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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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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 역사인물 : 단종(端宗)

단종(端宗)

 

 

글 교무부 

 

▲ 단종 

 

병신년 三월에 박 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철규·박 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 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 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데 이날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화실(拈花室)에서 이렛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神明解)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교운 2장 57절)

 

  단종(端宗:1441~1457)01은 조선의 제 6대왕으로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이다. 몸이 매우 약했던 어머니는 스물다섯 되던 해에 단종을 낳았는데, 난산으로 인해 완전히 기력을 빼앗기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어린 단종은 조부(祖父)인 세종의 후궁이었던 서조모 혜빈 양씨에 의해 양육되었다. 단종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역시 젖먹이였던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길 정도로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였으므로 단종에게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자라면서 옥과 같이 귀여웠던 단종은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뜻을 능히 통하여 조부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세종은 당시 제일의 문장가 정인지로 하여금 단종의 사부를 삼고 자신은 친히 그 옆에 앉아 어린 손자가 글을 읽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얼굴에는 웃음이 걷힐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비운(悲運)의 왕 단종에게도 비록 짧았지만 행복한 시절이 있었던 듯하다.

  세종은 단종을 세손(世孫)으로 책봉한 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집현전 소장 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하였다.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어 얼마 살지 못할 처지였고 장남인 세자 향(문종) 역시 기질이 허약하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혈기 왕성한 세종의 다른 아들들 때문에 혼자 남겨질 세손이 삼촌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것이었다.

  세종의 판단은 적중하였다.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병사(病死)하고 말았고, 단종은 1452년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약 1년 만인 1453년 10월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정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한때 단종의 사부를 지냈던 정인지는 수양대군 측에 붙어서 한명회 등과 모의하여 3년 동안이나 단종의 처소에 드나들면서 글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왕위를 내어 놓도록 갖은 회유를 다하였다. 어린 단종은 두렵고 귀찮은 생각에 마음이라도 편안한 상태에서 살고 싶어서 1456년 왕위를 수양대군[세조]에게 넘기고 선왕으로 물러났다.

 

 

▲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선왕(先王)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는 충신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니 바로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이개, 유응부02)들의 거사였다. 일찍이 세종이 단종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집현전 학사였던 이들을 불러 장래를 부탁하였던 바,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수양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실패하였다. 실패의 댓가는 처절하였다. 온 몸을 불에 달군 쇳덩이로 지지는 국문을 당하다가 한강변 새남터 형장에 끌려가 능지처참을 당했다. 남은 아들들과 손자, 사촌까지 연좌제로 몰살을 당하였고, 부인들은 관비가 되었다.

 

▲ 장릉(莊陵)

 

 

  한편 사육신들이 세조 등극 후에도 관직에 있으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한 것과는 달리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모든 벼슬을 내던지고 일생동안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않고 절의를 지킨 6명의 충신들도 있었으니 이들을 생육신(生六臣: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03)이라 한다. 이중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였던 김시습은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사육신의 시신을 밤중에 몰래 수습하여 강 건너 언덕에 묻어 주었다. 현재의 사육신묘(서울 노량진 소재)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

사육신에 대한 옥사(獄事)가 끝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쫓겨나게 되었다. 유배지는 영월읍에서도 삼십 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청령포였다. 삼면이 물이고 나머지 한 쪽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어져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단종은 이곳에서 왕비 송씨와도 헤어진 채, 시위 한 사람에 궁녀 두어 명과 참담한 마음으로 목숨을 이어갔다.

 

아름드리 나무는 하늘에 닿았고

시냇물 돌을 빗겨 들리는고야.

산 깊어 범과 표범 많기도 하여

저물지 않아도 사립문 닫네. -단종作

 

  그러나 이런 무료한 세월도 오래가진 못했다. 수양대군의 왕위등극을 반대하여 삭녕04으로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 수양대군의 동생)이 또 다시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전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세조는 마침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단종이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를 향해 엄하게 꾸짖으며 약사발을 받지 않자 같이 따라온 영월읍의 통인(通引)05이 큰 상이라도 타볼 요량으로 활시위로 만든 올가미를 문틈으로 집어넣어 목을 잡아당겼다. 단종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때 단종을 죽인 통인은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고 입과 코로 피를 쏟으며 죽었고, 궁녀들은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다. 약을 가지고 왔던 금부도사는 황망한 심정에 단종의 시신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궁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며칠이 지나도 누구하나 후환을 입을까 염려하여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히 영월 호장을 지내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이웃과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팔아 수의와 관재를 마련하였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밤을 기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근처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단종이 묻혀 있는 곳은 강원도 영월읍 영흥리이며, 숙종 24년(1698)에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장릉(莊陵)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01 교운 2장 57절.

02 유응부는 무관이었음.

03 남효온은 세조의 왕위찬탈 당시 두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04 경기 연천군 및 강원 철원군 일부지역의 옛 이름.

05 조선 시대에, 경기·영동 지역에서 수령(守令)의 잔심부름을 하던 구실아치. 이서(吏胥)나 공천(公賤)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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