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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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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3. 저(氐) 별을 관장하는 오한(吳漢) 신명(1)

3. 저(氐) 별을 관장하는 오한(吳漢) 신명(1)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저수(氐宿)

  저수(氐宿)는 28수 가운데 세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세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동물은 오소리이다.01 저수는 동방 청룡 칠수 전체를 용으로 볼 때 용의 가슴 또는 앞발에 해당한다.    
  저수를 의인화하여 저수성군(氐宿星君)이라고도 부르는데 손에 장모(長矛), 즉 자루가 긴 창을 지닌 모습으로 형상화 되며 박학다식(博學多識)으로 알려져 있고 얼굴은 오소리 형상이라 한다.
 
 
 
후한의 건국공신 오한

  저(氐) 별을 관장하는 오한(吳漢, ?-44)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02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CE 8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성립된 한[前漢, BCE 206-CE 8]은 외척 왕망(王莽, BCE 45-CE 23)03의 궁정쿠데타에 의해 몰락하고 신(新, 8-23)이 성립된다. 그러나 왕망의 신나라는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신나라가 몰락하고 다시 한을 세운 이가 바로 후한의 초대황제 유수였다.
  오한은 자(字)가 자안(子顔)이고 남양(南陽)의 완(宛)04 사람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심부름꾼에서 출발했지만 현(縣)의 정장(亭長)05까지 올랐다. 오한은 왕망(王莽) 말엽에 법(法)을 범하게 되어 빈객(賓客)으로 어양(漁陽, 현재 북경시 密雲縣)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망명 생활이 길어져 준비해 간 돈이 모두 떨어지자 오한은 말 장사를 하면서 연(燕)과 계(薊, 현재 北京 西南) 지방 사이를 왕래했는데 가는 곳마다 호걸들과 친분을 쌓았다.
  전한을 타도하고 신을 세운 왕망이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중국 전역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때 남양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이 한 황실의 종친인 유현(劉玄, ?-25)을 경시제(更始帝)06로 옹립하고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였는데 오한이 있던 지역에 파견된 경시제의 사자(使者)는 한홍(韓鴻)이었다. 한홍이 하북(河北)을 순시하던 때에 어떤 이가 오한을 천거했다.
  “오자안은 기사(奇士)입니다. 그와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한홍이 오한을 만나 보고서 매우 흡족해 했다. 한홍은 전권을 위임받은 사자였다. 한홍은 황제의 명을 대리하여 오한을 안락령(安樂令, 북경 순의현의 수장)에 임명했다.
  시국은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유수가 곤양대전(昆陽大戰)에서 왕망의 대군을 격파한 것이 알려지면서 더 많은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신나라의 허약함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면서 각 지역의 야심가들은 이틈을 타 스스로 세력을 증식하여 장군, 왕, 천자를 자임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의 민심이 한나라의 부흥을 고대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한단(邯鄲)에서 점이나 치고 있던 왕랑(王郞)이 봉기한 것도 이때였다. 왕랑은 자신을 전한의 11대 황제인 성제(成帝, 재위 BCE 32-7)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주장했다. 그도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당시의 민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었는데 왕랑의 선전은 아주 잘 먹혔다. 왕랑은 순식간에 세력을 모아 곧 천자에 올랐다. 그리고 천자의 이름으로 주변 제군(諸郡)에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많은 군현이 여기에 순응했다. 
  이렇게 왕랑의 봉기에 즈음하여 오한이 살고 있던 북주(北州)는 소란스러웠다. 오한은 유수의 훌륭함을 들어왔던 터라 이 기회에 그에게 가고자 했다. 오한이 태수 팽총(彭寵, ?-29)07을 설득하였다.
  “어양(漁陽)과 상곡(上谷)의 돌격 기병대는 그 명성이 천하에 자자합니다. 태수께서는 어찌 두 군의 정예부대를 합하여 유공(劉公, 유수)을 따라 한단(邯鄲)을 치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한단은 왕랑의 근거지였다. 오한의 주장은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왕랑 또한 많은 반란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왕랑을 성제의 후손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는 불가한 일이다. 한나라의 적통을 이은 이에게 칼을 들이댈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반역이었다. 문제는 당시 오한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왕랑의 주장에 동의했다는 점이다. 오한의 주장에 팽총이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도 이러한 여론 때문이었다. 
  오한은 태수와 관속들의 생각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꿔보고 싶었지만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한은 팽총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에 잠긴 오한이 밖으로 나와 길을 보니 유생(儒生)처럼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는 걸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국적인 반란과 잦은 기근의 여파로 양곡의 생산과 유통이 힘들어지면서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고, 길에는 걸식하는 이들이 가득하였다. 오한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들여 먹을 것을 내어주고 사람들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고 가는지 물었다.
  그 유생의 말은 오한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에 의하면 유수가 지나가는 곳마다 모든 군현(郡縣)이 그에게로 귀속되는 바이지만 한단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왕랑)은 사실 유씨(劉氏)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생의 말은 오한이 기대한 대답이었다. 왕랑이 유씨가 아니면 그의 정권은 존립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한은 곧바로 유수의 명령을 가장하여 어양에 격문(檄文)을 띄우고 한편으로는 그 유생으로 하여금 태수 팽총에게 가게 하여 들은 바를 낱낱이 얘기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유생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팽총이 유생의 말을 듣고 정말 그렇겠다고 여기고 오한으로 하여금 어양의 군대와 상곡의 여러 장수들을 합군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했다. 오한은 가는 곳마다 왕랑의 장수들의 무찔렀다. 오한이 기세를 몰아 돌격 기병의 선봉에서 기마대를 지휘하며 한단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유수가 당도한 것은 한단성이 이미 함락된 이후였다. 유수는 광아(廣阿)에 이르러서 오한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또한 건책후(建策侯)의 호를 하사했다. 참으로 빠른 사태 판단과 선견지명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유수를 만나기도 전에 그의 장수가 되어 대사를 순식간에 처리하고 눈부신 성과를 거둔 이후에 그를 기다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놀랍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 장면이다.
 
 
 
오한의 용기와 지략

  오한은 사람됨이 질후(質厚)08했으나 학문이 짧아 문장이나 말로 자신의 뜻을 빨리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급하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말로는 자기 뜻을 다 펴지 못하였지만 침착하고 후덕하였으며 지략도 갖추고 있었다. 등우[鄧禹, 각(角) 별을 관장]와 여러 장수들이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오한을 천거하였다. 유수도 점차 오한을 가까이 하고 중하게 여겨 늘 문하에 머물게 하였다.
  이때 경시제는 유수를 소왕(蕭王)에 임명하면서 행재소(行在所)09로 소환했다. 그런데 유수는 하북이 아직 평정되지 못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시제의 소환 명령에 불응했다. 유수의 소환 불응은 경시제에 대한 명백한 항명이었고, 이제부터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앞서 경시제가 유수를 행대사마에 임명하여 하북을 평정하는 명령을 내리고 일정한 병력을 내준 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실책이나 다름없었다. 하북 평정에 나선 시기부터 유수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시제와 언제 갈라설지 그 시기 선택만이 남은 상황에서 이 소환 불응은 고민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유수는 자신의 세력을 스스로 확장시켜야 했으며, 이런 그에게 병력 증강은 최우선 과제였다. 유수는 유주(幽州)의 병력을 징발하기 위해 등우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유수는 병력 증강이 지상 과제로 떠오른 시기에 이런 중요한 과업을 제대로 시행할 적임자는 누구인가라고 등우에게 물은 것이다. 등우가 대답했다.
  “제가 한가할 때에 오한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용기도 있고 지모도 있습니다. 그에 미치는 장수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유수는 곧바로 오한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고 부신(符信)을 주어 북으로 10개 군(郡)의 돌격기병(突擊騎兵)을 징발토록 했다. 이때 유주목(幽州牧)은 경시제 휘하의 묘증(苗曾)이었다. 묘증도 이미 유수가 경시제의 소환 명령을 불응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묘증은 제군(諸郡)에 명령을 내려 오한의 징발에 응하지 않도록 했다. 이미 다른 길을 가기로 한 유수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유수의 명령으로 오한은 기병 스무 기를 이끌고 먼저 무종(無終, 하북성 소현)으로 달려갔다. 오한과 묘증은 표면적으로는 아군(我軍)이었다. 묘증이 오한의 군대를 맞이하면서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오한은 묘증이 쉽사리 병력을 내주지 않을 것이란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묘증이 오한을 영접하는 순간, 오한은 묘증을 바로 잡아들여서 그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바로 그 군속들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오한이 유주목 묘증을 베었다는 소식이 북주의 모든 성읍에 전해졌다. 북주의 모든 성읍이 두려움에 떨면서 오한에 투항했다. 이로써 방해 세력을 단숨에 제거한 오한이 유주의 병력을 징발하여 유수에게 돌아왔다. 이때 유수는 청양(淸陽, 하북성 청하현)에 있었는데 오한은 많은 군사와 말을 이끌고 귀환했다. 오한은 막부(幕府)에 이르러 병부(兵簿)를 모두 바치고 나서 다시 부여해 줄 것을 청하면서 스스로 감히 사사롭게 하지 않겠다고하므로 유수는 더욱 그를 중히 생각하였다.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면서 병력을 요청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오한은 공사(公私)의 구분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성과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명령을 수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애초에 경시제가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으로 하여금 여섯 장군을 이끌고 왕랑을 공격하게 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사궁의 비장(裨將)이 자신의 상관을 믿고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아서 유수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저런 이유로 표면적으로 같은 편이라고 하지만 유수와 사궁의 사이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자신만의 독자 세력화의 길을 가고 있던 유수를 사궁은 기회를 보아 공격하려 하였지만 그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유수와 사궁이 비록 함께 한단성 안에 있었으나 성(城)을 나누어 진을 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이유였다. 유수와 사궁은 진을 달리 하고 있었지만 서로 안부는 물을 수 있었다. 사궁은 늘 자신의 직무에 성실했는데 유수가 그를 언제나 극찬했다. 
  “사상서령이 진정한 관리다.”
  유수의 칭찬에 사궁은 더 이상 그를 의심치 않았다. 사궁의 처가 이것을 알고 항상 그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그대와 유공은 지속적으로 서로 통할 수 없을 것이니 그의 헛된 말을 믿고 방비를 하지 않는다면 종내에는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궁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궁은 그의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업(鄴)으로 돌아가서 주둔하였다. 이때 유수는 남쪽으로 내려가 청독(靑犢)10을 치고는 사궁에게 말했다.
  “나는 사견(射犬)에서 도적들을 따라가 꼭 쳐부수겠습니다. 군도(群盜)들로 산양에 머무는 놈들은 이로 인해 기세가 꺾여 도망칠 것입니다. 만일 그대의 위력으로 이들을 쳐 대오를 흩트린다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사궁이 말했다.
  “좋습니다.”
  유수가 청독을 함락시키자 도적들은 과연 북쪽 융려산(隆慮山, 하남성 林縣의 경계지역)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궁이 이와 때를 맞추어 대장군 유경(劉慶)과 위군태수(魏郡太守) 진강(陳康)을 머물게 하여 업(鄴)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여러 장군들을 이끌고 도망가는 도적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궁지에 빠진 도적들이 사력을 다해 응전하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사궁은 크게 패하였고 죽은 자도 수천이 되었다.
  유수는 사궁이 출진하여 성 밖에 있는 틈을 타 오한과 잠팽[岑彭, 허(虛) 별을 관장]을 시켜 업(鄴)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한은 우선 변사를 보내 위군태수 진강에게 유세(遊說)케 하였다.
  “제가 듣기에 상지자(上智者)는 위험에 처하지 않고도 난을 구제하며 중지자(中智者)는 위기로 인해 공을 세우고, 어리석은 자는 위기에 안주하려다 스스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위기와 패망의 다다름은 사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새 경사(京師)는 패하여 어지럽고 사방이 소란스러움은 그대도 들어 아는 바이며 소왕(蕭王, 유수)의 군대가 강성하고 병사들이 그를 좇아 하북이 소왕에게 돌아섰음은 그대가 본 바입니다. 사궁이 안으로는 소왕을 배반하고 밖으로는 민심을 잃었는데 이는 그대도 아는 바입니다. 그대는 지금 외롭고 위태한 성을 지키면서 멸망의 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는 의리(義理)도 아니요 충절(忠節)도 아닙니다. 성문을 열어 우리 군대를 받아들임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됨은 물론 어리석은 자의 패망을 면하고 중지자의 공을 거두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가 도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진강이 그렇다고 여기고 유경과 사궁의 처자들을 잡아들이고 성문을 열어 오한을 맞아 들였다. 사궁이 융려(隆慮)로부터 업으로 돌아왔는데 태수 진강이 이미 그를 배신했음을 알지 못했다. 오한이 복병을 배치하여 사궁을 처단하자 불의의 습격을 받은 그의 병사들이 모두 항복했다. 이렇게 하여 유수는 한단에 파견된 경시제의 병력을 모두 자신의 휘하로 편재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05.
02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전한(前漢)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의 9세손(世孫). 자(字)는 문숙(文叔). 9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 유량(劉良)의 밑에서 성장했다. 1세기 초 외척 왕망(王莽)이 궁정 쿠데타를 통해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신(新)을 건국한다. 그러나 왕망의 복고적 개혁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한실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등에 업은 한 왕실의 후예들의 한 사람이었던 유수는 22년 가형(家兄) 유연(劉縯)과 함께 남양(南陽)에서 호족들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이후,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대파하고 25년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즉위 이후 10년 동안 경시제(更始帝), 적미(赤眉), 외효(隗囂), 공손술(公孫述) 등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묘호(廟號)는 세조(世祖), 시호(諡號)는 광무제(光武帝)이다.
03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4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05 역참(驛站)의 장(長). 향촌의 장(長). 진한(秦漢)에서는 10리(里)에 1정(亭)을 두었는데, 정의 장(長)으로 도적의 체포와 취조를 관장했다.
06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7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제(更始帝)가 즉위하고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태수(漁陽太守)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가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건무2)년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
08 순박하고 인정이 많음.
09 황제가 임시로 머무는 곳.
10 왕망 말기에 부곡(部曲)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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