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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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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삼(參) 별을 관장하는 합연(蓋延)신명

삼(參) 별을 관장하는 합연(蓋延)신명

 

 

글 교무부

 

  합연[蓋延:?~39, 자(字)는 거경(巨卿)]은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그는 어양군 요양현(漁陽郡要陽縣:현 하북성 풍녕만족자치현 소재) 사람으로 키가 8척이나 되었고, 3백 근을 거뜬히 활시위에 먹여 쏠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 용력(勇力)을 숭상하는 변방(邊方)02의 풍속 때문에 일찍부터 이름이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합연은 군(郡)의 여러 하급관리와 주(州)의 종사(從事)직을 두루 거쳤는데, 어느 곳에 있던 자기 직분에 힘썼다.

  팽총(彭寵)03이 군(郡)의 태수가 되었을 때, 그를 영위(營尉)로 임명하여 호군(護軍)의 역할을 맡겼다. 그러던 중, 하북 지방에서 왕랑(王郞:?~24)04이 봉기하였는데, 관속(官屬)들 대다수가 왕랑을 따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태수 팽총 또한 그리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합연은 이 결정에 반대하여 오한(吳漢:별을 관장)05과 함께 광무제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광아(廣阿)로 내려갔다. 이때 그는 광무제로부터 편장군(偏將軍)을 제수받고 건공후(建功侯)에 봉해졌다. 이후 그는 하북지방 평정에 주력하였고 그 결과 광무제 즉위 후에는 호아장군(虎牙將軍)이 되었다.

  26년(건무 2)에는 다시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졌으며, 광무제의 명으로 오창(敖倉)을 공격하고 군대를 돌려 산조(酸棗)·봉구(封丘)까지 쳐서 모두 함락시켰다. 그해 여름 합연은 부마도위(駙馬都尉) 마무(馬武:翼별을 관장), 기도위(騎都尉) 유융(劉隆:軫별을 관장), 호군도위(護軍都尉) 마성(馬成:亢별을 관장), 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壁별을 관장) 등을 이끌고 유영(劉永)을 정벌하기 위해 떠났다. 합연은 우선 양읍(襄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마향(麻鄕)을 쳐부수고는 드디어 수양(陽:현 하남성 상구현 남쪽)에서 유영을 포위하게 되었다.

  유영(劉永)은 전한(前漢)시대 양왕(梁王)의 아들로 왕망(王莽)06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나서 한(漢)의 제후왕을 모두 폐했을 때 왕위를 잃었지만, 갱시제(更始帝:劉玄)07가 즉위하자 다시 양왕의 지위를 이어 받은 인물인데, 갱시제가 25년(건무 원년) 9월 패망하자 11월에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수도를 수양(陽)에 정했다. 하북지방을 배경으로 자립한 광무제는 낙양(洛陽)에서 후한을 건국(25년)한 이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웅(群雄)들을 평정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대결한 인물이 바로 이 동남쪽에 있던 유영(劉永)이었던 것이다.

  수개월의 대치 끝에 합연이 야음을 틈타 사다리를 놓고 성 안으로 공격하니 유영은 크게 놀라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합연의 추격에 결국 군대를 버리고 초(:현 안휘성 박현)로 도주하였다. 마침내 합연은 패(沛:현 강소성 풍현, 한고조의 고향), 초(楚:현 강소성 서주시), 임회(臨淮:현 강소성 우이현) 일대까지를 평정하고 한고조[劉邦]의 사당08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그 사당에 색부(嗇夫)·축재(祝宰)·악인(樂人)이라 불리는 관리인을 두었다.

  27년(건무 3)에 수양성(陽城)이 다시 반기를 들고 유영을 맞아들이자, 합연은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수양성을 포위하였다. 합연이 들판의 곡식을 모두 거두어들인 관계로 백일이 지나자 유영은 식량부족으로 인해 성 밖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고, 합연은 이들을 추격해 군수품을 모두 노획했다. 결국 유영은 부하장수에게 살해되었으며 그의 동생 유방(劉防)이 성(城)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33년(건무 9) 외효(隗囂)09가 죽자 합연은 서쪽으로 나아가 가천(街泉), 약양(略陽), 청수(淸水)를 모두 평정했다.

  35년(건무 11)에 합연은 중랑장(中郞將) 내흡(來)과 함께 하지(河池:현 감숙성 휘현)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고 병(病)을 얻어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광무제는 그에게 좌빙익(左馮翊)10이란 벼슬을 제수하였고 장군의 직위는 그대로였다.

  37년(건무 13)에는 격이 더 높아져 만호(萬戶)의 식읍이 봉해졌으나, 39년(건무 15) 관직에 있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그의 고향인 어양군(漁陽郡)은 당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국경지대였다.

03 북쪽 변방지대인 어양군(漁陽郡) 일대를 거점으로 하던 군웅(群雄). 광무제의 명을 받고 출동한 좨준(祭遵:별을 관장)과 일 년여를 대치하다가 29(건무 5)에 자신의 노예에게 살해당하였고, 그 땅은 좨준에 의해 평정되었다.

04 장안의 점술가였는데 자신을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자여라고 속여 반란군 세력을 규합한 다음 이를 토대로 하북 일대를 장악함.

05 본래 남양군(南陽郡) 사람이었으나 왕망(王莽)치하에서 법을 어기고 어양군(漁陽郡)으로 망명해 있었음.

06 AD 5년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 宣帝의 현손)을 세운 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 후 AD 8년 유영마저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이라 하여 황위(皇位)를 완전히 찬탈하였다.

07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王莽)정권에 대항하여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유()씨 일족들의 시도는 유수(劉秀:광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23년에 유현(劉玄:갱시제)은 수도를 낙양에 정하고 연호를 갱시(更始)로 하면서 한나라를 계승하였지만 지지기반이던 농민군 세력이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불과 2년 뒤인 25년에 권력을 잃고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한나라의 부활도 실패로 돌아갔다.

08 한고조 유방의 사당은 현재 강소성 서주시 패현 동쪽에 있다. 이곳은 유방이 최초로 하급관리 생활을 시작한 곳으로 과거 지명은 사수정(泗水亭)이었으며 당시 유방의 관직은 정장(亭長)이었다.

09 농서(西 : 현 감숙성 서쪽)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군웅의 하나.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67, 좨준(祭遵)편 참조.

10 한나라 때, 수도권 지역을 다스리는 삼보(三輔)의 관직(경조윤, 좌빙익, 우부풍)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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