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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4년(2024)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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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전경 속 이야기 도장 둘러보기 고전 에세이 울타리 대순광장 지방 회관 소개 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생각이 있는 풍경 세상을 구한 발자국 대순문예 알립니다

대순문예 : 악의 끝에서 피어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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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끝에서 피어난 선




  그날은 갑오년 섣달이었다.
  달빛조차 세상에 닿지 않는 밤, 만호는 숨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빗소리에 숨어든 걸음은 빨랐지만 무척 조심스러웠다. 한참을 걸으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에 파수꾼들의 인영(人影)이 아른거렸다. 잡히면 죽음을 면치 못할 테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비의 시신을 두고, 자식 된 도리로 어찌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는가. 만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기회를 엿보았다.
  “동비(東匪)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그러게나 말일세. 지긋지긋하구먼.”
  “그 포수가 동비일 줄은 몰랐는데… 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지 않았나.”
  “동학을 전파하려 그런 거겠지, 뭘. 그러니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겠나. 이래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니까.”
  순간 만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아비는 동비가 아니었다. 나라에서 알아주는 포수였지만 겸손했으며, 호랑이를 잡아 받은 돈은 먹고살 만큼만 남겨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썼던 선인이었다. 그럼에도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어려움에 처한 벗을 도왔던 까닭이요, 풍전등화와도 같은 나라를 외면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비의 벗이 동학도였다. 동학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군에 쫓기는 것을 아비가 숨겨주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아비는 붙잡혔고 동학도로 몰려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말았다.
  - 안 됩니다, 아버지! 이러다 들키면 모두가 죽습니다!
  -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주환은 폭정을 견디다 못해 폐단을 뜯어고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일어난 의인이다.
  - 그렇다 해도 가족보단 중요치 않습니다!
  - 내가 주환처럼 될 수도 있었다.
  - ……!
  - 조선이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런 시국에 사내로서, 백성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동학과 뜻이 같지는 않아 잠자코 있었을 뿐이다.

  아비가 벗을 숨겨주기로 했을 때 만호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잘 살 수 있음에도 어찌 타인부터 돕는단 말인가. 그렇게 다른 이들을 돕는다 해서 누군가가 그 공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비는 늘 그랬듯 타인을 도왔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만호는 애써 눈물을 속으로 삼키고는 파수꾼들을 피해 처형장 쪽으로 다가갔다. 허리 언저리쯤 쳐진 줄을 들추고 들어가니 피내음이 물씬 풍겼다. 걸을 때마다 누군가의 팔이, 누군가의 다리가 치이거나 밟혔다. 모두 동학도거나, 동학도로 몰려 희생된 이들이었다.
  어둠 속에서 곳곳을 더듬으며 아비를 찾았다. 제발, 부디 이 손에 닿기를. 젖은 흙과 피가 뒤엉겨 진득이는 속에서 익숙한 손이 느껴졌다. 굳은살투성이의 커다란 손. 소매를 걷어 만져보니 호랑이에게 입은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깨가 떡하니 벌어진 거구의 사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였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면서도, 잡은 호랑이의 넋을 기려주던 아버지-
  - 사람들을 숱하게 헤친 놈입니다. 아버지도 다치셨으면서 뭐 예쁘다고 향을 피워주십니까.
  - 그리 말하지 말거라.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에 죽였다지만, 엄연히 한 생명이다. 녀석은 그저… 배가 고팠을지도 모르지. 그런 녀석을 나는 먹고살려고 죽였고.
  - 아버지…!
  -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싶다만은…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우리라도 조금씩 선의 씨앗을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
  - …….
  - 하하, 너를 붙잡고 어려운 이야기를 했구나. 그만 가자.
  환하게 웃으며 내밀던 손은 이젠 미동조차 없었다. 만호는 손을 뻗어 아비의 손을 감싸 쥐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슨 해를 끼쳤다고… 이런 화를 당하셔야만 했는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간신히 누르고선 아비를 둘러업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철망이 쳐진 쪽이 경계가 느슨해 보였다. 빠르게 철망 아래를 기어 나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내달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친 숨소리와 질퍽거리는 발소리를 삼켜버린 비조차, 눈물만은 어쩌진 못했다.



  ***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조금씩 잦아들 무렵, 만호는 가래를 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앞엔 봉긋한 무덤이 있었다. 만호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무덤을 쳐다보았다. 무덤을 보고 있는데도 아비가 죽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호랑이를 잡으며 몇 번이고 사투를 벌여도, 결국엔 돌아오던 아버지가 이젠 없다니.
  “결국엔 이리되실 것을…”
  이리될 줄도 모르고, 당연하듯 사람들을 돕던 아비가 원망스럽다가도 이내 가여워졌다. 선하기만 했던 아비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재판 없이 처형을 집행한 현감에게 있을 것이요, 그런 자도 현감이 되게 한 나라에 있을 것이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아비를 죽인 현감을 찢어발기고, 그 살점은 금수의 밥이 되게 하리라. 뼈는 부수고 흩뿌려, 유해를 찾지도 못하게 하리라.
  “그리하면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
  이참에 나라도 무너뜨려 볼까. 이렇게까지 썩어버린 나라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나라도 어수선하고, 폭정에 지친 이들이 수두룩하니 뜻을 함께할 사람들도 많을 성싶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허망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었다. 설령 현감을 죽이고 나라를 무너뜨린다 해도 죽은 아비가 살아 돌아오진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아비의 죽음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타인을 도우려 했던 선한 마음이 동학도라는 누명 아래 묻혀버리고 짓밟히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비는 죽고 없어도 그 마음까지 사라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텅 비어버린 만호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흙을 털고 일어난 만호는 아비의 무덤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답이 돌아올 리 없건만, 어쩐지 아버지가 듣고 있을 것만 같아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아버지와 다르게 살려 합니다. 사람들을 돕기만 해선 달라지는 게 없음을 잘 알았으니…”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은 계속 생길 것이었다. 신분의 차이, 부의 차이, 힘의 차이… 그로 인해 생기는 약자들- 엄밀히 따지면, 아비도 그 차이로 희생된 약자 중 하나였다. 무언가 다짐한 만호는 무덤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
  그로부터 4년 뒤.
  세상은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안으로는 급격히 들어온 서양의 제도와 기존 제도가 충돌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아라사 등의 대국들이 어떻게든 조선을 삼키려 하는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만호는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아 의병을 만들었으나 싸움은 쉽지 않았다. 폭정과 싸우고 외세와 싸우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하여 택한 방법이 탐관오리가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을 빼앗는 것이었다.
  첫 번째 표적은 바로 아비를 죽인 현감이었다. 관직을 사서 현감이 되어선 그 돈을 회수하고 부귀영화를 얻고자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탐관오리로 유명했다. 최근엔 동비들을 소탕한 공로로 현령으로 승진하기까지 해서, 만호의 속을 여간 뒤집어 놓는 것이 아니었다.
  “으리으리하구먼.”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도 새로 만든 기와가 번쩍거렸다. 저택 규모도 꽤 커져 있었는데 주변 민가를 밀어버리고 새로 지은 모양이었다.
  “저게 다 어디서 왔겠나. 백성들의 피눈물로 만들어진 게지.”
  “요즘은 친일도 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후일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온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만호에게 집중됐다. 만호는 말없이 저택만 노려보았다.
  어찌 죽이고 싶지 않겠는가. 마음속에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인 이였다. 그러나 현령 하나 죽인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놈을 죽이면 빈자리는 비슷한 다른 놈이 메꿀 테니까. 놈을 죽인다고 해서 아비와 같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이들이 또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의미 없는 살생은 굳이 하고 싶진 않았다.
  재산을 전부 빼앗는다면, 현령은 자연히 몰락할 것이었다. 빼앗은 곡물은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재물로는 무기를 사서 전력을 정비할 것이다. 사람을 모으고 힘을 키워, 외세를 물리친 후엔 세상을 바꿀 것이다. 더는 눈물 흘리는 이가, 억울하게 죽임당하는 이가 없는 세상이 올 수 있게….
  각오를 다진 만호가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만호도 같은 조 사람들과 함께 담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기척을 죽여 움직이다가, 연못가에 이르러 담벼락에 몸을 숨겼다.
  “아버님, 밤기운이 찹니다. 내일은 더 추울 성싶습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 만호는 그 여인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동백기름으로 곱게 빗은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곱디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이 현령의 딸로 보였다.
  “이건… 휘항이 아니더냐.”
  여인의 맞은편에서 대답하는 이는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현령이었다. 만호의 눈에서 살기가 일렁였다.
  “서툰 솜씨지만 일전에 주신 서피(鼠皮)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고맙구나. 내일 출타할 때 꼭 쓰마. 어서 들어가 자거라.”
  딸에게서 휘항을 선물 받은 현령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비를 죽여 놓고 행복에 겨워 마지않는 얼굴이라니. 현령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만호는 격한 분노를 억누르느라 고군분투했다.
  현령을 보내고 홀로 남은 딸은 연못을 구경하는 듯 보였다.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이들 중 하나가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대장, 어찌할까요.”
  저 여인을 인질로 잡아 창고로 안내해 재물을 털고 퇴로를 확보할 때까지 이용하면 일이 쉽게 풀릴 터였다. 그리하라고만 하면 데려온 이들이 실행에 옮길 것이었다.
  - 아버지…! 날도 추운데 들어오시지 않고요.
  - 그러는 넌 왜 나왔느냐.
  - 이거 드리려 나왔습니다.
  - 이건… 감저(甘藷)가 아니더냐?
  - 어머니께서 쪄 놓으셨습니다.
  - 따뜻하구나… 고맙다.
  분노를 누르니 이번엔 다른 것이 튀어나왔다. 추운 어느 겨울날 밤, 아버지에게 감저를 건넸던 기억이 떠올라 만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때, 털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만호와 사내들을 발견한 여인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것이었다.
  “대장…!”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만호가 현령에게 휘항을 건네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비가 탐관오리일지라도 제 눈엔 부모라는 걸까. 두려움이 어려 있는 두 눈은 너무나 새까매서,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것처럼 순수해 보였다.
  “…화초 같은 계집을 건드려서 뭘 얻겠습니까. 갑시다.”
  그때, 무서우리만치 조용하던 여인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하지만 돌아서던 만호는 이를 보지 못하고 사람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은 여인, 난설은 비틀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비가 탐관오리인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담 너머 들려오는 것이 아비 욕인데 어찌 모를까. 아비가 부정하게 모은 재산 덕에 자신이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직접 듣자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그런 아비의 비호 아래 부를 누리고 있으니 화초 같은 계집이란 말이 꼭 맞았다.
  ‘그들의 눈엔 건드릴 가치조차 없을 정도였나 보구나… 아니, 건드리는 것이 오히려 욕된 일이었나 보다.’
  난설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한낱 여인의 몸으로 아비의 가호를 벗어나기가 막막해 진실을 외면하고 살았으니, 저들의 눈엔 저와 아비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눈을 감아버린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화초 같은 계집처럼 살게 될 터였다. 큰 죄를 지은 아비 대신 미약하나마 속죄하고 싶었다.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난설은 사내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은 침입자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부리는 이들과 침입자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여인의 눈에도 전세는 확실히 침입자들에게 불리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중, 대장으로 보이던 사내가 눈에 띄었다. 조금 전엔 달빛을 등지고 있어 몰랐지만, 앳되어 보이는 것이 또래로 보였다.
  ‘이대로라면 다 죽고 말 테지…’
  아비가 이들을 살려 둘리 없었다. 난설은 저택 한쪽에 있던 등불을 집어 들고는 곡간으로 뛰어갔다. 침입자들이 일으킨 소란 덕에 곡간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등불로 창문을 깨고 안에 던지자 얼마 안 가 불이 붙어 타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은 곡간을 맹렬히 집어삼키며 다른 곳으로 번져 가려 했다.
  “불이야!”
  침입자들과 싸우던 이들은 곡간으로 하나둘 달려왔다. 이틈을 타 난설은 사내를 찾아 나섰다. 저택 내부에 환한 난설이 사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쪽으로 가면 잡힐 것이오.”
  “……!”
  “이리 소란스러운데 관군이 오지 않을 리 있겠소. 따라오시오.”
  만호는 의아함에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도우려는 것으로 보였다. 정말 도우려는 것일까, 아니면 함정일까. 그러다 여인의 소맷자락이 불에 그슬린 것을 보고는 말없이 여인을 따랐다. 무슨 이유에서 돕는 것이든 전멸할 지경에 이른 이상 도움을 마다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이의 이목을 피해 이리저리 돌고 돈 끝에 그는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윤영근이 그놈, 하인을 늘려놓았을 줄이야…”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았네. 보통 이들이 아니었어.”
  “자기 한 몸 건사하자고 그렇게까지…”
  “지은 죄가 많으니 그렇지. 우리 말고도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을걸?”
  “대장,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소.”
  만호는 불안 가득한 동지들을 쭉 훑어보았다. 며칠 전의 습격으로 얻은 것은 없건만, 3할 가량의 동지를 잃었으니 손실이 꽤 컸다.
  “우선 은신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경비가 더 삼엄해졌을 터이니,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다른 이부터…”
  “들어가게 해주시오! 전할 말이 있소!”
  밖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이야’를 외치던 그 목소리. 따라오라던 목소리.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만호는 냅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고운 장옷을 쓴 여인이 사내 둘에게 붙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저 계집은…! 윤영근의 여식이 아닙니까!”
  “여길 어떻게 알고…!”
  “제 발로 기어들어 오다니, 죽고 싶어 작정을…”
  “그만.”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한 만호는 여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집에 불을 지르면서까지 자신을 구해준 여인. 게다가 은신처를 어떻게 알아내선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이 여인의 의중이 이제 와 궁금해졌다.
  “어디 들어나 봅시다.”
  “…사죄하러 왔소.”
  난설은 장옷을 벗고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얼굴이 사뭇 비장했다.
  “그대들을 궁지로 내몬 아비의 죄를, 그런 아비를 방관한 내 죄를… 사죄드리오.”
  “무슨 꿍꿍이냐! 이제 와 사죄해봤자…!”
  “더 들을 필요 없소! 죽입시다! 윤영근이 그놈 때문에 대체 죽은 이가 몇이요?”
  “이제 와 용서를 구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만호가 입을 열자, 난설이 고개를 들어 만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수하기만 했던 새까만 눈에서 생각지도 못한 올곧음이 자리하여 만호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용서를 구하고자 사죄하는 것이 아니오. 아버님과 나의 죄는 크고,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소. 사람 된 도리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마땅히 사죄하고 죗값을 치러야 한다 생각하여 왔을 뿐이오.”
  난설이 품속에서 둘둘 말린 종이를 꺼내어 만호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펼쳐본 만호는 눈을 의심했다. 종이엔 저택의 구조가 그려진 것은 물론, 재물을 보관한 여러 창고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오늘 한양에 가시었소. 아랫사람들은 내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그대들은 뜻한 바를 이루시오.”
  말을 끝마친 난설은 바닥에서 일어나 만호를 비롯한 모두에게 목례하고 돌아섰다.
  습격 이후, 난설은 저택을 침입한 이들이 누구인지 은밀하게 알아보았다. 더는 화초 같은 계집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젠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아비의 그늘에서 벗어나 움직여야 했다.
  ‘채가(家) 만호… 열여섯의 나이에 동비로 몰린 아비를 잃었지… 내 아버님에 의해….’
  나이는 같은데도 대의를 품고 의병을 조직한 만호가 대단하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옳지 않은 것을 보고도 눈 감아 버린 저와 달리, 옳게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거는 용기가….
  ‘속죄의 끝은 역시나… 내 목숨이겠지.’
  죽는 것은 두려웠으나, 그로 인해 또다시 죄를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이 더 두렵고 싫었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나아가는 난설의 걸음은 필사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만호는 사람들을 이끌고 현령의 저택에 다시 침입했다. 전과 달리 저택을 들어오기가 무척 쉬웠다. 이는 난설이 하인들에게 수면제를 탄 술을 먹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피와 눈물이었을, 어마어마한 재산은 어둠을 틈타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
  이후의 일은 만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가산을 모두 잃은 윤영근은 몰락했고 가문은 풍비박산 났다. 빈 현령 자리는 윤영근 못지않은 탐관오리가 차지했다.
  “윤영근이 그놈이 야밤에 도망갔다지 뭐야.”
  “별수 있나, 그 많던 재산 하루아침에 다 잃었으니.”
  “그 덕에 우리는 쌀도 받았고 말일세.”
  거리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던 만호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계획대로 빼앗은 곡식은 전부 나누어줬고, 재물로는 무기를 사서 전력을 가다듬었다.
  작금의 조선은 바꾸기도 전에 다른 나라들에 찢기고 삼켜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니 구해야 했다. 나라가 있어야 바꾸든, 엎든 할 게 아닌가.
  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되었을까. 지척에서 둔탁한 소리가 무척 들렸다. 소리의 근원엔 그 여인이 있었다. 소복 차림의 여인은 거리에 가만히 서서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묵묵히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그때,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날아오는 돌에 머리를 맞으면서도, 여인은 담담한 얼굴로 목례했다. 만호는 발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인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매서운 돌팔매질 속에, 금방이라도 쓰러져 숨을 거둘 것 같아 보였다.



  지당한 일이었다. 이 일대 사람들의 가산을 빼앗고 동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하에 죽여 버린 원수의 핏줄 아닌가. 인과응보였다. 그토록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건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통쾌하지만은 않았다. 돌을 맞고 있는 것이 현령이 아니라 그의 여식이라 그런 걸까?
  ‘사람들을 숱하게 해친 놈의 여식이다. 아버지는 이제 기억 속에만 계시는데… 저 여식이 뭐라고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사람들을 숱하게 해친 호랑이의 목숨을 거둘 때, 아버지도 이렇게 심란하셨을까. 마땅한 일이라 생각했다면 죽은 호랑이를 위해 향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죽어 마땅한데…’
  - 그리 말하지 말거라.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에 죽였다지만, 엄연히 한 생명이다.
  아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생생히 울려 퍼지는 듯했다. 정말 곁에 있는 것만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를 죽인 놈의 여식에게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버지라면… 그러셨겠지요. 그러고도 남으셨겠지요. 벗을 돕다가 그리 가셨으니… 어쩌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윤영근이 그놈을 이해하셨을지도 모르지요.’
  끝내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이 막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저 여인도 이해했을 것이다. 저 여인은 그저 탐관오리의 딸로 태어났을 뿐인지도 모른다고….
  -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싶다만은…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우리라도 조금씩 선의 씨앗을 심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럴 만한 이유…’
  여인이 돌을 맞는 것은 아비의 죄 때문이었으며, 돌을 던지는 이들은 현령에게 피해를 본 이들이 다수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작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은 악을 악으로 갚고 있었다. 악의 씨앗에서 생겨난 악이 맺히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진정 ‘악’인 것일까?
  쉽사리 단정할 수 없었다. 여인은 저와 동지들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몰락할 것을 알면서도 거사를 도와주지 않았던가. 그 끝이 죽음임을 각오하고서….
  이는 여인을 살려준 결과였다. 그 순간, 아비가 말했던 ‘선의 씨앗’의 의미를 깨달은 만호가 눈물을 훔치고 앞으로 나섰다.
  “다들 그만하시오!”
  쩌렁쩌렁한 소리에 사람들의 돌팔매질이 멈췄다. 곡식을 나누어주던 만호를 알아본 사람들은 길을 열어주었다. 만호는 말없이 여인을 부축해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돌팔매질을 당한 난설은 피투성이가 되어,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힘겹게 고개를 들어 만호를 바라보았다.
  “어찌… 나를 구한 것이오.”
  “…악의 끝이 또 악이 되는 것이 싫었을 뿐입니다.”
  “정말… 미안하오. 아버님께서 죽인 이들에 비하면 이 목숨 하나로도 부족할 터인데… 그대의 아버지도….”
  난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 여인을 보며 만호는 비슷한 처지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령이 저지른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도, 살아 있는 매 순간을 그 고통과 싸워야 하는 것도.
  “한참은 부족하지요.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사십시오. 당신에겐 죽음이 더 큰 죄입니다.”
  “…….”
  ‘죄를 씻는 방법이… 죽음은 아닌가…’
  만호의 말이 가슴에 울렸던 난설이 작게 탄식했다. 자신이 죽는다 해서, 아비가 죽인 이들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아직 살아있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은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살아있다면.
  난설은 만호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원수와 그 핏줄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사내. 그를 따라 더 많은 사람을 구하면 저를 끊임없이 짓누르고 짓이기는 죄를 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대가 괜찮다면, 뜻을 함께하고 싶소.”
  반쯤 닫힌 눈 사이로 난설의 결연한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올곧은 눈이었다. 여인의 아비는 죽을 만큼 미워도 여인이라면 악을 선으로 끝낼 수 있을 것만도 같았다. 만호는 말없이 난설을 둘러업고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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