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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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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지명 이야기 : 여주(驪州)의 지명 이야기

여주(驪州)의 지명 이야기
 
 
연구원 조광희
 
들어가는 말

  도전님께서 1969(己酉)년 4월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고 그해 서울 성동구 중곡동에 중앙본부도장을 창건하셨다. 그 후 여주도장은 1986(丙寅)년 5월 18일(음: 4월 10일)에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0(庚午)년 12월에 완공되고 대순진리회의 본부 도장이 된 것은 1993(癸酉)년 2월에 중곡도장에 있던 본부가 여주도장으로 이전한 뒤부터다.
  이때부터 여주도장은 본부도장으로서 참배와 치성, 공부와 수강 그리고 그 밖의 각종 행사가 이루어지며 사시사철 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현재 여주는 대순진리회 수도인이라면 일 년 중 몇 번은 꼭 찾는 소중한 장소가 되었다. 필자 역시도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참 많이 오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현재 많은 수도인이 매번 여주본부도장에 오기 위해 여주를 드나들지만 정작 여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관심이 적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여주지역에 대해 한 번쯤 관심을 두고 알아보는 일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여주의 지명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 여주 지명 설화의 진원지 ‘마암’ 가는 길목

 
여주(驪州)의 지명유래  

  지명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늘 변천해 왔었고, 오늘날 ‘여주’라는 지명이 있기까지 이 지역에는 다른 명칭이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먼저 여주의 옛 이름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상 타당하다 할 것이다.
  여주 지역은 처음 삼한시대에 마한(馬韓) 땅에 속했다가 삼국이 생기면서 백제땅에 속했다. 그 후 고구려가 세를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역에 속했다. 그리하여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에 여주에 대한 지명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는 지명으로 기록이 되었다. 
  골내근현(骨內斤縣)에서 한자어 뼈 골(骨) 자는 음차로 누런색(黃)을 뜻하는 것이고 안 내(內)자는 음차01로 내(川)를 나타내고 도끼 근(斤) 자는 음차로 고을 촌(村)을 나타내는 말로 ‘누런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골내근현을 통과하던 여강 지역은 점동면의 삼합리에서부터 도리, 처리, 흔암리, 우만리, 단현리, 연라리, 상리, 하리, 왕대리, 백서리까지 강변으로 다른 강의 유역과는 달리 전혀 평야를 형성하지 않고 모두 강변이 가파랐다. 따라서 그 옛날 홍수가 나면 물이 누런색(누런 내: 黃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지금도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은 홍수 철에는 물이 누런색이다. 따라서 깊은 골짜기에 누런색의 내(川)가 흐르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음을 표기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 바위에 새겨진 마암(馬巖)
 

  그 후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여주(당시 골내근현) 땅은 신라의 영토가 되고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에 황효(黃驍)라고 고쳤다. 황효02란 이름이 어떤 유명한 말(馬)이 원인이 된 지명인지 아니면 늘은(확장된) + 날래(급작히)의 우리말 음을 한자로 표기(누루 황+날낼 효)해 쓴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원인이 어떻게 되었든 이후의 지명은 계속해서 말(馬)과 관련된 여주(驪州)의 검은말 려(驪) 자를 중심으로 지명이 계속 변천해 나갔다. 그것은 지명변천에 따른 여주군의 연혁을 보면 쉽게 확인이 된다.
  어원의 유래에서도 여주의 지명이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한자사전에서 찾아보면 여주의 려(驪)는 검은 말 려, 가라말 려, 검은 말 리라고 하며 뜻을 나타내는 말마(馬)와 음(音)을 나타내는 ‘려’가 합하여 이루어진 형성 글자이다.
  또 「한국 고전 용어사전」에 려(驪)는 “① 고대 우리나라에 있었던 나라 이름. 가야(伽倻)·가락(駕洛)의 다른 이름. ② 가라말, 검은 말. 흑색의 말을 ‘여’라고 하며 속칭 ‘가라’라고 한다.”라고 설명된 것으로 보아 여주의 지명유래는 아무래도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 마암(馬巖)바위 전경
 

  그 외에도 말과 관련된 여주의 지명설화가 전해지는데 마암(馬巖)바위 전설과 신륵사(神勒寺)의 전설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마암바위의 전설을 보자.

  
  옛날 한 어옹(漁翁)이 여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낚싯대를 물에 담그고 물 건너편의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런데 멀리서 손짓하며 달려오는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무척 다급한 듯 사공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 사공이 없던 터라 어옹은 낚시를 거두고 배에 올랐다.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여인의 비명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뒤쪽에서 험상궂은 사나이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옹이 재빠르게 건너가 그녀를 배에 태우려 할 때 뇌성벽력이 치며 바람이 불었다. 그와 함께 어디서인지 누런 말과 검은 말이 나타났다. 여인은 재빠르게 황마(黃馬)에 오르고 뒤이어 달려온 사나이는 여마(驪馬)에 올랐다.
  하늘엔 자욱한 물보라가 일고 어옹은 흔들리는 배를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바람은 멎고 물결이 가라앉자 그 광경에 놀란 어옹이 말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니 여인과 사나이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의 자태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 바위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왔다 하여 마암(馬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의 지명도 황려(黃驪)라고 불렀다고 한다.
 
 
▲ 신륵사 3층석탑과 강월헌
 
 
  위 설화에 여강에서 황마와 여마가 출현한 뒤 지명을 황려라고 한 점으로 보아 여주의 지명유래가 말과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륵사의 전설에도 말과의 관련성이 나타난다.
 
 
  어느 날 포악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나타나 농작물을 마구 짓밟고 사람들이 얼씬만 하면 그냥 물어뜯어 사람들은 이를 피해 집안으로 숨기 바빴고 절 근처도 얼씬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농민의 피해가 심한 것을 절에 와 있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못 들을 리 없었다. 선사가 하루는 포악한 황마와 여마를 다스리기 위해 이상한 굴레[勒]을 씌워 용마를 다스렸더니 이후부터는 양마(良馬)가 되었다. 그 후 신기한 굴레로 말을 다스렸다 하여 이 사찰을 신륵사(神勒寺)라 부르게 되었고 이 지역의 지명도 황려(黃驪)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 나옹선사 부도/고려말/신륵사
 
 
  그 외에도 마을 형상이 말이 물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여 마래리03라고 한 점, 능서면 번도리 말마당, 도장 주변의 마감산(馬甘山)04 등의 지명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여주와 말과의 관련성을 더욱 짙게 해준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먼저 여주는 고대 삼국시대의 골내근현이라는 지명에서 지금의 여강(남한강)과 관련성이 있었고, ‘려’ 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명변천의 역사를 살펴보면 말과 관련성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마암바위 전설과 신륵사 전설 두 이야기는 여주의 지명유래가 말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잘 나타내준다. 그러나 여주 문화원에서 발간한 『여주고을 땅 이름의 유래』라는 책에는 이와 상반된 견해가 있다.
 
 
 오늘날 ‘여주’라는 지명의 단서가 되는 마암바위 전설과 신륵사의 전설 두 이야기에서 황마와 여마가 나왔기 때문에 말의 이름을 따서 황려라는 지명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마암(馬巖), 즉 말바위란 순수한 우리말로 크다는 뜻과 산이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라는 음은 곧, 큰 바위란 뜻이지 마암에서 황마와 여마가 나왔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전설로 보인다.
  더구나 황마와 여마가 몹시 사나워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나옹선사(1320~1376)가 신력으로 붙잡아 굴레를 씌웠다 하고 그로 인해서 지명은 황려가 되고 그가 있던 절의 이름도 신륵사라고 하였다 하는데 황려라는 지명은 나옹선사가 신륵사에 와서 머물던 1370년대보다 370여 년 전인 995년에 이미 지명을 황려라고 하였고 신륵사는 나옹선사가 머물기 이전인 당시부터 신륵사라 하였다. 그러고 보면 선후 연대와 이론이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후세 사람들에 의해 그럴듯하게 지어낸 유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황려(黃驪)의 누루 황(黃)을 순우리말 ‘느루(늘은, 늘어난)’라는 뜻으로 보고 검은말 려(驪)의 ‘검’을 순우리말 ‘곰(크다, 미련하다, 웅장한)’에서 파생된 단어(감, 검, 굼, 금)로 보아 “늘은 큰 마을(확장된 큰 고을)”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여기까지가 여주 문화원에서 편찬한 『여주고을 땅 이름의 유래』라는 책에 실린 견해로서 여주의 지명유래가 말과 관련되었다는 설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쉽게도 지금도 여주의 려(驪)가 어떻게 유래 되었는지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단지 하나의 추측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명 유래에 관련된 설화를 대할 때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조상 대대로 구비전승(口碑傳承)05된 향토문화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후 여주지역은 고려 1257년(고려 고종 44)에 지명을 영의(永義)라고 개명했다가 48년 후인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에 여흥(驪興)이라고 개명했다.
  조선조에 들어와 제8대 예종원년(1469)에 세종대왕의 영능(英陵)을 이곳(북성산 기슭)으로 천장(遷葬)06하고 나서 그해 여흥과 인접해 있던 천령현(川寧縣)을 폐합시키고, 지명을 여주(驪州)로 고친 이후로 현재까지 명칭이 존속되어온 것이다.
 
 
 
참고문헌
대순진리회 교무부, 『전경』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4.
여주군사 편찬위원회, 『驪州郡史제4권 민속과 전승』, 경기도인쇄정보산업 협동조합 2005.
한국고전용어사전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제1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여주문화원, 『여주고을 땅 이름의 유래』, 아우내 인쇄 1996.
네이버 대백과 지식사전
용인시 디지털 문화대전 http://yongin.grandculture.net
여주군사 홈페이지 http://history.yj21.net/
 
 

01 음차(音借):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
02 황효의 ‘효(驍)’는 ‘날쌔다’ 또는 ‘좋은 말’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03 여주군 능서면 마래리
04 강천면 걸은리, 말개미, 부평리 사이에 있는 해발 388m의 산이다. 조선 효종 때 이완(李浣)장군이 지금의 영월루 자리에서 말을 풀어 놓았는데 마감산으로 가므로 그때부터 마감산이라 했다고 한다. 한편 말감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05 구비 전승은 행위나 물질이 아니라 말로 전승되는 문화를 뜻하는데, 말로 전승되는 문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비 문학이다. 구비 문학은 문자로 기록되는 기록 문학의 모태이면서 말이 존재하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06 이장(移葬)을 말함. 이미 썼던 묘를 다시 파서 다른 곳으로 옮겨 장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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