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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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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 (95) 해금강전설 - 옹천에서 굴러떨어진 왜구들

(95) 해금강전설 - 옹천에서 굴러떨어진 왜구들

 

글 교무부

 

▲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옹천

 

 

  해금강의 명승지는 크게 해금강구역과 삼일포구역, 그리고 총석정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금강산 유람을 위해 동쪽 해안 일대에 펼쳐진 해금강구역과 삼일포구역을 둘러보고, 총석정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원도 고성군에서 북쪽의 통천군으로 50여 리를 가야 한다. 그런데 통천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길이 동해 바닷가와 마주치는 절벽이 있다. 이 절벽은 마치 큰 항아리처럼 생긴 가파른 암벽이 물에 거꾸로 박혀 있는 모습이어서 사람들은 이곳을 ‘옹천(瓮遷: 독벼랑)’이라 불렀다.
  원래 고성군과 통천군은 금강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신계령(新溪嶺) 산줄기를 경계로 나누어진다. 이 줄기의 북쪽 지맥 한 가닥이 동해로 직진해 들어가서 통천 관내를 관통하는 반칙을 범하였다. 그 지맥 끝은 반골다운 기질을 발휘하여 동해안에 이르자 마치 거대한 항아리 모양의 타원형 암벽을 이루며 바다에 들기를 거부했다. 물밑으로 수십 길 내리박힌 이 암벽에는 동해의 거대한 물결이 쉴 새 없이 부딪쳐서 파도소리 요란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물보라는 천변만화를 이룬다.
  이렇게 지세가 험준하지만, 고성과 통천을 오가려면 몇십 리 험한 산길을 돌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 항아리처럼 생긴 암벽을 지나야 했다. 그래서 매끄러운 암벽을 굽이굽이 돌며 두어 자 폭이 되게 깎아내어 소로(小路)를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큰 독의 어깨에 그은 두 줄기 작은 선처럼 보였는데, 사람들은 이 길을 목숨을 내걸다시피 하며 지나다녔다. 발밑에는 천길 벼랑이 깎아지르고 그 아래에는 검푸른 동해 바다가 집채 같은 파도를 일으키니, 웬만한 담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이곳을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일찍이 명리를 구하는 관리나 상인 혹은, 탐승객 외에는 이 길로 다니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옹천은 그 빼어난 경관 때문에 이것을 소재로 한 조선 시대 회화의 주요 작품이 되기도 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조선 후기 민족적 사실주의 화풍의 선구로서 한국의 산수화, 이른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였다. 그가 아차 하면 미끄러져 떨어지기 십상인 이 길에서 특별한 감흥을 받은 것은 고성과 통천 사람들이 고려 말 왜구(倭寇)들을 이리로 유인하여 섬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겸재가 위험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옹천을 지나갔을 때는 어떻게 하면 이 장쾌한 경관을 화폭에 잘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을 것이다. 
  겸재가 그린 「옹천도」를 보면, 붓을 뉘어 대담하게 쓸어내림으로써 바윗덩어리를 상징하였고, 붓끝을 세워 물결을 겹겹이 포개 놓음으로써 바다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한 가닥 실낱같은 소로가 굽이굽이 하얗게 옹천의 중턱을 감돌아나가게 함으로써 위태로운 길의 실상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긴장된 구도의 그림 속에서도 그는 중간 중간에 바위와 사람들을 그려놓아 인간적인 분위기를 더하였고, 벼랑길 끝에 모퉁이를 막 돌아선 나귀의 뒷다리와 꼬리를 그려 넣어 긴장을 풀어주는 재치가 있었다. 
  겸재의 「옹천도」를 본 후계(后溪) 조수유(趙裕壽, 1663~1741)가 이르기를, “한겨울에 눈이 내려 얼면 사람과 가축이 미끄러져 떨어지니, 벼슬길 공식 행차와 장사로 물고기와 미역 짊어진 사람이 아니면 이 길로 잘 다니지 않는다. … 저 사람이 숨죽이고 발꿈치를 끌어 이 험한 곳을 참고 지나는 것은 단지 총석정을 보려 함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명승을 찾는 것은 관리나 상인과 같은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의 말처럼 만고풍상의 비바람을 다 겪는 사이에 이 통돌로 된 큰 바위는 씻기고 깎이고 다져져서 그 겉면이 푸르스름한 흰빛으로 반들거렸고 어디나 발을 붙이기 어렵게 매끈매끈하였다.
  이처럼 옹천의 길 위는 밋밋한 절벽이요 그 아래로는 천길 벼랑이었다. 특히 아래쪽에는 바닷물이 사시사철 밀려왔고, 날씨가 사나워지면 파도소리가 우레 치듯 하고 물결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벼랑 기슭을 파헤쳤다. 옹천 벼랑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어긋나게 지나치고 말은 한 마리만 겨우 지나갈 수 있다. 사람도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신이 아찔하고 말이나 당나귀도 무서워 겨우 발을 떼놓는 곳이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고려 말에 왜구들이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 고성과 통천의 관민이 힘을 합쳐서 그들을 모두 바다에 빠뜨려 넣었다. 그 후 옹천은 ‘왜륜천(倭淪遷)’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이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인 14세기에 이르면 일본의 왜구들은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을 노략질하는 것도 모자라 점점 기승을 부리며 북쪽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지금의 강원도 통천과 고성 지방에도 왜놈들이 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농가를 불살랐으며, 닥치는 대로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만행을 번번이 저질렀다.
  왜륜천에 관한 이야기는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해 가을, 왜구들이 통천군 일대에 침입하여 한바탕 노략질을 하고 나서 고성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만행에 격분한 강원도의 군사들과 금강산 일대의 농민들은 왜구들을 몰아낼 만반의 대책을 세우고 기습공격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인 옹천 근방에 미리 매복하였다.
  고성을 향해 남하하던 왜구들이 옹천의 고갯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너무도 험한 지세에 매우 놀라고 말았다. 왜구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저희끼리 “이런 곳에서 고려의 군사를 만난다면 큰 낭패를 보겠는걸!” 하고 수군거리며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벼랑길을 건너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고려군의 지휘관은 공격신호를 알리는 효시(嚆矢: 우는살)를 그들의 머리 위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옹천 뒷산 마루와 남북의 개울가에 매복해 있던 고려의 군민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앞뒤에서 놈들을 들이쳤다. 궁지에 몰린 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가 제각기 살길을 찾느라 어떤 놈들은 뒤에서 빨리 앞으로 가라고 다그치고 앞에서는 뒤돌아서서 도망치려고 밀쳐댔다.
  좁디좁은 벼랑길에 내몰린 왜구들은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미끄러운 바위에서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앗!” 하는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바닷속에 빠진 적들은 악착같이 기어오르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왜구들은 옹천 벼랑길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첨벙!”, “첨벙!” 하며 바닷물 속으로 처박혔다.
  성난 파도는 왜구들을 휘감아 벼랑기슭의 바위에 메어쳤다. 어떤 놈들은 고려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거나 농민들이 굴리는 돌벼락에 맞아 널브러졌다. 또 어떤 놈들은 창과 칼에 맞아 넘어지고 굴러떨어지기도 하였다. 바다에 빠졌다가 요행히 살아남은 이들은 헤엄이라도 쳐서 목숨을 건지려고 했지만 고려군의 활쏘기 명수들은 왜적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모두 쏘아 맞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왜구의 무리는 완전히 소탕되었다. 이렇게 옹천 전투는 고려 군사들과 농민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그때부터 이 고을 사람들은 옹천(일명 독벼랑)을 왜구들이 빠져 죽은 벼랑이라고 해서 ‘왜륜천’이라 불렀다.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책에 옹천 전투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왜륜천에 관한 이야기는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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