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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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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체육대회 백일장 수상작 : 시련을 겪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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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겪고 나서

 

 

새마을 2방면 교감 현태임

 

 

 

  안개 속을 헤매듯 아련히 떠오르는 지난날의 추억들을 돌이켜봅니다. 초년에는 강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어 애국가만 흘러나와도 사색에 잠겼고, 영화 같은 미래에는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리라는 보람찬 꿈을 지녔던 20대의 청춘. 공부를 해서 시인(詩人)이 되어야지 하는 부푼 꿈도 있었지만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영문타자 학원에 다니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아이를 낳고 그런대로 몇 년은 순순히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4대 조상님의 묘소를 이장한 후로 집안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집안은 매일 매일 시끄럽고 어수선하기만 했습니다. 남편은 바람이 나서 직장마저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여자를 얻어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가끔 한 번씩 집에 오면 집세로 받아놓은 돈마저 챙겨가곤 했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남편의 잘못을 지적하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긴커녕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과수원을 팔게 되었고 살고 있던 집마저 부자간의 빚 때문에 경매에 넘어가 제 값을 못 받고 처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도 아까운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내일은 이혼서류를 해서 법원에 가야지 하다가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맥이 풀려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9년만에 둘째가 태어났고 작은댁에도 남매가 태어났지요. ‘어떡하면 내가 이 집에서 벗어날까?’, ‘아니면 죽어버릴까?’ 이런 생각을 하며 가슴속의 공허를 메울 길이 없어 헤매고 있을 때 도(道)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셋째 아이 4살 되던 해에 한 집에 살았던 선각을 만나 음력으로 80년 7월 9일, 양력으론 8월 19일 녹명지를 올렸습니다. 선각께서 입도일은 후천 생일이 된다기에 꼭 기억하라고 해서 음력ㆍ양력을 꼭 기억했습니다. 매일매일 선각과 칠성동 회의실에 다녔는데 남편이 그곳에 찾아와 소란을 피운 적도 있었습니다. 선각께서 제가 입도한 달에 또 한 사람을 포덕해서 우리 세 사람은 빠지지 않고 포덕하러 다녔습니다. 그때 그분이 지금은 모 방면 수임선감이 되셨지만 ….

  4살 된 셋째를 업고 걸어서 다녔습니다.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빵 하나씩 사서 먹고 포덕을 제법 했습니다. 아침 일찍 시험지 배달을 해서 곗돈을 넣고 중곡동 도장과 독립기념관 건립에도 유공하며, 정말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의 공허는 서서히 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을 다 입도시켰는데, 특히 친정어머니께서는 “자식이 좋다고 하는데 해야지.” 하시면서 축시(丑時) 기도(祈禱)도 모시고 성(誠)도 잘 모셨습니다. 이젠 남편도 입도시키려고 남편이 온다는 날 입도식 준비를 했습니다. 남편이 왔기에 한복을 내어놓고 “당신 칠성줄 센데 칠성전과 조상전에 절을 하고 정성을 좀 들이세요.” 했더니, 처음에는 안 한다고 하다가 계속된 설득에 입도식을 하게 되었는데 너무 너무 공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입도한 그 달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던 작은댁(후처)과 싸우고 헤어졌다고 하면서 짐 가방을 둘러멘 채 두 아이 손을 잡고 온 것이 아닙니까.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게 있었는데 작은댁도 와서 자기 아이 달라고 소리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남편과 아이 다 데리고 가라고 했더니, 작은댁은 아이만 데리고 갔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과 어찌 헤어졌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당신이 좋은 사람이지 그 여자는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러갔고 … 가정의 바람은 제가 선무에서 정리 임명을 모시면서 수그러들었습니다. 그후 선사가 되었을 때는 후각들과 반 이상 헤어져 마음의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무ㆍ교령을 거치고 방면의 인연자(因緣者)들이 다시 모여지면서 96년에는 상급임원 임명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선사, 선무를 비롯해 수반들과 화합단결하여 웃으면서 도장 수호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8년간의 수호를 설 때 남편은 가정을 잘 돌보고 외조도 잘 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덕화(德化)에 감사드리며, 저에게 고맙게 대해주신 분들의 은혜도 갚겠다는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수도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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