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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반상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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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민을 낳을 때 민을 넷으로 구분했다. 사민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사이니 이것이 곧 양반이다. (중략) 진사가 나이 서른에 처음 관직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음관(蔭官)이 되고, 잘 되면 남행(南行)으로 큰 고을을 맡게 되어, 귀밑이 일산의 바람에 희어지고, 배가 요령 소리에 커지며, 방에는 기생이 귀고리로 치장하고, 뜰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궁한 양반이 시골에 묻혀 있어도 무단을 하여 이웃의 소를 끌어다 먼저 자기 땅을 갈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잿물을 들이붓고 머리끄덩을 희희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부자는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 버렸다. 부자는 평생 다시 양반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양반전』 中에서-

 

  이 글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양반계급의 위선과 폐해를 풍자한 『양반전』의 한 부분이다. 본래 양반(兩班)은 고려·조선시대 신분계층의 하나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15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벼슬을 하지 않은 자들은 결코 양반이라 부르지 않았다. 이 시기의 양반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태어나면서 저절로 부여받게 되는 신분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으로 얻어내는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반들은 동족 마을의 형성이나 재산 상속을 통해 당대에만 한정되었던 양반의 지위를 세습하고자 하였고, 16세기 이후부터는 각각의 신분들을 집안 혈통에 따라 구분하고, 양반이 아닌 계급들을 심하게 차별하게 되었다. 그들은 존비귀천(尊卑貴賤: 지위, 신분 등의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이라는 성리학적 윤리를 내세워 다른 신분들과의 교류 또는 혼인을 금지시키고, 그들만이 벼슬길에 나아가 권력을 잡고 각종 세금과 부역의 부담도 지지 않았으며, 특히 권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많이 취하였다.

  이렇게 양반들의 지위가 급상승하게 됨에 따라 이들이 누리는 특별한 혜택도 자연히 형성되었다. 양반이 죄를 짓더라도 마을의 수령조차 임의로 구속하거나 형벌을 가할 수 없었으며, 평민에게 하는 것과 같은 고문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서울에 있는 의금부와 같은 특별한 법정만이 양반의 죄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양반을 모욕한 자, 의관이 분수에 넘는 자, 양반과 대등하게 말을 탄 자가 있으면 마을에서 규탄하고 죄의 경중을 가렸다. 평민들은 길을 가다 양반들과 마주치게 되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경의를 표시해야만 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양반을 모욕한 죄나 행차를 방해한 죄로 길가에서 양반의 수행원에게 모진 매질을 당해야 했다. 가벼운 죄는 매를 열 대 때리고 중벌은 스무 대를, 무거운 벌은 서른 대를 때리고 그 사람에게는 물과 불을 빌려 주지 않았다. 양반의 배타적인 행동은 양반 간에도 이루어졌으니, 적서간의 엄격한 예법을 적용하여 서얼은 적형제와 나란히 앉을 수 없었고, 길에서도 감히 말을 나란히 타지 못하였다. 양반끼리도 이 정도였으니 반상간의 예법이야 얼마나 엄하고 혹독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불합리한 신분차이 때문이었을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평민들은 너나없이 양반신분을 지향하였는데, 때마침 조선후기에 접어들자 국가에서는 궁핍한 국가 재정을 채우기 위해 돈이나 물건을 바치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거나 혹은 신분을 해방시켜 주는 정책을 펼침으로서 양반의 수는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관직 매매, 족보위조로 인하여 양반의 수는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어느덧 양반의 수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이루게 되자, 세금과 역(役)의 부담은 모두 빈농층에게 몰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졌다. 

  드디어 1894년이 되자 갑오개혁(甲午改革)이 공포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고 양반제도도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되었다는 국가의 공식적인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그 변화에 적응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노비의 경우, 특히 한 집에서 주인과 함께 생활하는 사환(使喚)노비의 경우에는 법적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주인과 대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비들이 자유민으로 살아갈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제로 가장 큰 이유는 신분 차별의 관습이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사회가 오랜 세월 동안 신분 차별의 폐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신분제를 타파한다는 나라의 발표는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는 쉽사리 없어질 것 같지 않던 반상의 구별을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옛날에 비천한 사람들이 그토록 듣고자 갈망했던 ‘양반’이라는 호칭도 단지 상대를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말로 바뀌어져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과 수십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그 관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양반이라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소위 상류층이라고 하여 학벌이나 재력, 권력에 의한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후천 청화세상(淸華世上)이 열리기 전까지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구도의 계급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이로 인해 많은 사회문제가 노출될 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우리는 상제님의 말씀을 잘 실천해서 세상을 개벽시키는 큰 일꾼이 되어야겠다.

  지금은 해원시대니라. 양반을 찾아 반상의 구별을 가리는 것은 그 선령의 뼈를 깎는 것과 같고 망하는 기운이 따르나니라. 그러므로 양반의 인습을 속히 버리고 천인을 우대하여야 척이 풀려 빨리 좋은 시대가 오리라.            

 -교법 1장 9절-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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