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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隨筆)
“황희 정승 댁 속곳춤과 나물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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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댁 속곳춤과 나물밥”

  요즘 초등학교에 입학한 8살짜리 아들인 우리 아이가 떼쓰는 일이 많아졌다.

  친구들이 학교에 색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오거나 유행하는 만화그림이 그려져 있는 옷을 입은 걸 보게 되면 집에 와서 그것과 똑같은 것을 사달라고 울고 불며 보채곤 한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주위에 널려있는 풀잎과 흙덩이, 돌들이 가장 좋은 장난감이었으며, 친척이나 이웃집에서 얻어다 주는 옷들도 감지덕지하며 잘 입었었다.

  물론 세월이 흘러 지금과 과거를 비교한다는 것이 고리타분하다 할 수도 있지만 경제가 어려워 제2의 IMF라고 하는 지금 근검절약을 상기하고 생활화하는 것은 지금이나 앞으로도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이러한 근검절약을 되새길만한 이야기로 황희 정승의 일화들이 가장 안성맞춤인 것 같다.

  황희 정승께서는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셨으며 조선 초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 4분의 임금을 모신 영의정으로서 우리 역사상 가장 청렴하고 검소한 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세종대왕으로부터의 신임은 남달라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황희 정승의 검소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인해 가장 고생이 많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분의 부인이었다. 하루는 정승부인들끼리의 봄나들이 모임이 있었다. 

  이에 부인은 입고 갈만한 옷이 없어 결국 헤져서 여기저기 꿰맨 옷이지만 깨끗이 빨아서 입고 가게 되었다. 가서보니 다른 부인들은 가장 좋은 비단으로 새 옷을 해 입고 와서 서로 옷을 자랑하면서 황희 정승 부인에게 영의정 부인으로서 품위를 지키지 못한다고 비웃는 소리까지 하는 걸 부인께서는 들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점심시간이었다. 모두들 도시락을 펼쳐 놓는데 산해진미의 음식들을 준비하여 온 것이다. 황희 정승 부인은 차마 자신의 도시락을 펼칠 수 없어 저쪽으로 들고 가 혼자 먹고 있었다. 그러자 다른 부인들이 영의정 부인의 도시락 구경을 하자며 와서 들추어 보고 모두들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었다. 부인의 도시락에는 꽁보리밥과 나물무침이 전부였던 것이다. 얼굴이 붉어진 부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이때 황희 정승과 더불어 청렴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좌의정 맹사성의 부인이 뒤늦게 도착하여 이 사태를 파악하고 다른 부인들에게 화를 내었다. “어디서 감히! 나라의 녹을 먹는 정승의 부인으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황희 정승과 그 부인을 욕되게 하느냐? 너희들의 비단옷과 기름진 음식들이 바로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피와 땀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하며 호통을 치며 훈계를 하자 모두들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하였다. 그런 후에 기운 옷을 입은 두 부인은 서로의 나물밥을 나누어 먹었다. 이는 청렴결백하고 검소하기로 이름난 두 정승 부인의 생활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일화이다.

  또 한 가지 일화로 황희 정승이 90여세가 되어 임종을 맞을 시에 부인이 그 옆에서 한탄하는 소리를 하였다. “대감께서 돌아가시면 우리 큰딸을 어찌 시집보낼지 걱정입니다. 대감께서도 없는 마당에 집안이 궁색하여 혼수하나 장만할 길 없는 형편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은 만면에 웃음을 띄며 예언같은 말을 하였다.

  “부인 너무 걱정마시오. 남대문시장 광대가 우리 딸 시집을 잘 보낼 터이니 염려놓고 기다려 보시오.” 이렇게 그냥 기다려 보면 알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아무 대책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종대왕께서 평복을 하고 몰래 남대문 시장을 시찰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광대의 줄타기 놀이가 한참 신명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광대는 맵시나는 무관의 전복차림에 전모를 쓰고 허리에 파란띠를 두른 뒤 양손에 부채와 수건을 들고 북장단에 맞추어 줄타기를 하였다.  한참을 그런 후 광대는 나비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광대는 한쪽 손에 들었던 수건을 왼쪽 엉덩이에 치고 또 수건을 오른쪽 엉덩이에다 쳤다. 광대는 줄 위에서 재담을 늘어놓았다. “이 춤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희 정승 댁 속곳춤입니다. 한번은 마님이 입고 또 한 번은 아씨가 입고, 이렇게 번갈아가며...” 그렇다. 얼마나 살림이 궁색하길래 속옷 한 벌로 어머니와 딸이 외출할 때마다 번갈아 입었을까? 이를 본 세종대왕은 큰 충격을 받고 나랏일에 평생을 헌신한 재상의 집안이 이런 형편임을 감안하고 대왕께서 직접 훌륭한 집안에 중매를 서주고 또한 혼수도 공주를 시집보낼 때 쓰이는 혼수품으로 준비하여 직접 하사하여 주셔서 무사히 황희 정승의 딸을 시집가게 해주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설마 속옷 한 벌로 번갈아 입었을까마는 임금 다음으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도 검소하게 살았던 황희 정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를 통해 우리 수도인들은 현대의 물질문명의 풍족함 속에서 황희 정승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밥알 한 알이라도 버려지는 것을 나무라셨던 도전님의 근검절약 정신을 상기하고 수도인으로서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하찮은 물건이라도 아껴 쓰고 재활용하는 습관을 길들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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