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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화고
위기를 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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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님께서는 겁액(劫厄)을 극복하는 데 성공이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함지사지이후(陷之死地而後)에 생(生)하고 치지망지이후(致之亡地而後)에 존(存)한다.”(『대순지침』p.94)는 옛사람의 말을 인용해 주신 바 있다. 이는 중국 고대의 병법서인 『손자병법(孫子兵法)』「구지(九地)」편에 실려 있는 말이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군사들은 멸망할 처지에 던져진 후에야 용감하게 싸워서 목숨을 보존할 수 있고, 사지(死地)에 빠져본 후에야 힘껏 싸워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법의 원리를 실전에 잘 활용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람이 바로 한신(韓信: ?~196)이다.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의하면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제위에 오르기 2년 전인 204년에, 명장 한신은 유방의 명령에 따라 장이(張耳)와 함께 위(魏)나라를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수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조(趙)나라로 쳐들어갔다. 조나라 왕 헐(歇)과 재상 진여(陳餘)는 이들을 막고자 천혜의 요충지인 정형(井   )의 입구에 20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한신과 대치하였다. 이때 한신은 강을 등지고 진을 쳤는데 조나라 군사들은 이를 보고 병법을 모른다며 크게 비웃었다.

  새벽녘에 한나라 군대가 정형의 입구로 쳐들어가 조나라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한참을 싸우다가 한신과 장이가 패한 척하며 강가의 진으로 달아나자 조나라 군대는 진지를 비워놓고 적진으로 쳐들어가 한나라 군대와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분전했기 때문에 이들을 격파하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로 돌아온 조나라 군대는 이미 그곳이 한나라 군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보고 크게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때 한나라 군대는 앞뒤에서 조나라 군대를 협공하여 진여를 죽이고 조왕 헐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한신에게 축하의 뜻을 표하면서 물었다. “병법에는 산이나 언덕을 뒤로, 강이나 호수를 앞으로 하여 진을 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지금의 경우는 물을 등지고 진을 쳐서 이겼으니 어찌된 까닭입니까?” 이에 한신은 “아니다. 병법에서는 ‘죽을 곳에 빠진 뒤에야 살게 할 수 있고(陷之死地而後生), 망할 곳에 있어야 생존하게 할 수 있다(置之亡地而後存)’고 하였다. 나는 그 방법을 택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은 한신의 대담하고 시의 적절한 전략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신은 배수진(背水陣)이란 방법을 통해 병사들에게서 불굴의 투지를 이끌어 냄으로써『손자병법』의 비결대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도 『손자병법』의 비결이 적용된 사례이다. 1592년 8월 경상도의 주력 부대가 진주성에 있는 것으로 판단한 왜군은 대부대를 동원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로 했다. 이때 진주성 목사로 있던 김시민은 적의 진주성 공략작전에 대한 보고를 받고 성 방어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김시민 휘하에는 3,800여 명의 군사들이 있었고 적은 약 3만 여명에 달할 정도의 대부대여서 진주성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해 10월 진주성으로 쳐들어온 왜군은 단숨에 성을 함락시킬 듯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김시민의 탁월한 전략과 진주성 내의 모든 군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결사항전을 벌여 일주일 동안은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8일째 되는 날 왜군의 계속된 공격에 성안의 화살이 부족하게 되었고 성을 지키던 병사들도 많이 죽거나 다쳐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김시민은 광장에 군민들을 모아놓고, “온 나라가 함몰되어 보존해 남은 데가 적다. 지금 이 한 개의 성에 나라의 명맥이 달려있다. 이 성마저 함락된다면 우리나라는 끝장이다. … (중략) …, ‘죽을 땅에 빠진 뒤에 살 계책이 생긴다’는 옛말을 명심하라!”고 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도록 독려했다. 이에 군민은 감격하여 기왓장을 던지고 돌 세례를 퍼부으며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 결과 3만의 왜병 중 2만여 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군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최대의 곡창지대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임진왜란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신의 고사(古事)나 김시민의 진주대첩 사례는 고난과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것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제님께서 “자고로 화복이라 하나니 이것은 복보다 화를 먼저 겪는다는 말이니 당하는 화를 견디어 잘 받아 넘겨야 복이 이르니라.”(교법1장 19절)고 하신 것이나, 도전님께서 『손자병법』의 한 구절을 인용하시며 “… 복(福)은 곧 복마(伏魔)로 풀이함은 화복(禍福)이란 말과 대등할 것이다."(『대순지침』 p.94)라고 하심은 모두 수도인들이 힘든 상황에서 지녀야할 정신자세를 일깨워주신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잘 이겨내면 오늘 우리에게 닥쳐온 위기는 내일을 위한 도약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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