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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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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 :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대한 이해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대한 이해

 

 

글 연구위원 이승목

 

Ⅰ. 머리말

 

Ⅱ. 본론

   1. 『서전(書傳)』의 성립

      (1)『서경(書經)』의 출현

      (2)『서전(書傳)』의 성립

   2.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나타난 요지(要旨)의 이해

      (1)정일집중(精一執中)

      (2)건중건극(建中建極)

   3.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의 실천

      (1)정일집중(精一執中)

      - 양심(良心)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2)건중건극(建中建極)

      -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의 확립

      (3)‘서전서문’은 주문(呪文)이 아닌 수행(修行)의 훈전(訓典)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상제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서전(書傳)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대학상장(大學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관통한다.” 하셨느니라. 상제의 부친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끊임없이 읽었으므로 지혜가 밝아져서 마을 사람들의 화난을 덜어 준 일이 많았도다.(교법 2장 26절)

  여러 성현들의 말씀 중 ‘대학상장(大學上章)’과 함께 상제님께서 중요시 하신 것이 바로 ‘서전서문(書傳序文)’이다.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한다.’는 상제님의 말씀은 도통(道通)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수도인들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전서문’은 『서전(書傳)』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전』 각 편의 요지가 집약되어 있는 글이다. 여기서 『서전』이란 송(宋)대 주희(朱熹)의 제자였던 채침(蔡沈)이 기존의 『서경(書經)』에다 주석(註釋)을 단 것이다. 그런데 『서전』 본문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서전서문’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서전』이 어떤 경전(經典)인지 살펴본 후, 그 속에 담긴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서전서문’의 요지(要旨)인 ‘건중건극(建中建極)’과 ‘정일집중(精一執中)’을 『서경』 본문을 참고하여 살펴보고, 이것이 우리의 수도 법방에 어떻게 녹아 들어와 있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서전(書傳)』의 성립

 

(1) 『서경(書經)』의 출현

  『서경(書經)』01은 고대(古代)의 성왕(聖王) 요(堯)02로부터 주대(周代)까지 여러 제왕들의 정치와 법도(法道)에 관한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국가통치의 거울이 되어 온 중요한 서적이다. 또한 『시경(詩經)』03과 함께 가장 일찍 경서(經書)로 정착된 문헌으로서, 여러 경서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문체로 쓰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서경』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공자(孔子, 기원전 552~479)가 최초로 수집하여 정리 및 편집했을 것이라는 설(說)04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국시대쯤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설(說), 두 가지가 있다.

  『서경』은 선진(先秦)때까지 전래되었지만,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46~210)의 분서갱유(焚書坑儒)05와 진한(秦漢) 교체기의 전란(戰亂) 중에 대다수 분실되었다. 한대(漢代) 후기에 이르러 복생(伏生, ?~?)06이란 사람이 사라진 『서경』을 다시 수집·정리하였는데, 이를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한다. 같은 시대에 또 하나의 ‘상서’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고문상서(古文尙書)』였다. 공왕(共王)07이 궁을 확장하기 위해 공자(孔子)의 저택을 허물다가 벽 가운데에서 『춘추(春秋)』·『논어(論語)』·『효경(孝經)』 등과 함께 발견한 것으로, 모두 과두문자(文字; 중국 옛 글자의 하나로 글자 모양이 올챙이 같음)로 씌어 있었다.08 『금문상서』는 33편에 이르며 학자·사관·관료·왕실 등에서 많이 읽혔고, 『고문상서』는 25편으로 주로 민간에서 널리 읽혀졌다. 그러나 약 3백여 년 후인 서진(西晉) 회제(懷帝)09때에 흉노(匈奴)가 일으킨 큰 반란으로 이 두 종류의 ‘상서’는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였다. 동진(東晋)시대에 이르자 『금문상서』와 『고문상서』를 취합한 형태인 『위고문상서』10 58편이 발견되었다. 바로 이 『위고문상서』가 현재에 전해지는 『서경』이다.

  『서경』이 지니고 있는 의의(意義)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역사의 시조(始祖)’이다. 『서경』이 후세에 나온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와 같은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중국 고대사의 기록은 『서경』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은허(殷墟)에서 갑골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되어 『서경』의 기록들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관해 류승국(柳承國) 교수는 “…요순(堯舜)이 종래에 생각한 것과 같은 가상적 인물이 아니라 중국 상대(上代)에 실재한 역사적 인물로 추단(推斷)할 수 있다.… 그것은 최근 갑골문(甲骨文)에 근거하여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에 기록된 요순(堯舜)에 관한 사실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었다.”11라고 말하고 있다. 곧 고고학적 입장에서 정확한 연대는 말할 수는 없으나 요순(堯舜)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으며, 당시 기록된 그 문화도 실존했다는 것이 갑골문을 통해 예단(豫斷)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경』은 중국문학사에서 ‘산문(散文)의 시조’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서경』이 한문으로 쓰인 가장 오래된 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시가(詩歌)가 『시경(詩經)』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했던 것과 같다. 한(漢)대 뒤로 육조(六朝)12시대에서는 형식의 아름다움에 치중하여 산문을 짓는 데 있어서도 꼭 대구(對句)를 따져 글을 쓰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당(唐)대에 이르러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한유(韓愈, 768~824), 유종원(柳宗元, 773~819)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고문운동이 일어나 글은 대구나 형식의 아름다움을 따지는 것보다도 자기의 뜻을 자유롭게 잘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주장한 고문이란 진(秦)나라 이전의 글들을 가리키며, 그 고문의 조종(祖宗)이라 칭한 것은 역시 『서경』이었다. 이처럼 『서경』은 ‘산문의 시조’로서 중국문학사에서 산문 발전의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13

  끝으로 『서경』은 정사(政事)의 표본이다. 『서경』은 곳곳에서 군주의 덕치(德治)를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 전반에 걸쳐 ‘명덕신벌(明德愼罰; 덕을 선양하고 형벌을 삼가 함)’과 ‘애민중민(愛民重民; 백성을 사랑하며 중하게 여김)’14 그리고 ‘왕도(王道)’의 정치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명덕신벌’은 군주 자신이 지켜야 할 계명(誡命)을 뜻하고, ‘애민중민’은 정치를 할 때 백성들을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들의 삶을 질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15 그리고 ‘왕도정치(王道政治)’16는 후대 유가의 이상적인 정치사상의 기초를 이루게 되며, 나라를 세우는 기본 이념으로 정착된다. 그래서 순자(荀子)17는 이 책을 ‘정치의 기(紀; 규범)’라 했고, 공영달(孔穎達)18은 ‘군주 사고(辭誥; 군주가 내린 명령이나 포고를 아우르는 말)의 법전’이라고 하였다.19

  『서경』이 이렇게 중요하게 인식되었지만 그 내용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어 학자들은 여러 종류의 주해서(註解書)를 썼다. 복생의 제자들이 지은 『상서대전(尙書大傳)』을 시작으로, 『구양경』·『구양장구』·『대소하후장구』 등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자구(字句)의 주석엔 힘쓰지 않고 경(經)을 빌어 정치를 논하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예언적·신비적인 이론까지 보탠 것에 지나지 않았다.20 그러다가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 공영달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쓴 『상서정의(尙書正義)』가 출판되었다. 당시에는 가장 볼만한 주석서로서 많은 학자들에게 읽혔지만, 이것 역시 오역(誤譯)이 많다는 이유로 경문 자체의 진위 문제에 휩싸이고 만다.

  그러던 중 송(宋)대 주자(朱子)의 학설을 이어받아 채침(蔡沈)이 쓴 『서집전(書集傳)』이 선을 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나온 주석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 받았다. 『서집전(書集傳)』을 줄여서 『서전(書傳)』이라고도 하는데, 상제님께서 읽기를 권하신 ‘서전서문(書傳序文)’은 다름 아닌 채침이 지은 『서경』의 주석서 『서전』의 머리말인 것이다.

 

 

(2) 『서전(書傳)』의 성립

  『서전(書傳)』은 그동안 전해져 오던 『서경(書經)』을 채침(蔡沈, 1176∼1230)이 새로이 주석(註釋)한 서적이다. 그는 중국 남송(南宋)의 성리학자로, 주희(朱熹)의 친구이자 수제자인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며, 스승인 주희의 사위이다. 아버지 채원정은 천문학과 수학·풍수에 정통해, 채침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성장하여서는 주희에게서 수업을 받아 그의 사상을 계승해 나갔다. 또한 그는 마음[心]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 연구에 매진하며 일생을 마쳤다.21

  그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대작은 10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서전』이었다. 이 책은 본래 주희가 집필했던 것이었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해 제자인 채침에게 위촉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채침은,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의 각 편은 주희의 교정을 거친 것이고, 그 이외 다른 편은 이전 학자들의 설(說)을 모아 절충하여 해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편찬 과정에서 스승인 주희의 사상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서전』은 송(宋)대 이후 난해한 『서경』을 이해하는 데 가장 명쾌한 주석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채침의 『서전』이 나온 이후 많은 주석서들이 도태되고 학자들은 오직 채침의 주석서만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한다.22

  또한 원나라 인종(仁宗)시절에 관리들의 공인서책으로도 지정되어 읽혀졌고, 과거법(科擧法)이 제정될 때에는 이 『서전』이 시험의 교본(敎本)이 되었다. 그 뒤에도 청(淸)말에 이르는 6백여 년간 『서전』은 대표적인 주석서로 읽혀 왔다.23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인식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전』에 나타나는 여러 성인(聖人)의 치도(治道)를 덕치(德治)구현의 표본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책에 나타난 사상, 제도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반영되기도 하였는데, 부모의 삼년상(喪)이라든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덕윤리 같은 것이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2.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나타난 요지(要旨)의 이해

 

  채침은 『서전(書傳)』의 ‘서문(序文)’을 쓰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취지를 설명하고, 특히 각 편의 의의(意義)를 집약시켜서 여기 ‘서문’에다 함축된 요지(要旨)로 표현해 놓았다. 그 요지란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인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을 일컫는다. ‘서문’에 따르면, “정일집중은 요(堯)·순(舜)·우(禹)가 주고받은 심법이요, 건중건극은 상나라 탕(湯)왕과 주나라 무(武)왕이 서로 전한 심법”이라 한다.

  다음은 채침이 지은 『서전』의 ‘서문’이다.

  慶元己未冬先生文公令沈作書集傳明年先生歿 又十年始克成編總若干萬言嗚呼書豈易言哉 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皆載此書而淺見薄識豈足以盡發蘊奧 且生於數千載之下而慾講明於數千載之前亦已難矣. 然二帝三王之治本於道二帝三王之道本於心得其心則道與治固可得而言矣 何者精一執中堯舜禹相授之心法也建中建極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 曰德曰仁曰敬曰誠言雖殊而理則一無非所以明此心之妙也 至於言天則嚴其心之所自出言民則謹其心之所由施禮樂敎化心之發也 典章文物心之著也家齊國治而天下平心之推也心之德其盛矣乎 二帝三王存此心者也夏桀商紂亡此心者也太甲成王困而存此心者也 存則治亡則亂治亂之分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 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 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求心之要舍是書何以哉 沈自受讀以來 沈潛其義參考衆說融會貫通折敢折衷 微辭奧旨多述舊聞二典禹謨先生蓋嘗是正手澤尙新鳴呼惜哉 集傳本先生所命故凡引用師說不復識別 四代之書分爲六卷文以時異治以道同 聖人之心見於書猶化工之妙著於物非精深不能識也 是傳也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心雖未必能造其微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書因是訓亦可得其指意之大略矣 嘉定己巳三月旣望武夷蔡沈序

  경원(慶元) 기미(1199)년 겨울. 선생 문공(朱子를 가리킴)께서 나(채침)로 하여금 『서집전』을 짓게 하시고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그 후 10년이 지나 이렇게 편찬하니 그 분량이 약 일만 자에 이른다. 아아! 『서경』을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으랴. 두 황제(堯舜)와 세 왕(禹·湯·武)의 천하를 다스리던 경륜이 이 책에 실려 있으니, 나같이 식견이 짧고 지식이 얕은 사람이 어찌 그 심오한 진리를 다 캐낼 수 있으리오. 더구나 천년 뒤에 나서 천년 전(前)의 일을 강구하니,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도다. 그러나 두 황제와 세 왕의 정치는 도(道)에 근본하고 그들의 도는 마음에 근본을 둔 것이니, 그 마음만 바로 터득한다면 그 도(道)와 정치(政治)를 말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은 요·순·우가 주고받은 심법(心法)이요, 건중(建中)과 건극(建極)은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이 서로 전한 심법이니, 덕(德)과 인(仁)과 경(敬)과 성(誠)이 비록 그 말은 다르나 진리는 하나이며, 그 모두가 이 마음의 오묘한 원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말함에 이르러서는 곧 그 마음이 유래한 곳(하늘)을 스스로 경건히 밝히려는 것이요, 백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곧 그 마음이 베풀어지는 바를 삼가는 것이니, 예악(禮樂)으로 교화함은 그 마음의 드러남이다. 문물과 제도는 마음의 나타남이요,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으로써 천하를 바르게 함은 곧 그 마음을 미루어 확장한 것이니, 실로 마음의 덕이 성대(盛大)하다 할 수 있으리라.

  두 황제와 세 왕은 이 마음을 간직한 이요, 하의 걸(桀)왕24과 상의 주(紂)왕25은 이 마음을 잃은 이요, 태갑(太甲)26과 성왕(成王)27은 겨우 이 마음을 지킨 이이니, 간직하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지는 것으로서, 치란(治亂)의 나뉨이 이 마음을 간직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후세의 임금으로서 두 황제와 세 왕과 같은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마음을 구하는 요체로서 이 책(書經)을 버리고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침이 이 글을 읽은 후로 그 심오한 뜻을 헤아리고 여러 설을 참고하여 저절로 이해되고 관통되는 대로 감히 절충하고자 애썼으나 은밀한 말씀과 심오한 뜻은 그 전날 선생께 듣던 바를 많이 이끌어 썼고, 더구나 이전(二典)과 우모(禹謨)는 선생께서 일찍이 바로 하여 그 손때가 새로우니 아! 슬프고 애달프다. 집전은 원래 선생께서 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두루 선생의 설을 인용하였으나 별도로 표시하지는 않았고, 4대의 서를 나누어 열 권으로 하였으니, 글은 때에 따라 다르다 해도 다스림은 같아, 성인의 마음이 글에 나타남이 마치 조화의 묘가 만물에 나타나는 듯하여, 정심(精深)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이 전(傳)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의 마음 속 세세한 움직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분들에 대한 글을 이 전으로 새겨 읽으면 가리키는 바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 기사(1209년) 3월 열엿새(16일)날 무이 채침(武夷蔡沈)이 머리말을 쓴다.28

 

(1) 정일집중(精一執中)

  ‘서문(序文)’의 요지(要旨)로 나타나고 있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내린 훈시인 ‘윤집궐중(允執厥中)’29에서 유래되었다. 이 요지에 대해 주희(朱熹)는, ‘정(精)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인심(人心)인지 도심(道心)인지 자세하게 성찰하는 노력이요, 일(一)은 올바른 도심을 오롯이 지켜내는 노력’30이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정(精)’은 사람들이 평소 어떤 일을 지각하고 또 처사할 때 자신의 마음이 과연 도덕적인지 아니면 감각적인지 그 낌새를 주의 깊게 살필 것을, ‘일(一)’은 이러한 내면 성찰 속에서 도덕심을 굳게 지켜 그로써 감각적인 마음을 올바르게 지도해 나갈 것을 요구하는 공부 방법론이다.31

  그리고 집중(執中; 중을 잡는다)은 정사(政事)의 처리를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32 여기에서 ‘중(中)’이란 정사처리 시에 지켜야 할 중도(中道)인 ‘중용(中庸)’33을 뜻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이건 또는 누구에게든 가장 알맞고 가장 적절한 도리(道理=理致)를 바르게 지켜 언제나 변함없이 일상에서 구현함을 가리킨다. 결국 ‘정일집중’이란 잡되지 않고 오직 하나인 순수한 마음(心)과 중(中)의 도(道)를 지키는 심법(心法)을 말한 것이다.

  이 심법에 대한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조선시대 유학자 허목(許穆, 1595∼1682)34은 이를 도해(圖解)화 시킨 바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인간성의 회복과 사회기강의 정립, 정도(政道)의 확립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다시 이것은 덕(德)·치(治)·정(政)·업(業)을 강령(綱領)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철학으로 특징지어진다.35 특히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제자백가에 관한 서적과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여러 가지 옛 경서(經書)를 섭렵하면서도 채침의 『서전』을 가장 중요시하였다.36 그것은 『서전』이 인간세상의 강상(綱常) 37윤리를 우주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자신이 생각했던 그만의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허목은 이 서적을 토대로 특수한 도해법을 만들어 심법(心法)을 설명하였으니,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가 그것이다.38

 

 

 

  이 ‘심학도’를 살펴보면, 허목은 인간의 선천적 마음상태를 욕심이 없고 텅 비어 신령스러우며 모든 이치를 갖춰 맑은 것으로 보았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때 변함없이 깨끗하고 곧게 유지되면 자연히 바른 판단에 따라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소한 일에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사(萬事)와 상통(相通)하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깨끗한 공적(公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이를 심학(心學)의 대요(大要)라고 하였다.

  특히 ‘요순우전수심법도’는 채침의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나타나고 있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을 도식화한 것으로, 인간이 천리(天理)에 부합될 수 있도록 선천적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수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인간이 이를 지키게 되면 모두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정치가 바로 서면서 곧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요약하면, 사람은 누구나 도(道)를 지키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 마음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을 이겨내기 어려워 인심(人心)39은 위태로워지고 도심(道心)40은 은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바른 마음을 지키는 데 정성을 다하고 일심(一心)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다. 순 임금은 우 임금이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집중(執中; 중을 잡음)’ 41이전에 힘써야 할 공부로 ‘사람의 마음은 도를 지키려 해도 이기적이어서 자칫하면 도에 어긋나게 되므로 위태롭고[人心惟危],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희미해지기 쉽다[道心惟微], 그래서 정신을 모으고 통일하여야만 도를 따를 수 있다[惟精惟一]’는 것을 부연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심(道心; 본연의 양심)으로 하여금 항상 몸의 주인이 되게 하여 인심(人心)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게 하면, 위태로운 인심은 안정되고 은미(隱微)42한 도심은 뚜렷이 드러나 분명해져 행동거지에 저절로 과불급(過不及)43의 차질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44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요(堯)·순(舜)·우(禹)가 전해 준 심법(心法)인 ‘정일집중(精一執中)’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군주가 ‘정일집중’이 전제(前提)된다면, 정사(政事) 처리에 있어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바른 예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결국 허목은 ‘요순우전수심법도’의 심법을 바탕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회복함으로써 올바른 덕치(德治)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군주의 책무가 막중함을 군왕 스스로 각득(覺得)하여 ‘성인(聖人)의 도(道)’인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을 시행해야 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2) 건중건극(建中建極)

  ‘정일집중(精一執中)’과 함께 ‘서문(序文)’의 요지(要旨)로 나타나는 것이 ‘건중건극(建中建極)’이다. ‘건중건극’은 『서전(書傳)』 「주서(周書)」‘홍범(洪範)’ 제 오(五)주 ‘임금이 중정(中正)의 도(道)로 표준을 세운다.(皇建其有極)’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홍범’은 『서전』 전체를 관통하는 정치 원리의 핵심을 담은 것으로,45 그 내용이 아홉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홍범구주(洪範九疇;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46라고도 한다. 『한지(漢志)』에 따르면,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이 큰 거북이의 등에 낙서(洛書)를 내려 주었는데, 거기에는 오행(五行)의 원리와 구주(九疇)의 대경(大經)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47

  ‘홍범구주’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은 오(五)주48 황극(皇極)이다. 황(皇)은 임금[君]이고, 극(極)은 북극(北極)의 극과 같은데 ‘지극지의(至極之義)’·‘표준지명(標準之名)’을 뜻한다.49 따라서 건극(建極)은 극이 중앙에 세워져[中立] 사방이 그 올바름[正]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임금된 사람의 한 몸은 만(萬)가지 교화(敎化)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말하고 행동하는 바가 모름지기 크게 중도(中道)에 맞아야 되고 치우치지 않는 지극히 바른 표준(標準)을 세워 천하의 모범(模範)이 되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부부·형제의 경우도 일체의 언동(言動)과 일에 당연함을 다하는 것이라 한다. 결국 임금이 몸소 수신(修身)의 지극(至極)함에 도달하여 만민(萬民)의 표준이 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서전』 ‘홍범’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五皇極 皇建其有極. 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 …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 曰皇極之敷言 是彛是訓 于帝其訓. 凡厥庶民 極之敷言 是訓是行. 以近天子之光 曰天子作民父母 以爲天下王.

  다섯 번째는 임금의 법칙을 세우는 것인데, 다섯 가지의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베풀면 백성들은 당신의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며, 당신과 함께 이 법칙을 지켜나가려 할 것입니다. … 백성들은 치우치거나 그릇됨이 없이 임금이 정하고 인도하는 법을 따라야 하며, 자신만이 좋아하는 일에만 치우치지 말고 임금이 정한 도리를 받들고 지켜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싫어한다고 하여 멀리하지 말고 임금이 이끌어 주는 길을 따라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임금 역시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거나 사사로운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돕거나 두둔하지 말아야 비로소 임금의 길은 평탄해지고 또한 평온해질 것입니다. 언행에 일관성이 있고 치우치거나 그릇됨이 없어야만 임금의 길이 바르고 곧을 것입니다. 임금이 제후와 신민(臣民)들을 모으고 거느리는 데는 법칙이 있어야 하며, 제후들과 신민들이 임금을 의지하고 받드는 데도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임금의 법칙에 관해 두루 올린 말을 널리 펴서 상도(常道)를 잃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다 따를 것이며, 하늘까지도 이에 호응할 것입니다. 비록 백성의 말이라도 법에 맞으면 거기에 따르고 그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천자의 빛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50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임금이 덕(德)으로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면, 자연 백성들은 임금의 법을 존중하여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데도 법칙이 있어야 하고, 신하와 백성이 임금을 따르고 받드는 데도 법칙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임금은 임금답게 직분(職分)을 다하여 올바른 길로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여야 하며, 신하와 백성들 역시 본연의 직분을 다함으로써 사사로이 좋고 나쁨에 좌우되지 말고 올바른 길을 따른다면, 이를 바른 ‘건중건극’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건중건극’이란 중용(中庸)의 도(道)를 잘 지켜서 인륜의 규범을 세우고 법칙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채침은 어쩌다 한번 ‘건중건극’을 실천했다고 해서 이상적인 덕치(德治)가 이루어졌다고 보지는 않았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이 아니듯이,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올바른 도심(道心)을 굳게 지켜내고[精一], 그 가운데 마음의 중도(中道)를 꾸준히 지켜나가야[執中] 한다고 한다. 즉 ‘정일집중(精一執中)’이 전제(前提)되어야만 ‘건중건극’이 꾸준히 계속해서 바르게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3.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의 실천

 

  『서경(書經)』의 전체적인 내용을 함축시켜 놓은 ‘서전서문(書傳序文)’의 내용은,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으로 표현되는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임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한다’라는 상제님 말씀은 무슨 뜻일까?

  도통(道通)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를 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상제님의 말씀대로라면 ‘서전서문’의 요지(要旨), 즉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이 수도생활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수도를 하기 위해서는 수도 법방이 있어야 하는데, 상제님의 진리를 받들어 50년 공부종필(工夫終畢)의 법(法)으로써 수도 법방을 짜 놓으신 분은 도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수도 법방에 따라 수도를 하고 또한 도통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도 법방에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의 가르침이 이미 녹아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정일집중(精一執中)’ - 양심(良心)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편에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내린 ‘윤집궐중(允執厥中)’이나 허목의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토대로 해서 ‘정일집중’을 살펴보면,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선(善)하나 도(道)를 지키려는 마음[道心]이 약하고 사심(私心)에 젖어 들기 쉬워 자칫하면 도에 어긋나게 되므로 위태롭고 희미해지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요(堯)·순(舜)·우(禹) 같은 성인(聖人)조차도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늘 사심을 경계하고 오직 한 마음으로 본연의 양심(良心)인 도심(道心)으로 귀일코자 했던 것이다.

  성인들도 이러할진대, 도통(道通)을 수도의 최고목적으로 삼고 있는 수도인들에게 양심의 중요성과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대순진리회 요람』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마음을 속이지 말라.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言語)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 두 가지가 있다. 양심(良心)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發動)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元來) 인성(人性)의 본질(本質)은 양심(良心)인데 사심(私心)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敢行)하게 됨이니 사심(私心)을 버리고 양심(良心)인 천성(天性)을 되찾기에 전념(專念)하라.51

  곧 양심은 수도에 있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심성(心性)이며, 인간의 마음이 사심의 지배를 받기 쉽기에 양심을 되찾는 수도에 진심갈력(盡心竭力)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이 사심(私心)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겸손한 자세로 수도에 임해야 한다. 물론 상제님께서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장 6절)고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양심(良心)을 지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가올 후천을 생각해 볼 때, 어렵고 힘들더라도 더욱 이를 실천코자 각골정려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건중건극(建中建極)’ -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의 확립

  『서경(書經)』 ‘홍범(洪範)’에서 살펴보았듯이 ‘건중건극’은 임금이 모든 일에 가장 알맞고 적절한 표준(標準)을 세움, 즉 치우치거나 편벽됨이 없는 공명정대함으로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임금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 백성들은 이에 감화(感化)되어 임금이 제시한 표준을 더불어 보존코자 한다는 것이다.

  포덕(布德)사업에 있어서도 각자 그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수도인 모두는 ‘건중건극’에서 말하는 임금의 위치, 즉 여러 사람을 통솔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때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편벽되지 않으면서 공평한 기준을 세우고 항상 먼저 모범을 보인다면, 자신을 따라 오는 후각도 저절로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앞의 ‘정일집중’에서 살펴본 양심(良心)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 수도인 내부에서 벌어지는 노력이었다면, 이 ‘건중건극’의 표준을 세우는 일은 수도인 외부로 표출되는 노력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건중건극’은 도주님께서 짜 놓으신 수도법방 중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체계52의 확립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체계의 확립은 무엇보다 서로 간의 신뢰(信賴)53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건중건극’의 두 가지 요소인 ‘공명정대함’과 ‘솔선수범의 자세’야 말로 상하간의 신뢰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도전님의 말씀을 살펴보더라도,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사정(私情)에 치우쳐 편애를 한다면, 서로 간의 불신(不信)을 불러일으켜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서로를 헐뜯게 되고54 결국 그 체계는 와해(瓦解)되고 만다. 국가를 세우기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통솔하는 자리에서 자신은 솔선수범하지 않고 언행(言行)만 내세워 아랫사람에게 강요만 한다면, 도리어 배신당하게 된다.55

  이와 같이 ‘건중건극’의 가르침, 즉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 확립은 수도인들이 후천 선경을 건설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하고도 가장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서전서문’은 주문(呪文)이 아닌 수행(修行)의 훈전(訓典)

  ‘서전서문’을 이해함에 있어 끝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상제님께서 ‘서전서문’을 많이 읽기를 권하셨지만, 이것은 ‘서전서문’을 주문과 같이 반복하여 계속 읽어라는 뜻은 아니다. 『典經』에 “… 상제의 부친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끊임없이 읽었으므로 지혜가 밝아져서 마을 사람들의 화난을 덜어 준 일이 많았도다”(교법 2장 26절)라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서전서문’을 많이 읽음의 결과는 곧 지혜가 밝아진다는 것이며 이것의 의미는 뒤의 문맥과 연관시켜 볼 때, 사리(事理)나 이치(理致)에 밝아짐을 뜻하기에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하고 …”라는 말씀을 곡해(曲解)하여 반복 암송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6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이 주는 가르침을 깨달아 이를 수행의 훈전(訓典)으로 삼아 실천 수도해 나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임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Ⅲ. 맺음말

 

  『서경(書經)』은 천명(天命)에 의해 왕위에 오른 임금이 하늘의 질서에 따라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관직을 두어 덕(德)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합심하여 이상적인 정치, 즉 덕치(德治)를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문(序文)’에서는 그 덕치의 실현에 관한 요지인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심법은 잡되지 않아 오직 하나인 순수한 마음(心)과 중(中)의 도(道)를 일컫는 것이다. 이는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인 ‘정일집중(精一執中)’과 중용(中庸)으로써 인륜(人倫)의 규범을 세웠던 탕(湯)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건중건극(建中建極)’으로 표현되어졌다. 상제님께서는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웅(聖雄)이 겸비해야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교법 3장 26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중고(中古) 이래로 군왕들에게 웅패(雄覇)의 술은 있었으나 ‘성인의 심법’이 부재(不在)했음을 지적하시고 이로 인해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지 못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57 그러나 상제님께서 군사위가 한 갈래로 되고, “요·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교운 1장 46절)고 하셨으니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는 ‘성인의 심법’을 닦은 사람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이상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따라서 상제님의 뜻을 받드는 수도인들은 ‘서전서문’의 요지에서 나타난 ‘성인의 심법’이 주는 가르침, 즉 양심(良心)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는 것과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體系) 확립임을 각성(覺醒)하고 이의 실천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주님께서 짜 놓으신 수도법방에는 ‘서전서문’에서 말하는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의 가르침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들어 있을 것이나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하고”라고 상제님께서 굳이 이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이것이 수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이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해서 실천 수행해야 함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01 고대로부터 진대(秦代)까지는 단지 ‘서(書)’라고 칭하다가 한대(漢代)부터는 ‘상서(尙書)’라고 칭했다. 여기서 ‘상서(尙書)’의 상(尙)은 ‘가장 오래된’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송대(宋代) 이후로는 『서전(書傳)』으로 알려졌다.
02 기원전 24세기경 중국 고대에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렸다는 성왕(聖王)으로, 본명은 당제요(唐帝堯)이다. 문헌에 의하면, 요가 70년간 세상을 다스린 후에 해와 달은 보석처럼 찬란했고 5개의 별들은 줄에 꿰인 진주처럼 영롱했으며 봉황이 궁전의 앞마당에 둥지를 틀었다. 수정이 언덕으로부터 샘솟듯이 흘러내렸으며 진주가 온 들판을 풀처럼 덮었다. 쌀은 풍작을 이루었으며, 2마리의 일각수(一角獸 ; 번영의 징조로 봄)가 수도인 평양(平陽)에 나타났다. 달력의 의미를 지닌 불가사의한 콩나무가 나타나 15일 동안 매일 하루에 하나씩 콩 꼬투리를 낳았고, 나머지 15일 동안 15개의 꼬투리가 하루에 하나씩 시들어갔다고 한다. 그가 제위에 있을 때 2가지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대우(大禹)가 이 홍수를 다스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가뭄이 일어났을 때 후예(后)가 땅을 불태우는 10개의 태양 가운데 9개를 쏘아 떨어뜨림으로써 세상을 구한 사건이다.
03 중국 최초의 시가(詩歌) 모음집으로, 공자(孔子)가 편집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를 문학적 표현의 정형이라고 일컬었다. 많은 주제를 포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재가 줄곧 “즐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상심하지 않기(樂而不淫 哀而不傷)” 때문이다. 주(周)나라 초기(기원전 11세기)부터 춘추시대 중기(기원전 6세기)까지 무려 305편을 담고 있다. 풍(風)·아(雅)·송(頌)으로 분류되며,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04 이에 대해 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史記)』 「공자세가」에서 “공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시(詩)’·‘서(書)’·‘예(禮)’·‘악(樂)’을 편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05 ‘분서갱유’란 서적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땅에 묻어 죽인다는 뜻이다.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는 법가(法家)인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종래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는 등 철저하게 법가사상에 기반을 둔 각종 통일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같은 법가 일색의 정치에 대해 유가를 비롯한 다른 학파들은 반대하고 공공연하게 자기 학파의 학설을 주장했다. 이에 시황제는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여 진(秦)의 기록, 박사관(博士官)의 장서, 의약·복서(卜筮)·농업 서적 이외의 책은 모두 몰수하여 불태워버렸다. 또 이것을 위반하는 자, 유교경전을 읽고 의논하는 자, 정치를 비난하는 자 등은 모두 극형에 처한다고 정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사건이다. ‘갱유’는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들의 신선사상에 열중한 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을 구하던 시황제가 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분서를 시행한 다음해에 방사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잡아들여 금령(禁令)을 범하고 요언(妖言)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웅덩이를 파고 460여 명을 생매장시켜버린 사건이다.
06 중국 제남(濟南) 출신으로, 진나라 때 박사(博士)를 지냈다.
07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이다. 그는 남달리 궁전 건축을 좋아한 것으로 전한다.
08 『한서(漢書)』 《예문지》에 ‘「고문상서」는 공자가 살던 집의 벽 속에서 나온 것이다. 무제(武帝) 말년, 노(魯)나라의 공왕(共王)이 궁전을 확장하기 위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다가 「고문상서」 25편과 더불어 『춘추(春秋)』·『논어(論語)』·『효경(孝經)』 등을 얻었다. 그것들은 모두 옛날 과두문자(文字)로 씌어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이가원, 『신판 書經』, 홍신문화사, 1997, p.11)
09 서진(西晉)의 제3대 황제(皇帝)인 사마치(司馬熾)를 말함. 재위(在位) 307~313년.
10 그 구성을 보면 요임금 때의 기록이 1편, 순임금 때의 기록이 4편, 하나라 때의 기록이 4편, 은나라 때의 기록이 17편, 주나라 때의 기록이 32편으로 되어 있다.
11 류승국, 『동양철학논고』, 성균관대 동양철학연구실, 1974, pp.4∼13
12 중국 삼국시대 오(吳)·동진(東晉) 및 남조(南朝)의 송(宋)·제(齊)·양(梁)·진(陳)을 합한 시대.
13 김학주, 『중국의 경전과 유학』, 명문당, 2003, pp.286~288
14 『서경』 「주서(周書)」 ‘강고(康誥)’
15 권중달 외 26인,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 2 - 동양 교양편』, 휴머니스트, 2005, p.53
16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하는 유가의 이상적인 도덕정치사상. 『서전』 ‘홍범’에서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는 평평할 것이다. 반대됨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면 임금의 길은 바르고 곧으리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맹자는 덕치를 왕도정치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은 한(漢)나라 이후의 중국을 비롯하여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동양 각국에서 치자(治者)의 으뜸 정치사상이 되어 왔다.(『유교대사전』, 유교사전편집위원회, 1990)
17 순자(기원전 336~238경)는 이름이 황(況), 존칭은 경(卿)이며, 손경(孫卿)이라고도 불렸다. 전국 시대 후기 조나라의 속국인 순()에서 태어나, 공자의 제자인 자하와 중궁 등의 학통을 이어 유가 경전을 수학하였다. 그는 제자백가의 학설을 섭렵한 학문적 노력으로 스스로를 유가의 위대한 계승자로 자처하였으나, 그의 직계제자 한비자와 이사는 법가로 흘러 스승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한나라 이후 유가의 경학은 대부분 순자를 계승하였다.
18 공영달(574~648)은 당(唐)나라 때의 학자로 자(字)는 충원(沖遠)이다. 수(隋)나라의 학자 유작(劉)의 제자이며 당나라 태종의 명으로 안사고, 왕공, 사마재장, 왕염 등과 함께 오경(五經)의 훈의(訓義)를 편찬했다. 180권의 책이 완성되자 태종이 『오경정의(五經正義)』라고 이름 지었다.
19 권중달 외 26인, 『세계의 고전을 읽는다 2 - 동양 교양편』, 휴머니스트, 2005, pp.41~42
20 김학주, 『중국의 경전과 유학』, 명문당, 2003, p.298
21 유명종, 『주자의 인간과 사상』, 동아대학교 석당전통문화연구원, 2000, p.305
22 김학주, 『중국의 경전과 유학』, 명문당, 2003, p.300
23 심대윤, 『한국사상과 문화 18권 - 서경채전변정에 대한 연구』, 한국사상문화학회, p.231
24 이름은 계(癸) 또는 이계(履癸)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발(發)의 아들이다. 발이 병으로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중국역사상 유명한 폭군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말희’라는 미녀에게 빠져들었다. 매일 잔치와 놀이에 정신이 팔려 정치는 엉망이었다. 충신들이 옳은 말을 하면 목을 베었다. 5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추방되어 굶어 죽었다.
25 이름은 제신(帝辛), 제신수(帝辛受)이다. 아버지 제을(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은나라의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달기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인육이라고도 함)를 매달아 놓고[肉林] 달기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주지육림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지형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7년에 걸쳐 높이 180m, 둘레 800m의 호화궁전 녹대(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여러 제후들과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주왕은 녹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
26  태갑(太甲)은 상(商)나라의 제2대 임금인 태종의 이름. 그는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의 손자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탕왕이 세운 제도를 무너뜨렸다. 『서경』의 「태갑(太甲)」 상편에 따르면, 탕왕을 도와 상나라를 세운 재상 이윤(伊尹)이 그 잘못을 지적하며 고치도록 간언하였다. “선왕께서는 아직 날이 밝기도 전부터 크게 덕을 밝히고자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셨으며, 널리 뛰어나고 어진 이들을 구하여 후손들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先王昧爽丕顯, 坐以待旦, 旁求俊彦, 啓迪後人). 선왕의 명을 어겨 스스로 멸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삼가 검약의 덕을 밝혀 길이 도모하소서.”라고 간언했으나, 태갑은 여전히 제멋대로 하였으므로, 이윤은 그를 동(桐)이라는 곳으로 쫓아 버렸다. 태갑이 그 곳에서 잘못을 뉘우쳐 3년 동안 어질고 의로운 일을 행하였으므로, 이윤은 그를 다시 권좌에 앉혔다.
27 중국 주(周)나라 2대 왕.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사람으로 이름은 송(誦)이며, 무왕(武王)의 아들이다. 무왕이 죽었을 때 성왕이 어렸으므로 무왕의 아우 주공 단(周公旦)이 섭정(攝政)이 되었다(일설에는 즉위하였다고도 한다). 이를 계기로 은(殷)나라의 왕족 무경녹부(武庚祿父)와 무왕의 아우인 관(管), 채(蔡) 형제의 반란이 일어났다. 주공은 이를 진압하고 다시 성왕과 함께 동이(東夷)로 원정하였다고 한다. 성왕은 귀환한 뒤, 허난(河南)의 낙읍(洛邑)에 새로 동도(東都)를 정하고, 동방제국(東方諸國) 지배의 중진으로서 주공을 그 곳에 있게 하였다. 주공은 섭정 7년에 성왕에게 정사를 넘겨 주었다고 한다. 성왕은 미자계(微子啓)를 송(宋)나라에, 강숙(康叔)을 위(衛)나라에 봉하는 등 기초를 다지고, 주공 단과 소공 석(召公奭)의 보좌를 받아 치세에 힘썼으므로, 그로부터 강왕(康王)시대에 걸쳐 주나라의 성시(盛時; 나라가 왕성한 때)를 실현하였다고 한다.
28 각주 27의 책, p.243
29 정성스런 마음으로[允] 그[厥] 중정한 도를[中] 잡다[執].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오직 정신을 하나로 모아 진실로 그 중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30 주희, 『중용장구(中庸章句)』 ‘서(序)’
31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p.269
32 『위의 책, p.272
33 주희(朱熹), 『중용장구(中庸章句)』 2章. “中庸者 不偏不倚無過不及而平常之理 乃天命所當然精微之極致也 惟君子 爲能體之 小人 反是.(중용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않으며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없어서 평상(平常; 언제 어디에나 있고 영원불변 함)한 이치이니, 이에 천명에 마땅히 그러한바 정미롭고 은미함의 극치이다. 오직 군자라야 능히 이를 체득할 수 있고 소인은 이에 반대된다)”
34 허목은 『典經』 공사 2장 13절과 제생 9절에서도 나타나는 인물이다. 자(字)는 문부(文父) 호(號)는 미수(眉)로, 조선 중기 학자이다. 그는 사상적으로 이황(李滉, 1501~1570) 정구(鄭逑, 1543~1620)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았으며, 대표 저서(著書)로는 『기언(記言)』과 『동사(東史)』가 전해지고 있다.
35 『한국철학사 中』, 한국철학회, 동명사, p.324
36 박창규, 『미수 허목의 경학사상에 관한 연구』, 공주대대학원(석사), 2002, p.23
37 삼강(三綱)과 오상(五常).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38 현상윤, 『조선유학사』, 현음사, 2003, pp.338~339
39 사람의 마음
40 도(道)를 지키려는 마음
41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양심) 상에서 그 가운데[中]를 찾아 그것을 지킨다[執].
42 사람의 눈에 잘 안 띄는 미묘한 일
43 ‘중용(中庸)’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면, 누구에게나 가장 알맞고 모든 일에 가장 적절한 도리이며,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다는 뜻을 갖고 있다.
44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pp.271~272
45 김성윤, 『부산사학 제 40·41 합본 - 18∼19세기 노론학자의 홍범이해와 그 정치적 의미』, 부산경남사학회, 2001, pp.20~22
46 여기서 ‘홍’은 크다(大), ‘범’은 법(法)의 의미로서 ‘홍범’은 곧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을 가리키며, ‘주(疇)’는 종류[類]라는 의미로서 ‘구주’, 곧 아홉 가지 종류라는 뜻이다.(『유교대사전』, 유교사전편집위원회, 1990) 다음은 『서전』 「주서(周書)」편에 나오는 ‘홍범구주’를 요약한 것이다.  (一)오행(五行) :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를 말한다. 이는 모두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자료이다. 구주 중에 오행을 제일 앞에 둔 것은 인간은 우선 생활의 공급원을 잘 파악하고 그 수요를 충족시켜야만 육신의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二)오사(五事) : 공(恭)·종(從)·명(明)·총(聰)·예(睿)이다. 즉 모습은 공손하게 하고, 말은 믿음직스럽게 하며, 사물은 분명히 관찰하고, 소리는 바르게 들으며, 생각은 슬기롭게 하는 것이다. 오행이 인간 외적인 물질이라면 오사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한 내적 태도이다.   (三)팔정(八政) :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데 필요한 행정부서이다. 식(食; 식량 생산)·화(貨; 생필품)·사(祀; 종교적 및 국가적 의식), 사공(司空; 토목건설)·사도(司徒; 교육)·사구(司寇; 치안)·빈(賓; 외교)·사(師; 군사)가 그것이다.       (四)오기(五紀) : 생활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성신(星辰; 1辰은 2시간)·일(日; 12辰)·역수(曆數; 세월을 모아서 계산해 나가는 것)가 그것이다.      (五)황극(皇極) : 홍범구주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다. 황극(皇極)은 임금이 몸소 수신(修身)의 극처(極處)에 도달하여 만민의 표준이 된다[建中建極]는 뜻이다. ‘황’은 크다[大], ‘극’은 가운데[中]란 뜻이 있다. 황극의 정신은 인간이 천지의 생물지심(生物之心)을 품수 받아 태어났으므로 그 지극한 본심을 보존하여 천지지심(天地之心)으로 행동하는 데에 있다. 아울러 채침이 주석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며, 후에 그는 이를 토대로 『홍범황극』이라는 저서를 집필하게 된다.  (六)삼덕(三德) : 정직(正直)과 강극(剛克)과 유극(柔克)이다. 그것은 특히 군왕이 지켜야 할 덕이다. (七)계의(稽疑) : 복서(卜筮)하는 사람을 선발하여 일을 맡기고 점치도록 하는 것이다.  (八)서미(庶微) : 농사와 직결되는 기후의 전조를 아는 것이다. 우(雨; 비옴)·양(暘; 개임)·환(煥; 더움)·한(寒; 추움)·풍(風; 바람)으로 마치 천기(天氣)를 보는 것과 같다.   (九)오복(五福)·육극(六極) : 오복육극은 위의 여덟 가지 대법이 잘 시행되었는가 여부에 따라 백성들이 받는 길흉화복이다. 백성이 오복을 받으면 정치가 잘 된 것이고 육극을 받으면 정치가 그릇된 증거이다. 오복은 수(壽; 오래 사는 것)·부(富; 부유한 것)·강녕(康寧; 건강하고 평안한 것)·유호덕(攸好德; 좋은 덕을 갖춘 것)·고종명(考終命; 편안하게 죽는 것)이며, 육극은 흉단절(凶短折; 요절하는 것. ‘흉’은 7세 전의 죽음, ‘단’은 20세 전의 죽음, ‘절’은 30세 전의 죽음)·질(疾; 질병)·우(憂; 근심)·빈(貧; 가난)·악(惡; 죄악)·약(弱; 허약함)이다.
47 『사기(史記)』에서는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와 싸워 이긴 후, 기자(箕子, ?∼?)를 주(周)나라로 데리고 와 하늘의 도[天道]를 물었는데, 이때 기자는 옛 정치에 쓰였던 ‘홍범’으로 무왕에게 대답했다고 한다.(권덕주, 『서경』, 동원출판사, 1995, p.232)
48 기자(箕子)가 오(五)주에 관해 말하기를, “임금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이 다스리는 법을 세우는 것으로서[建極], 다섯 가지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면 그 백성들도 당신의 법칙을 따라 법칙을 지켜 줄 것입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음란한 벗을 두지 않고 관리들도 사사로운 덕을 두지 않음은 임금이 법칙을 시행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권덕주, 『서경』, 동원출판사, 1995, p.236)
49 “극(極)은 복(福)의 근본이며, 복(福)은 극(極)의 효험이니, 극(極)을 세우는 것은 복(福)이 모여지는 것이다. 인군(人君)이 위에서 복(福)을 모음은 자기 몸을 후(厚)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복(福)을 펴서 서민(庶民)들에게 주어 사람마다 보고 감동하여 화(化)하게 하니 이른바 펴서 준다는 것이요, 당시의 백성들 또한 모두 군주(君主)의 극(極)에 대하여 더불어 보수(保守)해서 감히 실추하지 않으니 이른바 보존함을 준다는 것이다. 황극(皇極)을 군주(君主)와 백성이 서로 줌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 세주(細註))
50 지윤환, 『신판 書經』, 홍신문화사, 1997, pp.284∼287
51 『대순진리회 요람』, pp.18∼19
52 “체계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도(道)를 닦는 것”(『대순지침』, p.65)
53 “체계는 도심(道心)으로써 바로 확립되고, 도심은 위아래의 도인들이 서로 믿으며 변하지 않고 신뢰하는 데에 있음을 모든 도인들은 각별히 유의하기를 바란다.”(위의 책, p.64)
54 “믿음의 회복에 힘쓰라. 믿음은 서로를 믿게 하고 모략과 중상으로 사람을 헐뜯지 못하게 하느니라. 믿음 속에서 서로를 만나게 하고 서로를 중히 여기게 되느니라.”(위의 책, p.79)
55 “자신은 실천하지 않고 수반들에게만 강요한다든지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도리어 배신당하는 처사가 된다.”(위의 책, p.47)
56 구천상제님을 신앙하는 교단(敎團)을 살펴보면, 선도교(仙道敎), 순천교(順天敎), 박인암교(朴仁菴敎), 모악교(母岳敎) 등이 ‘서전서문’을 주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57 『서경』의 내용을 보더라도 요(堯)·순(舜)·우(禹) 시대는 사회가 안정적이어서 심법(心法)만으로도 유지가 되는 형태였다. 그러나 점점 사회 집단이 체계화 되고 문화가 발전하는 탕(湯)ㆍ문왕(文王)ㆍ 무왕(武王)부터는 그 심법의 부재가 심화(深化)되면서 법(法)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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