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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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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우키시마호, 그 잊혀진 비극을 찾아서

우키시마호,

잊혀진 비극을 찾아서

 

 

글 선감 차선근(대순종교문화연구소)

   

  해방이 된지 일주일째인 1945년 8월 22일,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던 한국인들 중 일부가 고국으로 가기 위해 귀국선 제1호인 우키시마호[浮島丸]를 타고 아오모리현[靑森]의 오미나토[大湊]에서 부산을 향해 출항하였다. 그러나 불과 이틀만인 8월 24일,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만[舞鶴灣]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배가 가라앉아 버렸고 수많은 한국인들은 죽음을 맞이해야 했으니 이것이 바로 ‘우키시마호 사건’이다.

 

▲ 오미나토에서 출항하여 부산으로 향하다 갑자기 선로를 변경하여 마이즈루로 들어선 직후 침몰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1912년 타이타닉 침몰 사건 때의 희생자가 1,523명이었는데 비하여, 우키시마호 사건 때의 희생자는 거의 5천~1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 주변에는 이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타이타닉을 능가하는 대형 해난 사고인 이 사건이 제대로 주목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극의 시작

  일제(日帝)는 1938년부터 ‘육군특별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을 전쟁터로 내몰면서01 한국과 중국을 넘어 동남아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불태웠다. 그들은 걸림돌이 되는 미국을 꺾기 위해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6개월간은 승승장구하였으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패배 이후 전세가 급격하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밀리던 일제는 드디어 미군이 본토에 상륙할 것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본토 혼슈[本州]의 북단인 아오모리현에도 군사기지를 여러 곳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부족한 인력을 메우기 위해 ‘한국인 노동자 활용에 관한 방안’을 만든 뒤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한국인들을 무차별 강제 징용하기 시작했다. 우키시마호의 희생자들은 모두 이때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당시 충북 영동군에 살고 있었던 김동천과 김태석, 박재하의 증언에 따르면,02 이들은 ‘조선반도 제1차 징용영장’을 받고 1943년 5월 영동군청으로 끌려가서 화물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당시 열차에는 영동군 외에도 제천군, 단양군, 괴산군에서 끌려온 장정들이 같이 타고 있었는데, 그 수는 대략 5~6백 명 정도를 헤아렸다. 부산에 도착하자 일본 헌병들과 순사들은 이들을 영도로 끌고 가 예방접종과 신체검사를 실시한 다음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03 금강호[金剛丸: 7,105톤]에 태웠다.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뒤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아오모리현의 후루마키 역(지금의 미사와 역)에 하차한 뒤 대기하고 있던 군용트럭에 실려 미사와[三] 비행장까지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이들은 삼엄한 일본군의 감시 속에 공사장을 매일 왕복하며 활주로를 닦고 격납고나 지하 탄약고 등을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음식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항상 굶주려야 했고 의복과 신발도 다 해어져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이들은 비행장 정문 근처에 있던 몽고 유목민의 파오같이 생긴 통나무 집(태양막사라고 불렸다)에서 50~60명 정도가 모여서 같이 잠을 잤다고 한다.

 

 

 

  1943년은 도전님의 동생도 징용 영장을 받은 해였다. 이때 도전님께서는 형으로서 동생의 고난을 안타깝게 여기셨고 또한 농사를 돌보던 동생이 징용을 가면 집안의 가세가 크게 흔들릴 것을 우려하셨다.04 결국 도전님께서 동생 대신 아오모리현 어느 곳으로 징용을 가게 되셨다고 하는데, 비슷한 시기 도전님의 고향05인 괴산군 지역의 사람들이 아오모리현 미사와 비행장으로 갔었던 사실로 미루어 도전님께서도 그곳에 계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없다.

 

 

아오모리현 미사와 비행장

  아오모리현[靑森]은 ‘푸르른 숲[靑森]’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숲으로 유명하다. 숲 외에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절경(絶景)이 많은 이 지역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조용하고 한적하다.

  아오모리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4만여 명의 미사와 시[三市]는 주일 미군기지가 들어 서 있는 군사 도시로, 전체 인구의 ¼이 미군 및 그 가족들이다. 미사와 시의 관문인 미사와 역[三]은 옛날 후루마키 역이라 불렸으며 징용당한 한국인들이 비행장으로 가기 전 기차로 도착했던 곳이다. 비행장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5㎞ 조금 더 떨어져 있다.

 

 

 

  현재의 미사와 공항 건물은 1985년[소화(昭和) 60년] 2월에 건설된 것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 일대의 넓은 활주로와 평탄한 대지는 모두 징용 한국인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으나 그것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고, 비행장 정문 근처에 있었다는 징용 한국인 숙소도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미사와 비행장은 ‘짧은 세월이건만 망각은 넓고 깊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도전님께서는 아오모리현에 계셨을 때 글깨나 배운 사람이라 하여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시고 주로 행정이나 관리를 맡게 되셨다고 한다. 한번은 상자에 자갈을 가득 채워오면 그것을 확인하고 식량 배급표를 나눠주는 일을 맡으셨던 적이 있으셨다. 어느 날 애를 업은 한 여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에 자갈을 반만 겨우 채워 온 것을 보시고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식량 배급표를 주신 일이 있었다. 감시를 하고 있던 일본 군인이 이를 보고 크게 화를 내자 도전님께서는 애를 업은 여자가 이런 일을 하기가 쉽느냐고 하시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본 군인의 처사를 크게 힐난하셨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오미나토에서 우키시마호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의 날이 왔다. 아오모리현과 홋카이도[北海道]에 강제로 끌려왔던 많은 한국인들은 귀국을 희망하며 아오모리현 시모키타[下北] 반도에 있는 무츠 시(むつ市)의 항구인 오미나토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부둣가뿐만 아니라 주택가의 골목, 길가에서 노숙을 하며 고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의 본국 송환은 9월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8월 18일이 되자 오미나토 해군경비부의 일본 해군은 한국인들을 우키시마호에 승선시켜 돌려보낸다고 발표했다. ‘떠 있는 섬[浮島]’이라는 뜻의 우키시마호(4,730톤급)는 군수물자의 수송을 담당하는 특별 운송선06으로 길이가 108m나 되는 거대한 배였다.

  이때 오미나토에는 일본 해군이 도중에서 배를 침몰시켜 한국인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일본 해군은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움직이며 폭동을 일으킬 불온한 징조를 보인다, 빨리 돌려보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유언비어를 터뜨려 긴장감을 조성시킨 후,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들에게는 식량 배급을 중지한다. 그리고 우키시마호에 타지 않으면 영원히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선전물을 뿌리며 한국인들을 모두 우키시마호에 태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4척의 거룻배를 동원하여 오미나토의 기쿠치 잔교[菊池棧橋]에서 하루 종일 한국인들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승선하는 사람들의 명단이나 인원은 아예 점검조차 하지 않아 몇 명이 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무렵 괴산군 등지에서 징용 와 있던 미사와 비행장의 5~6백 명 남짓한 한국인들은 해방 후 작업을 중지한 채 일손을 놓고 있었다. 8월 19일이 되자 한 일본군 장교가 오더니 “이제 짐을 싸라. 너희들의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을 전했다. 모두 기쁨에 들떠 옷가지를 정리해 후루마키 역(지금의 미사와 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오미나토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우키시마호에 승선을 한 뒤였다. 뒤늦게 도착한 이들도 모두 거룻배에 실려 배에 태워졌다. 승선이 완료되고도 꼼짝 않고 꼬박 하루를 더 머문 우키시마호는 드디어 8월 22일07 오후 10시쯤 부산을 향해서 출항을 시작했다.

  배를 탄 한국인들은 침몰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고국에 돌아간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이들이 배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밟았던 기쿠치 잔교는 오미나토 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현재 그 일대는 모두 매립되고 인가 몇 채와 무츠 시 공민관이 들어 서 있어서 옛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귀국선 제1호인 우키시마호에 탄 한국인들의 정확한 숫자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승선 정원이 4천 명인데 최소 2배 이상은 탔다고 하며 1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아오모리현 일대에만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들의 수가 12,000명이 넘었는데, 거의 모두가 강제적으로 이 배에 태워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들의 증언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배가 출항한 오미나토의 뒷산은 해발 879m로 바닷가에 붙어있어 매우 높게 느껴지는 산이다. 그런데 산 이름이 카마후세산[釜臥山]이 아닌가! ‘카마후세(釜臥)’라… 이는 솥이 뒤집혔다는 뜻이다. 솥이 뒤집히면 먹을 게 없게 된다. 먹을 게 없으면 이제 남은 건 죽음뿐 아니던가! 우키시마호를 타고 출항하는 한국인들을 배웅했던 산은 이렇게 불길한 이름이었고 이것은 이들 앞에 곧 닥쳐 올 엄청난 비극을 알려주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폭발과 함께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하다

  부산으로 출항한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음료수를 보충해야 한다며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여 교토부 마이즈루만으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오후 5시 20분쯤 헤비지마[蛇島] 앞에 멈추어 있을 때 ‘쾅’ 하는 폭발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꺾여 순식간에 침몰해 버렸다. 그 지점은 마이즈루만의 작은 어촌인 시모사바가[下佐波賀] 마을 앞바다였고 해안에서 겨우 300m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갑판 위에 나와 있던 몇몇 사람들만 두께가 1㎝나 되는 기름 바다에 내던져진 채 아우성 치고 있었다. 이를 본 시모사바가의 어민들이 20여 척의 작은 고기잡이 배를 총동원하여 달려왔으나, 구조한 사람은 극히 일부 밖에 되지 못했다. 마이즈루만 주변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골이 깊다보니 해안에서 가깝다고 해도 수심이 깊어서 인명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배가 폭발한 원인에 대해서 일본은 미군이 뿌린 수뢰(水雷)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를 믿기에는 너무도 석연찮은 점이 많다. 우선 우키시마호가 출항할 때 부산항까지 편도분의 기름만 싣고 간 사실, 배가 마이즈루만에 들어섰을 때 만 입구에 ‘수뢰 없음. 안전’이라는 푯말이 떠 있었다는 사실, 배가 폭발하기 20분전 일본 승무원들이 보트를 바다에 내던지고 먼저 탈출한 사실, 배가 정지되어 있을 때 폭발했으므로 촉뢰의 가능성이 적다(대부분의 경우 수뢰는 정지되어 있고 움직이는 배와 충돌해 폭발을 일으킨다)는 사실, 촉뢰만으로는 4,730톤의 거대한 배가 순식간에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들이다. 특히 촉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바깥의 폭발로 인해 선체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훗날 인양한 우키시마호 바닥 구멍은 선체의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뚫려 있어 폭발이 배 내부에서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일본 해군이 의도적으로 배를 폭침시켰음이 분명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 아오모리현에 있던 일본 해군은 천황의 항복에 강한 불만을 품고 계속 전쟁을 하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고 한다.08 철저히 군국주의에 물든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노예가 아니라 적으로 돌아설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던 데다가, 군사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군 시설물을 만드는데 동원한 한국인들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고, 또한 강제 연행한 한국인들을 매우 가혹하게 다룬 사실도 은폐해야만 했다. 거기에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던 일본인 선원들과 해군들은 부산에 도착하면 한국인들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여 부산에 가기를 꺼려하고 있었다09고 한다. 즉 일본에게는 한국인들만 승객으로 타고 있던 우키시마호를 의도적으로 폭침시킬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천행(天幸)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온통 기름을 뒤집어 쓴 채 동북쪽으로 4㎞ 전방에 있는 일본 해병부대(다이라 해병단)10까지 걸어가서 그곳에 임시로 머물렀다. 이곳에서 20일 정도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갇혀 있었는데, 이때 일본군으로부터 3천 명 이상은 족히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이들은 센자키[仙崎]11까지 가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직접 걸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본은 이 사건의 희생자가 승선 3,725명 중에서 사망 524명, 생존 3,20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에는 정원 4천 명의 2배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타고 있어 초만원 상태였다고 한다. 일본 측 주장 ‘승선 3,725명’은 배의 정원조차 다 채우지 않았다는 말이니 그들의 발표는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구조된 한국인들의 숫자도 일본 발표대로 3,201명이 아니라 대략 6백~8백 명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인양된 우키시마호의 모습. 1954년 10월 9일자 오사카 발행 <국제신문(國際新聞)>에 실린 것으로, 우측 사진은 부식된 시계와 한글이 새겨진 탑승자의 유품이며 좌측은 찢겨진 배 밑바닥 사진이다. <국제신문>은 이 사진을 게재하면서 바깥쪽이 부풀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폭발이 배의내부에서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도전님께서도 이 사건을 직접 겪으셨는데, 이에 대해 “일본군이 배를 가라앉히기로 하고 억지로 출항시켰지. 하필 내가 그 배를 탔잖어. 배를 타고 가는데 속이 영 답답해서 바람을 쐬려고 올라와 보니까 갑자기 폭발 소리가 나더니 배가 가라앉았어. 그래서 돛대를 붙들고 있다가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바위 같은 게 바다 위에 떠 있어서 올라탔어. 나중에 다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와 15일 만에 걸어서 집으로 왔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 바위는 바로 ‘거북이’였다고 하는데, 기름이 1㎝나 깔린 바다 위로 갑자기 거북이가 나타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이는 도전님께 일어난 이적(異蹟)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 도쿄 시 외곽에 있는 작은 사찰, 유텐지[祐天寺]

 

 

아직까지 마이즈루만에 잠겨있는 유골들

  우키시마 폭침 후 4개월 뒤인 1945년 12월,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를 고발했으나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사령부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해 버렸다.

  그 후 일본 정부는 침몰한 배를 9년이나 방치해 두고 있다가 1954년이 되자 ‘희생자들의 유골 수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피폐해진 한국에 철을 수출할 의도로 이노[飯野] 중공업주식회사로 하여금 선체를 인양하도록 했다. 끌어올려진 배에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곳곳에 널려있어 그날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인 잠수부들이 마이즈루만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유골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마이즈루만의 바다 밑은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서 시야가 매우 좋고 바다 속에 묻힌 것이 없어서 모두 드러나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이즈루만에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다 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배를 인양할 때 균형 장치(balanced tank) 부분은 360톤의 돌이 들어 있어서 그 무게 때문에 인양을 포기했다고 한다. 배의 승선 정원이 훨씬 초과된 상태에서 돌을 360톤이나 실었다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로 이것은 의도적으로 배를 빨리 침몰시키려고 한 짓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키시마호 사건 직후 일부 수습된 희생자들의 시신은 모두 화장되었고, 그 유골들은 도쿄[東京] 메구로구[目黑區]의 절 유텐지[祐天寺]12로 옮겨졌다. 유텐지에는 2,328위의 한국인 징용·징병자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다가, 1970년~1998년 사이에 1,192위의 유골이 송환되고 아직 1,136위의 유골이 남아있다. 그중 234위의 유골이 우키시마호의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1989년 이래 매년 추도회를 개최하고 있기는 하지만, 희생자들의 위패를 ‘태평양전쟁조선반도출신구일본군전속전몰자령위(太平洋戰爭朝鮮半島出身舊日本軍戰屬戰歿者靈位)’라고 하여 이들을 일본을 위해 죽어간 ‘일본군’으로 모시고 있으며 심지어 위패가 보관되어 있는 사당 문 안쪽에는 ‘전쟁의 영웅(戰爭の英雄)’이라는 푯말까지 걸어놓아 통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사고 해역인 헤비지마[蛇島] 앞에는 ‘순난의 비(殉難の碑)’가 서 있다. 1978년 마이즈루 시 미술교사들이 공동 제작한 이 비는 배가 가라앉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침몰일인 매년 8월 24일에는 이곳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위령제를 지낸다13고 한다.

  1992년 서울에서는 이 사건을 소재로 ‘폭침-우끼시마마루는 부산항으로 못간다!’는 연극이 공연된 바 있으며, 1995년 부산에서는 극단 새벽이 ‘피의자-우끼시마호 폭침에 관한 단상’이라는 연극을 공연하였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1995년 이토마사[伊藤正昭]가 일본 시민단체의 후원을 받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아시안 블루’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일본 국내에 개봉될 때 많은 우익들의 방해가 있었으나 굴하지 않고 끝까지 상영되었다고 한다. ‘아시안 블루’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에 수입되지 못하고 있다가 광주시민연대가 시민 차원에서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와 더불어 수입, 상영하였다. 돈 때문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이다. 또 북한에서도 2001년에 우키시마호 사건을 다룬 ‘살아있는 영혼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05년 8월에는 부산 연안부두의 수미르공원에 부산으로 오다가 결국 오지 못한 우키시마호 희생자의 위령비를 세우는 등,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알리고 일본의 잔혹성을 고발하고자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는 패전 직후에도 한동안 ‘우키시마호 사건’ 같은 학살을 계속 자행했다. 널리 알려진 것만 해도 1945년 8월 16일 일본 헌병들이 사할린에서 한국인들을 가미시스카 경찰서 유치장에 몰아넣고 건물에 불을 질러 집단 학살한 ‘가미시스카 학살 사건’이나, 8월 23일 사할린 미즈호[瑞穗, 현 러시아 포자르스코예] 마을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 한국인 27명을 학살한 ‘사할린 미즈호 학살 사건’ 등이 있다.

 

▲ 부산 수미르공원에 서 있는 우키시마호 희생자 위령비. 뒤로 부산항이 보인다. 생각보다 규모가 초라해서 쓸쓸한 느낌을 주는데, 비문에는“조국 광복을 맞아 귀국선 우끼시마호 폭침으로 떠나던 뱃길로 돌아오지 못한 님아, 하얀 꽃 한 송이 바치노라…”라고 적혀있다.

 

 

  1923년 9월 관동대학살14이나 1937년 12월 남경대학살15, 731부대 생체실험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제는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잔혹한 사건들이 덮여지지 않고 자꾸 고발이나 폭로 형태로 들추어지는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거 역사 청산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패전 후 60년이 지났지만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망언(妄言)이나 역사 왜곡 사례에서 보듯 그들의 과거를 참회하고 인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언제나 때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는 독일인들이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는 사람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난 뒤 분단된 서독에서 초대 총리를 지낸 인물로, 재임 14년 동안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잿더미였던 서독을 재건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아데나워의 진정한 위대성은 이런 경제적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용기’에 있는 듯하다. 패전 직후 독일은 2,300만 명이 넘는 소련인들과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때 아데나워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대다수 독일 사람들이 잔인한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범죄는 독일인의 이름으로 저질러졌고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남았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 비인간적인 범죄의 책임은 그래서 우리 독일이 져야만 한다. 우리는 고통 받은 그들에게 도덕적, 그리고 물질적 배상의 의무가 있다.”

  그가 국민들에게 제시한 길은 명백했다. 바로 과거에 대한 인정과 분명한 사죄, 그리고 보상이었다. 잘못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아데나워는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아데나워의 노력에 독일 국민들도 과오 청산에 공감하고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가르치며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 결과 불과 반세기만에 독일은 모범국가라는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가깝고도 먼 나라, 이웃 일본을 보자. 그들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일으켰고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또 패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여 똑같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은 과거에 대한 처리 방식이 독일과 정반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는 데까지 숨기며, 설령 드러나더라도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도덕적이지 못한 나라’라는 딱지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위안부 등 피해자들이 일본에게 바라는 것은 몇 푼의 보상금이 아니라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는 공식적인 말 한마디라고 하는데, 일본은 독일과는 다르게 그것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잘못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과 일본이 이렇게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패전 이후 독일은 전쟁의 주범들 대신 전쟁에 반대하던 측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과거 청산에 노력할 수 있었고, 일본은 비록 전쟁 주범 일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지만 연합국 사령부에 의해 정권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과거 청산을 않으려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16 그러하기에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화하고 왜곡하는 데 열중했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 외에도 일본인들의 진실보다는 실리를 더 중시하는 가치관과 역사관17, 그리고 원령신앙(怨靈信仰)18 역시 일본의 이런 면을 더욱 부채질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이런 입장들은 모두 그 자신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서, 결코 상대에 대한 진지한 배려나 존중은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치졸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왜곡된 역사를 배운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참혹한 전쟁은 싫지만 그래도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는 정당한 것이었다고 믿게 되었고,19 대학살 같은 끔찍한 재앙의 책임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제님께서는 일본에게 ‘인(仁)’은 붙여주지 않는다고 하셨다.20 모든 덕(德)의 원천이 되며 어짊·착함·박애를 나타내는 ‘인(仁)’이 없고, 오직 탐욕과 침략성만 강한21 일본에게 역사의 참회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하기 힘든 일본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서양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에서, 또는 임진왜란 이후 도술 신명 사이에 맺혀있는 척이 풀리도록 하기 위해서22그리고 삼한당(三恨堂)이 풀리기 위해서23 일시 기운을 크게 가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그들의 희망찬 미래를 결코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본을 보고 있노라면 ‘품삯 없는 일만 하는 나라’라는 상제님의 말씀24이 새삼 되새겨지게 된다.

 

 

 

 


01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터에 끌려 간 한국인들의 숫자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군인으로 참전한 한국인들을 242,341명으로 발표하고 있고 한국 정부에서는 365,000명 이상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노동자로 끌려 간 사람들 67만 명을 합치면 모두 100만 명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靑柳敦子, 『朝鮮人徵兵·徵用に對する日本の戰後責任』, 風媒社, 2005, 140~152쪽 참고)

02 이들의 증언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사이토 사쿠지 편저, 전재진 편역, 가람기획, 1996) 96~97쪽, 127~129쪽, 132~141쪽 참고.

03 1905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사이를 운항하던 연락선. 1964년 이후 다시 운항이 재개되었고 현재는 부관페리가 다니고 있다.

04 물론 이때는 도전님께서 도에 입문하시기 이전의 일이었다.

05 도전님께서는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상모면(上芼面) 문강리(文江里) 307번지(현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산 62번지)에서 탄강하셨다.

06 1937년에 화물선으로 건조된 우키시마호는 1941년에 징용되어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던 배였다.

07 우키시마호의 출항일이 8월 21일이라는 기록도 극히 일부분 발견된다. 특히 우키시마호가 가라앉은 마이즈루만에 있는 순난의 비 옆 안내판에도 8월 21일에 우키시마호가 출항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당시 배 출항 관련 기록과 신문 기사, 목격자, 생존자들의 증언은 출항일이 모두 8월 22일로 일치하고 있다. 오미나토의 일본 해군이 8월 21일에 배를 출항시킨다고 선전하면서 한국인들을 배에 태웠기 때문에 8월 21일에 배가 출항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실제 배는 승선이 완료된 후 만 하루가 지난 8월 22일에 출항했다.

08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에 불만을 품은 아오모리현 오미나토의 해군들은 8월 16일 전투기를 이용하여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는 격문을 뿌렸다고 한다.(사이토 사쿠지 편저, 전재진 편역,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 가람기획, 1996, 268쪽 참고)

09 당시 우키시마호를 타고 출항할 것을 명령받았던 일본 해군들이 부산으로 가기 싫었던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칼을 뽑아들며 호통치는 상관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배에 태워졌다.(위의 책, 268쪽 참고)

10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다.

11 해방 직후 한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시모노세키[下關]는 미군이 뿌린 수뢰로 인하여 폐쇄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1945년~47년까지 시모노세키에서 북쪽으로 기차로 1시간 30분 거리인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작은 항구 센자키[仙崎]를 이용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이 항구를 이용한 한국인들은 모두 940,438명이었다. 센자키는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의 귀국 루트가 되기도 했는데, 268,895명이 이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센자키는 현재 나가토 시[長門市]에 편입되어 당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변모해 있다.

12 1718년 에도막부[江戶幕府] 때 지어진 사찰. 유텐지 역[祐天寺]에서 동쪽으로 500m 거리에 있다.

13 이 날에는 민단과 총련, 마이즈루 시민들 약 500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14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지방[關東地方]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은 일본의 중심지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컸다. 일본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공작대를 조직하여 방화·독물 투입 등의 테러를 하게 한 뒤 그것을 한국인들이 한 것처럼 조작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육군과 경찰은 무고한 한국인 수천 명을 학살하였고, 일본 국민은 한국인 폭동설을 그대로 믿고 그 보복책으로 각 지방별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하여 한국인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때 희생된 한국인들의 수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대략 7천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15 1937년 12월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격하던 일본의 중지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은 중도에서 약 30만 명을 학살하였고 난징을 점령한 뒤에는 잔인한 방법으로 약 4만 2000명을 더 살해했다. 당시 학살당하지 않도록 중국인들을 피신시켜주던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이나 병원·학교 등도 모두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인 마쓰이 등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으나, 아직도 그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16 사실 이런 현상은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단죄 받지 않고 오히려 정부의 요직을 독점함으로써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였고, 현재도 독립군 후손들은 배를 곯고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사는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과도 줄이 닿아 있는 역사의 그늘이다.

17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진실이라는 가치 기준보다는 자신들의 편의에 의해 철저한 자신들의 입장에서 창조되고 포장된다. 이런 경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8세기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8 전쟁이나 사고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죽은 이유에 상관없이 이들을 무조건 신으로 모시고 받들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민속 신앙. 한국과 중국에서는 전범자들을 신으로 모셔놓은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을 문제 삼지만,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일본인들의 원령신앙 때문이라고 한다.

19 오늘날 일본인들 거의 모두는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은 가만 두어도 어차피 러시아에게 지배당할 운명이었으므로 먼저 자신들이 지배한 것뿐이라는 점, 둘째는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하여 도로나 철도, 항만을 건설하여 주었기 때문에 한국이 근대화되었다는 점, 두 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남이 빼앗을 것이니 내가 미리 먼저 빼앗는 것이라는 저들의 논리는 결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이며, 그들이 한국에 만든 도로나 철도, 항만은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수탈하기 위한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36년 동안 일본의 수탈과 착취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극빈국으로 전락했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도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나 비로소 시작된 것이지 결코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20 공사 2장 4절.

21 공사 3장 31절.

22 공사 2장 4절, 예시 23절.

23 예시 74절.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삼한당에 대한 연구」(김성수, 『상생의 길』 창간호, 2004, 98~111쪽) 참고

24 저희들은 일만 할뿐이니 모든 일을 밝게 하여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공사 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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