 병사와 말들이 지쳐있어 위험한 때이므로 견고한 병사 만여 명으로 지난 해 영천을 치던 것과 다르니 경계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왕은 구순의 말을 따르지 않고 진군하여 연현(硏縣)에까지 이르렀으나 고준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왕은 의논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구순에게 말하기를, 『경이 전에 나더러 거사하지 말도록 충고하였으나 지금은 나를 위해 가주시오. 만약 고준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경합등의 다섯 개 군을 이끌고 그를 치겠소.』라고 하였다. 구순은 욍의서찰을 가지고 제일성에 이르렀는데 고준이 파견한 군사(軍師) 황보문(皇甫文)이 나와 맞으며 거절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구순은 노하여 황보문을 베어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간하여 말하였다.

  『고준은 정예병이 만여명이고 모두 강한 궁수이며 서쪽으로 농(朧)으로 통하는 길이 막고 있어서 해가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를 항복시키려고 왔는데 도리어 그의 사신을 죽여버린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안됩니다.』
  구순은 그 말에 응하지 않고 황보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그의 부하를 돌려보내 고준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라고 하였다.

  『그대가 보낸 군사(軍師)가 무례하여 이미 죽여버렸소. 항복하고 싶거든 빨리 항복하고 항복하고 싶지않거든 굳게 지키시오.』 고준은 두렵고 당황하여 그 날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여러 장군들이 구순에게 경하하면서 말하였다.

  『감히 묻습니다. 그의 사신을 죽이고도 성(城)의 항복을 받아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구순이 대답하였다.

  『황보문은 고준의 심복(心腹)이라 바로 고준이 계책을 얻은 사람이오. 이제 와서 사양하며 굴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항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오. 그러니 그를 살려주면 계책을 짜낼 터이요, 그를 죽이면 고준이 기댈 바를 잃게 되어 그래서 항복한 것일 따름이오.』
  여러 장군들이 모두 대답하였다.

  『과연 저희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구순은 마침내 고준을 낙양으로 돌려보냈다. 구순은 경(經)에 밝고 행실을 잘 닦아 명망이 조정에서 두터웠으며 받은 녹봉은 친구ㆍ고인(故人)과 따르는 관리ㆍ병사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항상, 『내가 사대부(士大夫)의 몸으로 이런 위치에까지 이르렀는데 어찌 홀로 그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의 뛰어난 점에 감복하면서 재상(宰相)의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건무 12년에 죽으니 시호를 위후(威候)라 하였다. 아들 구손(寇損)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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