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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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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소설 속 부부관계로 본 화합의 의미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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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 문예 입상작 ①

 

소설 속 부부관계로 본 화합의 의미와 방법

 

 

 

구의3 방면 선사 김영일

 

 

 

 

들어가며

 

  대순진리회에서 화합의 중요성은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후천이 화합의 세상이고 그것은 화합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 글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부 관계를 통해 화합의 의미와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부는 음양 관계다. 둘 사이에 화합이 이루어졌을 때 새로운 가치와 덕이 창출된다. 현실적으로 배우자와 관계가 좋아야 일이 잘된다. 성패의 반은 상대 배우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혼 후 형성된 재산의 반을 배우자의 몫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생활이 순탄치만은 않다. 어쩌면 부부의 참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일심동체가 되는 과정에서 불화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존재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불화를 방지하거나 화합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성공과 행복한 결혼생활의 비결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도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포정원의 선정부와 교정부가 부부와 마찬가지로 음양 관계니 말이다. 넓게 말하자면 포정원과 정원의 관계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논의를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작품은 현진건의 「빈처」(1921년),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1935년), 강경애의 「원고료 이백 원」(1935년)이다.

 

 

불화의 원인 1: 자신의 세계에 갇힌 자아

  불운이 항상 불행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불운이 인간관계를 매개하여 불화로 비화하고, 불화가 다시 불운을 키워 불행으로 끝맺는 것이다.

  불화의 경우,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듯하다. 이해와 소통의 길이라 할 수 있는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금 따는 콩밭」에서 영식의 아내는 금광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이미 금을 캔 것처럼 기뻐한다. 코다리 먹고 흰 고무신 신으며 얼굴에 분 바르는 것을 상상한다. 남편이나 자식보다 자기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이러니 남편의 마음을 살필 수가 없다. 영식이 힘이 빠지고 풀이 죽어 집에 들어오면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줄 줄 모른다. 산제(山祭)를 지내고자 하는 남편의 심정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죽거리도 없는데 무슨 산제냐며 불만스런 태도를 취한다. 양식을 빌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영식도 마찬가지다. 빌려 온 양식도 다 먹었다는 아내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산제를 지낼 테니 더 꿔오라고 한다. 그리고 금이 나오지 않아 답답해진 심정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집에 오면 쓰러져 누울 뿐이다. 그러고는 도리어 위로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는다. 부부에게 닥친 불운을 힘을 모아 극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니 그렇게 하기엔 서로가 자기의 감정과 생각에 갇혀 있다. 대화를 통해 쌓인 감정이 해소되기도 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는 데 말이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힘이 모일 리 없다.

 「빈처」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남편은 2년 동안 전혀 돈 벌 궁리는 하지 않고 그저 작가가 되기 위해 독서와 창작을 할 뿐이다. 생계유지는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다. 아내는 세간과 의복을 전당포나 고물상에 가져가 돈을 구한다. ‘예술가의 처’가 되겠다는 ‘독특한 결심’을 한 아내는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한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아내는 남의 물건을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남편은 그 모습에 쓸쓸하고 불쾌한 감정이 든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이 처량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주위의 경멸 속에서 자존심만은 지켜왔던 것. 하지만 아내에 대한 불쾌한 감정만 쌓아가니, 그녀의 물질적 욕구에 대한 이해는 점점 어려워진다. 자존심에 갇혀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불화의 원인 2: 욕설과 폭력 그리고 남 탓하기

  폭력은 육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신까지 상처를 준다. 그러니 폭력으로 인한 불화는 회복되기가 쉽지 않다. 회복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폭력은 한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지속적이다. 정신적으로 상처가 되는 것은 욕설도 마찬가지다.

  영식의 부부 사이가 더 안 좋아진 것은 영식의 욕설과 폭력 때문이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요망 맞은 년’이라며 욕을 퍼붓는다. 아내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 주먹으로 몸이 흔들릴 정도로 머리를 후려친다. 일이 잘 되지 않아 그런 것이지만, 이것은 관계를 악화시켜 불운을 가중시킨다. 뺨을 맞은 아내는 산제를 지내는 남편을 보며 ‘금을 캐랬지 뺨을 치랬나. 제발 덕분에 고놈의 금 좀 나오지 말았으며’ 하고 저주하게 되는 것이다. 「원고료 이백 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자 서러움과 원망의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의 뺨과 머리를 친다. 동지를 돕자는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가 겪은 가난의 고통과 슬픔을 알고 있는 남편으로서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고, 바르지 못한 점이 있다면 타이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남편의 폭력은 가부장제의 시대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는 관계를 악화시킨다. 아내는 남편과 더는 못 살겠다고 한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폭력이 깊은 상처가 되지 않아 보이는 것은 가부장제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폭력을 어느 정도 용인하니 충격이 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다. 대등한 관계 속에서 조화를 꾀해야 한다. 욕설과 폭력은 이에 반한다.

  영식의 잘못된 태도를 하나 더 지적하자면 남의 탓을 하는 점이다. 자신이 결정한 것임에도 금광을 해보라고 부추겼다며 아내 탓으로 돌린다. 자기 자신은 되돌아보지 않고 남의 탓만 하고 있으니 상황은 더 나빠진다.

 

 

 

화합에 이르는 길 1: 상대의 가치 알기

  불화를 없애고 이해와 소통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상대의 가치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인간존중의 차원에서도 그래야 되겠지만, 그 사람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알았을 때 존중하는 마음은 더 힘을 받게 되고 사랑은 깊어진다. 즉 하나가 된다.

 「원고료 이백 원」에서 남편은 원고료 이백 원이 생기자 변심한 아내를 때리고 문밖으로 쫓아낸다. 아내는 만주의 매서운 바람과 따가운 눈발을 맞으며, 자신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남편과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진로를 고민한다. 하지만 고향에 갈 수도 없고, 취직을 하거나 유학을 갈 수도 없다. 갈 데가 없다.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듯하다. 남편이 자신의 존재근거인 것. 남편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자, 애정이 솟구쳐 오른다. 「빈처」에서 남편은 양산에 자극 받은 아내와 두 차례에 걸쳐 말다툼을 하게 된다. 하지만 6년의 결혼생활을 회상한 후, 태도가 바뀐다. 아내가 유일하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존재임을 상기하고, 그녀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진심을 표현한다. 「금 따는 콩밭」의 아내는 남편의 가치를 알아주기는커녕 그 반대이다. 남편이 산제를 지내야겠다고 한 날 이미 희망을 버리고, ‘남들은 돌아다니며 잘도 금을 주워오련만 저 망나니 제 밭 하나를 다 버려도 금 한 톨 못 주워오나. 에, 에, 변변치도 못한 사나이’라고 멸시한다.

  사랑을 하면 누구보다 먼저 상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위의 주인공들이 배우자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기본적으로 사랑이 바탕이 된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이다. 그런데 도인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서로의 가치는 무엇일까? 상제님의 뜻을 받드는 점이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이를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도인 간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화합에 이르는 첩경이다. 욕설과 폭력은 있을 수 없다.

 

 

 

화합에 이르는 길 2: 무자기 그리고 대화

  화합으로 가는 길에 대화는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빈처」의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자존심은 온데간데없이 ‘강한 가면’을 벗고 ‘약한 진상(眞相)’을 드러낸다. 탄식하며 쓰러지기까지 한다. 자신의 존재근거를 상실한다고 생각하니 절박했던 것이다. 이렇게 남편이 자존심을 버리고 진심을 표현하자, 아내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순정을 회복한다. 「원고료 이백 원」의 아내도 바로 잘못을 시인하고 울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두 주인공 모두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기 마음에 정직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오는 용기도 있었다. 바로 무자기인 것이다. 이렇게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지니 화합은 가까이 있다. 도인들이 항상 수도인임을 자각하고 있다면 무자기의 실천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화합에 이르는 길 3: 대의 공유하기

  화합에서 대의의 의의를 새겨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의는 화합의 의미와 가치가 되고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대의에 의해 화합이 가능해지기도 하지만, 사랑과 화합에 의해 대의가 단단해지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화합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대의와 화합은 이렇게 상승작용을 한다. 동의한 대의가 있기 때문에 파국의 가능성이 미리 차단되는 측면도 있다.

 「원고료 이백 원」에서 아내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생기니 그의 말이 다시 떠오르고 거기에 담긴 생각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남편의 동지였던 사람들이 자신의 동지가 된다. 아내와 남편은 비로소 사상적 동지가 된 것이다. 대의가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아내의 동지애는 공감에 근거하여 전 조선의 빈한한 군중과 전 세계의 무산대중까지 확대된다. 화합의 양적 확대라 할 수 있다. 「빈처」에서 부부의 사랑 감정이 회복한 후, 아내는 “암만 구차하기로니 싫증이야 날까요? 나도 한번 먹은 마음이 있는데…”하며 ‘예술가의 처’의 꿈을 굳건히 한다. 사랑으로 하나 되어 공통 삶의 목표를 다시 세우게 된 것. 이렇게 되니 남편의 물질관도 깊이 이해하게 된다. 화합의 질적 확대라 할 수 있다. 「금 따는 콩밭」의 부부도 금을 캐서 부자가 되겠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가졌으되, 자신만 생각하는 아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공통된 것이라 할 수 없다. 수재(남편의 동업자)가 거짓으로 금이 나왔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 기뻐하는데, 좋은 결과만 함께할 수 있다. 공통의 목표를 가진 하나 된 관계라 할 수 없다.

  대순 도인에게는 상제님의 뜻이라는 대의가 있다. 그것은 도인 간의 사랑과 화합 속에서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즉 수도와 사업 속에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화합이 더욱 공고히 되고 확대된다.

 

 

화합의 의미: 차이-나기와 타자-되기

 「빈처」에서 부부의 화합이 심화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전날 부부는 사랑과 대의를 다시 확인하고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포괄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가 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장인 생신에 아내와 다녀온 후, 남편과 아내는 처형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큰돈을 벌었지만 기생을 얻고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둔 처형을 동정하며 없는 대로 의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서로 위로하며 삶의 기쁨에 이른다. 이 순간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은 행복과 무관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아내는 남편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한 것이다. 이틀 후, 처형이 방문한다. 처형이 남편을 욕하면서도 기차를 놓치면 기다릴까 염려하여 급히 가는 것을 보고, 남편은 물질적인 것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다. 처형에게 물질적 풍요는 남편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그 점은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아내의 이해를 받은 남편이 역으로 아내의 마음 한 부분을 깊이 이해한 것이다. 둘은 이렇게 물질에 대한 이해까지 하나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 깊이 공감하면서 상대의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기 내적으로 차이를 내고 타자-되기. 개인적으로는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나고, 전체적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가 됨으로써 화합의 밀도와 강도는 높아진 것이다. 진정한 화합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과학에서 비유하자면 혼합물이 아니라 화합물이 되는 것이다.

  깊은 이해심 자체가 타자-됨을 의미한다. 「원고료 이백 원」에서도 그렇다. 아내가 용서를 구하자, 남편은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자신도 돈이 생기자 전과 확실히 달라진다고. 아내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을 때린 것은 ‘내게 함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쾌한 생각을 제어하고자 함’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하나가 되었을 때 가능한 이해심이라 할 수 있다.

  시사점 하나. 상호이해는 동시적이지 않다. 이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상대를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나오며

 

  화합은 단지 좋은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타자와 하나 되기 위해선 공감능력과 자기를 바꾸는 고통이 요구된다. 수도가 된 만큼 화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제님의 뜻에 바탕을 둔 화합이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해 화합한다. 그것에 벗어나거나 어긋난 화합은 무의미함에 그치지 않는다. 죄가 된다. 이렇게 화합은 수도와 대의를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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