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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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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중국신화와 한국문화의 만남

중국신화와 한국문화의 만남

- 그 개괄 및 전망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정재서
 
 
 
들어가는 말
  목전의 글로컬(Glocal)한 상황에서 세계화는 “세계적 상호 연결성의 심화를 의미하며 움직임과 혼합, 접촉과 연결, 지속적인 문화적 상호 작용 및 교환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를 현시하며 “자본·사람·상품·이미지·이데올로기의 유동과 문화적 흐름”으로 특징화된다.01 이 과정에서 문화 제국주의 담론이 지적한 대로 강대국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의한 문화상품, 기호, 관습 등에 대한 제1세계 중심의 획일화가 진행되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긴 하지만, 또 다른 견지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문화의 역류 현상으로 인한 제1세계 문화의 주변화, 혼종화 현상이다. 이러한 문화접변(文化接變, acculturation)의 시점에서 문화표준(文化標準, cultural standard)을 누가 선점하느냐의 문제는 국가 경쟁력과 관련하여 초미(焦眉)의 관심사로 부상하였다.02 최근 한중 간(韓中間)에 가열되었던 이른바 ‘문화갈등’ 사안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거시적으로는 상술한 현실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차제에 과거 한중 간의 문화 관계를 소구(溯究)해보는 일은 마치 길을 잃었을 때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길을 찾아보듯이 문화갈등을 풀기 위한 유용한 행위가 될 것이다.
 중국신화와 주변문화와의 관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신화는 단순히 한 종족만의 신화가 아니라 오랜 옛날 수많은 종족들이 활동했던 대륙의 다원적인, 상호텍스트적인 문화 상황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비록 중국의 중심민족인 한족에 의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 할지라도 그 속에는 주변민족의 문화가 적지 않게 담겨 있다. 즉 중국과 주변은 많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에버하르트(W. Eberhardt)의 이른바 ‘지방문화(Local Cultures)론"은 이를 지지하는 유력한 가설이다.03 둘째, 역사시대 이후 중국신화는 우세한 정치,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주변문화에 대해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그 결과 주변문화에는 중국신화의 요소가 상당히 수용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신화와 주변문화는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서로의 문화를 주고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 의거하여 우선 중국신화에 내재된 한국문화를 살펴본 후 그러한 상상력이 한국문학, 한국민속, 한국고고, 미술 등의 방면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개관해 보고 한중 양국문화에 대한 일국주의(一國主義)적 관점을 지양한 제3의 입장을 사유해보고자 한다.

Ⅰ. 중국신화에 표현된 한국문화
  중국신화에는 주변문화의 요소가 적지 않게 담겨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문화와 관련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은(殷) 및 동이계(東夷系) 문화의 정보를 많이 보존하고 있는 『산해경(山海經)』에는 고대 한국과 관련된 기록들이 도처에 남아있다. 가령 고조선과 관련된 내용으로 생각되는 다음의 기록을 보자.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其人, 水居, 偎人愛之.)
04
 
 
  중국에서 동해는 지금의 서해이고 북해는 발해이니 우리는 이로 미루어 고조선의 영토가 지금의 평양 근처가 아니고 발해만 연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이 짤막한 기록은 고대의 우리 민족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데 첫째,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다”라는 구절은 우리 민족의 천신(天神) 숭배관념 혹은 천손(天孫) 의식 등을 표현한 듯하고 둘째, “물가에 살며”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일찍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물가에 모여 사는 한민족의 습성을 표현한 것으로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셋째,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라는 구절을 보건대 당시 중국인의 고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양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의 기록도 고대 한국을 지칭한 것으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글이다.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다.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시든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 華草, 朝生夕死.)
05
 
 
  청대의 소설 『경화연(鏡花緣』에서 희화화된 정경으로 묘사된 바 있는 군자국(君子國)은 사실 예로부터 고대 한국으로 암암리에 지칭되어왔던 나라이다. “의관을 갖추고”,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는” 정도의 문화 수준을 지니고 훈화초(薰華草) 곧 무궁화나무가 자라는 나라로서 고대 한국은 인식되어왔던 것이다. 그러한 인식은 후대의 다른 문헌으로부터도 지지되고 있다.
 
 
동이는 대(大)를 따랐다. 대인이다. 이(夷)의 풍속이 어질고 어진 자는 오래 살기 때문에 군자국과 불사국이 있다.
   (東夷從大, 大人也;夷俗仁, 仁者壽, 有君子、 不死之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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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국에는 무궁화가 많이 피는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 낭야로부터 3만리 떨어진 곳이다.
   (君子之國, 多木堇之華, 人民食之. 去琅邪三萬裏.)
07

  
  동이 민족의 나라, 무궁화가 많이 피고 중국의 산동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리고 풍속이 야만스럽지 않은 곳, 이러한 몇 가지 요소들을 종합해 볼 때 중국의 주변에서 정황이 가장 비슷한 나라로 고대 한국이 거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산해경』의 기록을 토대로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근역(槿域)’이라는 별칭(別稱)도 생겼으며 근대에 와서 국화를 무궁화로 제정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길지 않은 글이지만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산해경』에는 고대 한국 주변의 소국들에 대한 기록도 있다. 가령 숙신(肅愼)과 관련된 다음의 기록을 보자.
 
 
대황의 한 가운데에 불함이라는 산이 있고 숙신씨국이 있다. 비질이 있는데 날개가 넷이다. 짐승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한 것이 있는데 이름을 금충이라고 한다.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肃慎氏之国. 有蜚蛭, 四翼有蟲, 獸首 蛇身, 名曰琴蟲.)
08  
                
  
  불함은 백두산의 옛 이름이다. 숙신국은 백두산 근처에 있는 소국으로 거기에는 비질이라든가 금충이라든가 하는 이상한 동물들이 산다고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순 없지만 이 글이 아마도 백두산 일대의 동물 생태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아닐까 해서이다.
  다음으로 중국신화에 남아있는 우리말의 흔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신화에서의 유명한 기상신인 바람의 신 풍백(風伯)은 그 전에는 비렴(飛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비렴의 생김새는 다음과 같다.
 
 
비렴은 신령스러운 새로 능히 바람의 기운을 불러온다. 몸은 사슴과 같고 머리는 참새 같은데 뿔이 있고 뱀꼬리에 무늬는 표범과 같다.
   (飛廉, 神禽, 能致風氣者, 身似鹿, 頭如雀, 有角而蛇尾, 文如豹.)
09
 
 
  비렴의 몸은 대체로 사슴과 새의 합체(合體)라고 볼 수 있다. 사슴과 새 모두 빠르게 돌아다니는 특성을 지녔고 이러한 특성은 바람의 신의 이미지에 들어맞는다. 한국과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비렴이라는 명칭이 한국어 ‘바람’의 고어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중국의 신화학자 손작운(孫作雲)도 그 중의 한 사람인데 그는 구체적으로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신수(神獸)를 비렴으로 지목한 바 있다.10
 
 
 

Ⅱ. 한국문학에서의 수용
 
1. 시가문학
    백제 때 『산해경』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중국신화는 우리 민족에게 잘 알려졌을 것이다. 신화는 특히 상상력을 중시하는 문학에서 쉽게 수용되었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문헌자료의 한계성을 감안할 때 중국신화의 한국 시가문학에서의 수용은 과거제가 시행되어 전업 문인이 증가하고 한문학이 지식계층 사이에서 교양으로 일반화되는 고려시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무인정권 시대에 오세재(吳世才), 이인로(李仁老) 등과 함께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 폭압적인 현실로부터 일탈하려 했던 임춘(林椿)의 「기몽(記夢)」이란 작품을 통해 중국신화의 영향을 살펴보자.
 
 
我夢乘風到月宮,        꿈 속에 바람을 타고 월궁에 이르러,
排門直捉姮娥問.        문을 밀치자 곧장 항아를 붙들고 물었네.
奈何使爾司春桂,        어찌하여 그대에게 계수나무를 맡겼더니
與奪不公人所慍.        주고 뺏음이 불공평해 사람들이 성을 내나.
低頭再拜謝我言,        머리 숙여 재배하고 내게 사과해 말하기를
妾不愛憎皆委分.       제가 좋아하고 미워해서가 아니라 모두 분수대로입니다.
紫府今書君姓字,        자부에는 지금도 그대의 이름이 써 있거니
曾陪王母遊閬苑.        과거에는 서왕모를 모시고 곤륜산에서 놀기도 했었지요.
也爲輕狂多負過,        경박한 짓을 해서 잘못을 많이 저질러
帝令譴謫方知困.        상제의 명으로 귀양 보내져 고생 좀 하게 된 것이지요.
從此文星不在天,        이부터 문창성이 하늘에서 없어졌지만
世人誰識塵中隱.        세상의 누구도 속세에 숨은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四海詩名三十秋,        천하에 시명을 날린 지 30년
燒丹金鼎功成近.        연단의 공업(功業)도 거의 이루셨은 즉
留着高枝且待君,        높은 가지 남겨놓고 그대를 기다릴 터이니
明年折取應無恨.        내년에 꺾어 가져도 유감은 없을 겁니다.
11
 
 
  꿈속에서 월궁(月宮)의 항아(姮娥)와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시이다. 물론 가설적인 내용이다. 과거에 급제 못한 원인을 항아에게 따져 물었더니 본래 서왕모와 함께 노닐었던 문창성(文昌星)이었으나 잘못을 저질러 하계에 떨어져 고생하고 있는 것일 뿐 곧 출세하게 될 것이라는 답변을 통해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심정을 표명하고 있다. 항아신화, 서왕모신화, 성수신화(星宿神話) 등의 내용적 특성을 솜씨 있게 안배하여 시상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작업은 중국신화 전반에 대한 온전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단학파(丹學派) 시인들의 선시(仙詩)와 16, 17세기에 일기 시작한 당시풍(唐詩風) 및 유선시체(遊仙詩體)의 유행으로 중국신화의 수용이 자못 활발해진다. 심의(沈義)의 「반도부(蟠桃賦)」, 임전(任錪)의 「독한무제고사(讀漢武帝故事)」, 신흠(申欽)의 「독산해경(讀山海經)」등이 본격적으로 중국신화를 제재로 다룬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 외의 수많은 유선시에서도 중국신화의 수용이 빈번한데 이것은 유선의 제재들이 사실상 중국신화의 모티프와 연속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량의 유선시를 창작했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瓊花風軟飛靑鳥  옥꽃 위로 미풍이 불자 파랑새가 날고
王母麟車向逢島  서왕모의 기린 수레는 봉래섬으로 향하네.
蘭旌蘂皮白鳳駕  목란깃발 꽃술 배자의 흰 봉황 수레를 몰거나
笑倚紅蘭拾瑤草  붉은 난간에 기대어 옥풀을 줍기도 하지.
 
 
天風吹碧翠霓裳  푸른 무지개 치마 바람에 날릴 새
玉環瓊佩聲丁當  옥고리 패옥 소리는 댕그렁댕그렁
素娥兩兩鼓瑤瑟  선녀들 쌍쌍이 옥거문고 타자
三花珠樹春雲香  삼주수(三珠樹주)위에 봄 구름이 향기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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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 생가(2014년 10월)
 
 
  허난설헌은 이러한 중국신화를 소재로 한 시가 창작을 통해 초월적인 경지를 음영(吟詠)함으로써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초탈하려고 하였다.
  대부분의 유선시를 살펴보면 중국의 신화적 존재 중 서왕모의 수용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서왕모 숭배가 절정에 달했던 당대(唐代) 시가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신화를 수용하더라도 조선의 자주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있어 이채롭다. 정두경(鄭斗卿)의 작품이 그것이다. 
 
 
東海三神在  동해의 삼신산이 이곳에 있으니
中原五嶽低  중원의 오악도 낮아 보인다.
群仙爭窟宅  뭇 신선들 자리 잡고 싶어 안달이니
王母恨居西  서왕모도 서쪽에 거주함을 한탄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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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자는 금강산을 가송(歌頌)하는 이 시에서 금강산을 삼신산과 동일시하고 서왕모가 거주하는 곤륜산보다 낫다고 호언(豪言)한다. 단학파 시인으로서 선도의 자생설을 신봉하는 그의 시에는 반존화적(反尊華的) 의식이 넘친다.
 
 
2. 서사문학
  신화와 고소설을 중심으로 중국신화가 서사문학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단군신화에서 환웅과 더불어 하강했던 풍백,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은 중국신화에서 저명한 기상신(氣象神)들이다. 또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주몽의 외할아버지인 하백(河伯)도 본래 황하의 신이니 중국신화의 신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신화에서도 동이계의 신들이어서 고대 한국 민족과는 본래부터 친연(親緣) 관계가 잇는 신들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국신화에도 등장했을 것이다.
  중국신화의 수용은 이처럼 단군신화, 고구려 건국신화 등의 문헌신화에서 뿐만 아니라 무속신화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가령 무가 「성조(成造)풀이」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와씨 후(後)에 나서 오색(五色)돌 고이 갈아 이보천(以補天)하신 후에 여공제기(女工諸技)가르치며 남녀의복(男女衣服) 마련하고
 
 
  그리고 제주도 창세신화인 「베포도업침」에서는 세상을 창조해낸 이승의 열다섯 신 모두가 태호(太皥), 여와(女媧), 염제(炎帝), 황제(黃帝), 소호(少皥) 등 중국신화의 주요 신들이어서 주목을 끈다.
  다음으로 고소설의 경우 신화와는 동일한 서사문학의 범주에 속해서인지 중국신화의 수용이 훨씬 다채롭게 이루어진다. 우선 전적으로 중국신화를 제재로 취하고 제목마저 그렇게 정한 작품으로는 소수이지만 작자미상의 『강태공전(姜太公傳)』과 『여와전(女媧傳)』 등을 들 수 있다. 『강태공전』은 강태공이 도술로써 포악한 주왕(紂王)이 다스리는 은나라를 정벌하고 주왕의 재상이 되기까지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로 명대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의 내용과 흡사하다. 『여와전』은 여신 여와가 문창성을 시켜 현부열녀(賢婦烈女)들이 황제로 참칭하는 것을 징벌하고 관음보살을 굴복시켜 유교의 불교에 대한 우위를 입증시킨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의 가치를 강력히 내세운 소설로 신화적 내용이 위주는 아니지만 여와가 소설의 발단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중국신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엿볼 수 있다.
  그밖의 고소설들에 대해서는 중국신화를 발단으로 삼은 구성적 측면, 원형으로 취한 구조적 측면, 단순히 모티프를 차용한 소재적 측면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를 예로 들어본다.
 송도(松都)의 홍생(洪生)은 달밤에 평양의 부벽정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왕녀를 만난다. 그녀는 나라가 망한 후 신인(神人)에게 이끌려 선계를 유람하다가 월궁의 항아를 만난 일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루는 가을 하늘이 밝고 청량하며 달빛이 물처럼 깨끗하여 달을 보는 순간 갑자기 멀리 날아오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달나라에 올라 광한전의 청허부에 들어가 수정으로 만든 궁궐에서 항아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항아는 제가 정절이 높고 글도 잘한다며 "인간 세상의 선경은 복 있는 땅이라 해도 모두 먼지에 불과합니다. 푸른 하늘을 밝으며 흰 난새를 타고 붉은 계수나무의 맑은 향을 맡으며 찬 달빛을 몸에 걸치고 천상의 궁전에서 노닐며 은하수에서 헤엄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저를 가까이서 시중드는 시녀로 삼아 곁에 두었습니다. 그 즐거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오늘밤 문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일어나 인간 세상의 고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자연은 옳고 인간은 그릇되어서 어느새 흰 달이 전쟁의 흔적을 가리고 이슬은 더러운 풀 더미를 씻어 놓았더군요. 맑은 하늘을 하직하고 내려와 조상의 묘에 참배한 뒤 강가 정자에서 놀며 마음속 회포를 펴려고 했는데 마침 글 하는 선비를 만나게 되니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함부로 그대의 주옥같은 글에 의지하여, 솜씨는 없지만 글을 조금 써보았습니다. 감히 할 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제 심정을 편 것이랍니다.”
 
(一日, 秋天晃朗, 玉宇澄明, 月色如水, 仰視蟾桂, 飄然有遐擧之志. 遂登月窟, 入廣寒淸虛之府, 拜嫦娥於水晶宮裏. 嫦娥以我貞靜能文, 誘我曰: ‘下土仙境, 雖云福地, 皆是風塵, 豈如履靑冥驂白鸞, 把淸香於丹桂, 服寒光於碧落, 遨遊玉京, 遊泳銀河之勝也?’ 卽命爲香案我, 至周旋左右, 其樂不可勝言. 忽於今宵, 作鄕井念, 下顧蜉蝣, 臨睨故鄕, 物是人非, 皓月掩煙塵之色, 白露洗塊蘇之累, 辭下淸宵, 冉冉一降, 拜於祖墓, 又欲一玩江亭, 以暢情懷. 適逢文士, 一喜一赧, 輒依瓊琚之章, 敢展駑鈍之筆, 非敢能言, 聊以敍情耳.)14
 
 
  그녀는 홍생과 즐겁게 시를 짓고 논 후 홀연히 천상으로 돌아간다. 후일 홍생의 꿈에 나타난 그녀는 홍생이 견우성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음을 통보하고 홍생은 얼마 후 시해선(屍解仙)이 되어 죽는다. 중국신화에는 항아나 직녀 등 여신들이 하계로 내려와 인간 남성과 인연을 맺는 인신연애(人神戀愛) 혹은 선녀하범(仙女下凡) 유형의 스토리가 있다. 「취유부벽정기」에서는 중국신화의 이러한 유행을 수용하여 작품을 성공적으로 구조화했음을 알 수 있다.
 

Ⅲ. 한국민속에서의 수용

  중국신화의 상상력이 한국 민속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방면에 걸쳐 말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벽사(辟邪)와 사명신앙(司命信仰)의 측면에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벽사
  중국에서 벽사를 위해 숭배되던 몇 명의 신들이 조선시대까지 우리 민속에 남아있음을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단옷날에 치우의 이름과 형상을 그린 부적을 붙여 질병을 물리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무서운 전쟁의 신인 치우의 힘을 빌려 병의 기운을 몰아내려한 것이리라. 다시, 『조선도교사』를 보면 입춘 날에 집집마다 대문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 : 강태공이 여기에 있다)”라는 글귀를 써 붙였다고 하는데 훌륭한 도술을 지닌 강태공이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 주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신(門神) 숭배의 민속이외에도 귀신이나 요괴를 쫓는 데에는 복숭아 혹은 복숭아나무가 효험이 있다고 믿어졌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관련 신화가 있다. 한 가지는 영웅 예(羿)가 제자 봉몽(逢蒙)에게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맞아죽은 후 귀신의 우두머리로 부활하였는데 그 후에도 여전히 복숭아나무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역시 귀신의 우두머리인 신도(神荼)와 울루(鬱壘)가 귀신의 소굴인 도삭산(度朔山)의 거대한 복숭아나무 곁에 서서 귀신의 출입을 감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서왕모(西王母)의 선도(仙桃) 복숭아의 이미지 때문인데 먹으면 장생불사한다는 신성한 복숭아가 사악한 기운을 쫓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신화들의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무당들이 귀신을 쫓을 때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 사용한다. 왜냐하면 도삭산의 복숭아나무의 동북쪽 가지가 귀신들이 드나드는 문 곧 귀문(鬼門)인데 그 곁을 항시 신도와 울루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복숭아를 놓지 않는 것은 복숭아의 벽사능력 때문에 조상귀신들이 겁이 나 오시지 못할까 염려해서이다.
 
 
2. 사명신앙
  사람의 목숨을 관장하는 신을 사명신이라고 부른다. 이들 사명신으로는 죽음을 맡은 북두칠성을 비롯, 인간의 잘못을 천제에게 주기적으로 고하여 수명을 깎게 만드는 조왕신(竈王神)이 있고 신은 아니지만 조왕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삼시충(三尸虫) 등이 있다. 이 중 북두칠성에 대한 숭배는 중국신화의 영향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우리의 무속 전통을 통해 성립된 것 같다. 이미 고인돌의 돌판에 북두칠성을 새긴 흔적이 발견된 바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북두칠성의 존재라든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사람이 죽어 매장할 때 칠성판(七星板)을 까는 습속은 북두칠성 숭배의 역력한 증거들이다.
  다음으로 조왕신은 조신(竈神), 조군(竈君) 혹은 부뚜막신, 아궁이신, 화덕신, 부엌신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북방의 큰 신 전욱(顓頊)의 아들 궁선(窮蟬)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궁이의 불을 비롯, 부엌의 모든 일을 맡아보는 신이기 때문에 본래는 불의 숭배와 관련된 여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혹은 그녀는 부엌에 있는 관계로 집안의 대소사를 낱낱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식구 개개인이 1년간 잘못한 모든 일들을 섣달 스무사흘 혹은 나흘 되는 날 밤 하늘에 올라가 천제에게 고해 바쳤다. 천제는 조왕신의 보고를 듣고 난 후 지은 죄의 무게에 따라 사람의 수명을 깎았다고 한다. 또 삼시충이라고 하는 세 마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사람의 몸속에 기생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나름대로 일러바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것들은 60일 만에 한번, 즉 매 경신일(庚申日) 밤에 하늘에 올라가 숙주인 인간의 악행을 보고하였다. 이들의 행위에 의해 수명이 깎일까봐 사람들은 조왕신의 환심을 사고자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삼시충을 제거하는 약을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실천하기 쉬운 방법은 이들이 하늘에 올라가는 날 밤, 잠을 자지 않는 일이었다. 이들은 사람이 잠들 때에만 승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민속에도 조왕신, 삼시충 등과 관련된 행사가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경신일(庚申日) 밤에 흥청거리며 놀거나 글을 읽으며 밤을 새우는 ‘수경신(守庚申)’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일부 농촌에서는 근래까지 조왕 단지라고 해서 부뚜막에 정화수를 담은 단지를 모셨다. 아직도 남아있는,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안자고 버티는 일도 조왕신, 삼시충 등과 관련된 사명신앙에서 유래한 습속이라 할 것이다.
 
                                                 
Ⅳ. 한국고고, 미술 자료에서의 수용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순국한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기린 남해 충렬사(忠烈祠)의 현판에는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아마 중국신화를 모르면 이 성어(成語)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보천욕일’은 뚫어진 하늘을 기운 대모신(大母神) 여와와 매일 해를 목욕시켜 세상을 새롭게 비추게 하는 태양신 희화(羲和)의 신화에서 나온 성어로  충무공을 두고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이 “천지를 주름잡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공적이 있다(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고 상찬(賞讚)한 글에서 따온 말이다.
 

  시골에 가보면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무덤 앞에 세워진 큰 비석을 볼 수 있다. 신도비(神道碑)라고 하는 이 비석은 거북이가 비신(碑身)을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인데 우리는 그 모습으로부터 여와가 거북이의 네 발을 잘라 하늘을 받치게 했던 신화적 사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신화는 이 땅의 도처에 유물로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고고 자료와 미술 자료로 나누어 이것들에 표현된 중국신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고고 자료
  고대 한국의 고고자료 중 중국신화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 한 것들 중에서 우선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발굴된 매지권(買地券)과 동경인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紋鏡),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등을 예로 들어보겠다. 
  매지권은 피장자가 지하세계의 신으로부터 묘지를 구입한다는 내용을 적은 글, 일종의 토지매매계약서로서 무녕왕릉의 경우 청회색 섬록암(閃綠岩)에 새겨져 있었다. 구체적 내용은 무녕왕이 돈 1만 문(文)으로 토백(土伯) 등으로부터 묘지를 구입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언급된 토백은 중국의 남방 지하세계를 관리하는 신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로 중국의 남조(南朝) 국가들과 교류를 했던 백제에서 중국 남방의 명계(冥界)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같이 출토된 방격규구신수문경, 의자손수대경 등은 한대의 동경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들인데 무덤안의 잡귀와 사악한 기운을 구축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한대 이래 위진남북조 시기에 걸쳐 절정에 달한 동경의 벽사 능력에 대한 믿음과 상관된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백제금동대향로, 일명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와 경주의 안압지(雁鴨池)이다.
  1993년 부여의 백제 공방(工房) 터에서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삼신산 중의 하나인 봉래산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위에는 날개 돋친 우인(羽人) 곧 신선들과 상서로운 동물들이 새겨져 낙원의 정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울러 안압지에는 세 개의 섬이 조성되었는데 그것들은 발해에 떠있는 봉래, 방장, 영주 세 개의 신령스러운 산들을 상징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곤륜 신화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 낙원신화라 할 삼신산 신화가 한반도에 일찍부터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조선 시대의 유물인 삼척의 퇴조비(退潮碑)를 예로 들어보자. 숙종 때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許穆)이 삼척 부사로 재직 시 동해의 해일을 막기 위한 주술적 시도로서 건립된 이 비석에는 허목이 지은 「동해송(東海頌)」이라는 운문이 새겨져 있다.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진 비문은 마치 부적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비석이 세워진 후 사나운 파도가 잠잠해졌고 해일의 피해도 없어졌다고 한다. 비문은 다양한 신과 괴물들을 묘사하면서 동해와 이역의 신비한 풍광을 노래하고 모든 것이 성군의 법도에 따라 잘 다스려지리라는 취지를 담고 있는데 그 중의 한 구절을 음미해보자.
 
 
天吳九首,   머리 아홉인 천오와
怪夔一股,   외다리 괴물 기는
飇回且雨.   회오리바람과 비를 일으킨다.
 
 
  천오(天吳)와 기(夔)는 모두 『산해경』에 등장하는 신과 괴물인데 천오는 조양곡(朝陽谷)의 수신이고 기는 유파산(流波山)에 사는 괴물로 황제에게 잡혀가 가죽이 벗겨져 북이 된 바 있다. 이들 이외에도 「동해송」에는 대택(大澤), 양곡(暘谷), 희백(羲伯), 교인(鮫人), 부상(扶桑), 흑치(黑齒) 등 『산해경』에 나오는 지명, 신, 인종 등이 다수 인용되어 작자 허목이 중국신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 위에서 그것을 탁월하게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안압지
 
 
 
2. 미술 자료
  고대 한국의 미술 자료 중 중국신화와 관련된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라 할 수 있다. 우선 염제 신농씨는 고구려인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신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오회분(五盔墳) 사호묘와 오호묘 등에 3번 이상이나 출현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우리의 귀에 익숙한 견우 직녀 신화도 다소 만화 같은 모습으로 덕흥리(德興里) 고분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삼실총(三室塚) 벽화를 보면 몸에 뱀을 휘감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포즈를 취한 인물이 있는데 과연 누구일까? 그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산해경』의 다음 인물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보가 태양과 경주를 하였는데 해질 무렵이 되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 황하와 위수의 물을 마셨다. 황하와 위수로는 부족하여 북쪽으로 대택의 물을 마시러 갔다가 도착하기도 전에 목이 말라 죽었다. 그 지팡이를 버렸는데 그것이 변하여 복숭아나무숲이 되었다.
(夸父與日逐走, 入日. 渴欲得飮, 飮于河渭. 河渭不足, 北飮大澤. 未至, 道渴而死. 棄其杖, 化爲鄧林.)
15
 
 
 
 
  태양과 경주를 했다가 중도에 목이 말라 죽은 거인 과보가 삼실총 역사의 저본이다. 태양과 적대 관계에 있는 과보는 신화적으로 볼 때 지하세계의 신이다. 과보는 또한 치우와 더불어 황제에게 항거하였던 동이계의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동이계 종족인 고구려인의 지하세계를 지키는 신으로 출현한 것이다. 과보는 삼실총뿐만 아니라 경북 영주군 읍내리 벽화에서도 서역풍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음에 시선을 덕흥리 고분벽화로 돌려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기묘한 새가 눈에 들어온다. 곁을 보니 ‘만세(萬歲)’라는 묵서(墨書)가 있어 이 새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다. 만세라는 인면조(人面鳥)는 문자 그대로 만년까지 산다는 상서로운 새이다. 그런데 이 새의 기원은 무엇일까? 역시 『산해경』을 살펴보면 만세보다 소박한 모습의 인면조들이 앞서 존재해 있다. 귀양살이를 예고하는 주(鴸), 가뭄을 알려주는 옹(顒), 전쟁을 예시하는 부혜(鳧徯) 등의 새가 그것이다. 가령 주에 대한 기록을 보자.   
 
 
남차이경의 첫 머리는 거산이라는 곳인데... 이곳의 어떤 새는 생김새가 올빼미 같은데 사람과 같은 손을 갖고 있고 그 소리는 마치 암메추리의 울음과도 같다. 이름을 주라고 하는데 제 이름을 스스로 불러대며 이것이 나타나면 그 고을에 귀양가는 선비가 많아진다.         
(南次二經之首, 曰柜山...有鳥焉, 其狀如鴟而人手, 其音如痺, 其名曰鴸, 其名自號也, 見則其縣多放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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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산해경』의 원시 인면조들은 귀양, 가뭄, 전쟁 등 흉사의 징조가 되는 불길한 새들이어서 덕흥리 고분의 만세의 상서로운 이미지와는 자못 상위(相違)가 있다. 아마도 원시 인면조는 상당한 세월을 거치면서 마치 서왕모의 경우처럼 이미지상 일대 변신을 이룩한듯이 보인다. 즉 흉조로써 흉한 일을 물리칠 수 있다는 관념상의 전환이 흉조를 길조로 인식하게 되었고 만년까지 오래 사는 상서로운 새 만세를 낳았을 것이다.

 
 
  끝으로 조선 시대의 미술 자료인 「반차도(班次圖)」를 예로 들어보자. 「반차도」는 정조(正祖)의 화성(華城: 지금의 수원) 행차를 김홍도(金弘道)) 등 화원들을 시켜 세세히 그린 그림이다. 행차의 규모와 인원 배치 등을 요연(了然)히 볼 수 있는 이 그림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대열의 지표가 되는 수많은 깃발 중에서 백택기(白澤旗)와 등사기(騰蛇旗)이다. 백택과 등사 이 신령스러운 두 동물은 모두 신중의 신 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백택은 황제에게 천하의 모든 귀신과 요괴에 대해 설명해 준 바 있으며 등사는 황제 행차 시에 호위를 담당한 바 있기 때문이다. 화성 행차에서 이들의 깃발을 내건 것은 행차 중에 범접하는 잡귀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려는 상징적 조치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중의 신 황제의 권능이 후대 제왕의 행사에 모델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훨씬 후대의 주변국인 조선에까지 면면히 유전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맺는 말
  중국신화에는 고대 한국문화의 일부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정황은 다른 주변 문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신화는 상당 부분 동아시아 주변 문화의 요소를 흡수한 후에 상이한 여러 요소들을 조정, 융합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상호텍스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반면에 한국문화는 장구한 시기에 걸쳐 대륙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아왔는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신화는 우리의 문학, 민속, 고고, 미술 등 각 방면에 대해 심원한 영향을 미쳤고 일상화, 내면화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화 비교를 통해 얻어진 두 가지 결론이 시사하는 것은 중국과 한국은 문화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같은 내용을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친속(親屬) 관계에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근대 이후 성립된 배타적인 민족, 국가 등의 개념으로 양국의 문화를 준별(峻別)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며 본래 신화의 경역(境域)이 그러하듯 동아시아 상상력 혹은 동아시아 문화라는 넓은 단위에서 사고하고 호혜적인 관점에서 차원 높은 문화의 창달(暢達)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 본고는 졸저 『중국신화의 세계』(돌베개, 2011)의 일부 내용을 전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01 Jonathan Xavier Inda & Renato Rosaldo, "Tracking Global Flows"The Anthropology of Globalization: A Reader(Boston: Blackwell Publishers, 2002), pp.4-5.
02 김기덕,「미디어 속의 韓中日 젊은이들-인터넷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제2회 한중일  문화 국제 심포지엄 발표논문집』(서울: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2009), p.70, 조영남,「한중 관계의 발전과 규범 충돌: 현황과 과제」 『한국정치연구』(2010), 제19輯 제2號, pp.180-181 등 참조.
03 에버하르트는 고대 중국문화를 지방문화의 상호구성체로 파악한다. Wolfram Eberhard, “Introduction" The Local Cultures of South and East China(Leiden: E. J. Brill,  1968)
04 『山海經』 「海內經」.
05 『山海經』 「海外東經」.
06 許愼, 『說文解字』, 卷4.
07 『藝文類聚』, 卷89.
08 『山海經』 「大荒北經」.
09 蔣冀, 『山帶閣注楚辭』에 인용된 『三輔黃圖』.
10 孫作雲, 『天問硏究』(北京: 中華書局, 1989), p.138.
11 林椿, 『西河集』, 卷1, 「記夢」.
12 許楚姬, 『蘭雪軒詩集』 「望仙謠」.
13 鄭斗卿,『溫城世稿』「金剛山」.
14 번역은 김시습·구우, 『금오신화·전등신화』(미다스북스, 2010), 김수연 등 편역에 실린 것을 따름.
15 『山海經』「海外北經」.
16 『山海經』「南次二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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