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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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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 역사인물 : 강태공 (姜太公)

강태공 (姜太公)

 

 

글 교무부

 

▲ 조어대에서 낚시하는 강태공. 후세 사람들이 멋지게 그렸다.(중국 섬서성陝西省주릉周陵)

 

 

  상제께서 “강 태공(姜太公)이 십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천 六백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갖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 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함이니라. 나는 이제 칠십 이둔으로써 화둔을 트니 나는 곧 삼이화(三火)니라”고 말씀하셨도다.(예시 20절)

 

 

  강태공은 3,000년 전의 인물로 중국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서 보면 원래 동해(東海)01 근처 사람으로, 그의 선조가 우(禹) 임금 시절에 치수사업을 도와 그 공로로 여(呂) 땅을 받아서 제후가 되었다고 한다. 강태공은 그 후손으로 원래 성은 강씨(姜氏)이고 이름이 상(尙)인데, 봉해진 지역을 성(姓)으로 해서 ‘여상’이라고도 한다.

  위수(渭水)에서 주문왕(周文王)과의 만남으로도 유명한 강태공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낚시 3천 6백 개를 버려가며 문왕을 기다렸다. 여기서 잠깐, 요즘 시대에 낚시 3천 6백 개를 버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켜켜이 쌓여있을 낚싯대를 보고 진작에 누군가가 환경보호단체에 신고하고도 남을 일이다. 다행히 강태공이 살았던 시대의 낚싯대는 친환경적인 나뭇가지였을 테니 ‘위수가 멀쩡 하려나…’하는 걱정은 일단 접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이를 빗대어 중국에는 ‘태공조어 이수삼촌(太公釣魚 離水三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태공의 낚시 바늘이 수면에서 세치가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다(강태공이 낚시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흔히 인용하여 사용한다). 즉, 강태공은 자신의 뜻을 알아 줄 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술을 닦으며 문왕을 기다렸고 마침내 부국강병술02을 천하에 내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

  문왕과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고 다만 여러 가지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를 살펴보면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 등의 온갖 학문에 능통한 희대의 천재였다. 그러나 그의 견문과 학식 그리고 웅지(雄志)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강태공이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어 그 책임을 부인 마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되자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 속에서 매일매일 남편을 닦달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다. 그래서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갱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하던 아내 마씨의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갱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다. 이에 진저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 하지만 강태공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혼자서 살림까지 책임져야 했던 강태공은 50세가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후엔 조가(朝歌, 당시 은나라의 도읍)에서 70세가 넘을 때까지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위수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03 오랜 세월 끝에 문왕과 만나게 되었다.

  출세한 강태공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가난한 남자와 재혼해 여전히 들판에서 갱피를 훑고 있던 마씨 부인과 만났다. 마씨는 지난날을 생각해서 자신을 다시 아내로 받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 한번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라고 말하며 강태공은 마씨 부인의 말을 거절했다.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말(覆水不返盆)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중국의 정세를 살펴보면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己)의 치마폭에 쌓여 폭정을 일삼자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덕망이 있었던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문왕이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보게 했는데 편이 말하기를 “위수에서 사냥을 하면 장차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현(寶鷄縣) 남쪽, 위수 상류에 있는 반계(磻溪)에서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났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 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강태공이 70여 년 세월 동안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문왕이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낚시를 즐겨하시나 봅니다.”

  “군자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즐거워 하지만 소인은 결과가 이익을 남기 기를 바랍니다. 제가 낚시를 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문왕과 강태공은 계속해서 천하를 다스리는 법과 병법에 관해서 서로의 생각을 밝혔는데 이는 『육도(六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육도』는 후대에 정리된 병법서로 강태공이 문왕을 도와 여러 나라를 정벌해 나갈 때 썼던 치세 철학과 계책, 용병술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현대의 정치, 경영, 윤리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어 이를 통해 강태공의 뛰어난 지략과 시공을 초월하는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를 알 수 있다.

  그후 강태공을 수레에 태우고 주나라로 함께 돌아온 문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임명했고, 강태공의 눈부신 활약으로 천하의 2/3가 주나라에 귀순하면서 문왕은 차차 은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곧 문왕이 죽었고 그의 아들 발(發)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무왕(武王)이었다.

 

▲ 춘추전국시대 전도( 『평전 열국지』표지, 김영사)

 

 

  무왕 역시 강태공을 국사로 삼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동쪽 정벌을 해 나갔는데 이때 은나라를 버리고 주나라로 귀순한 제후가 무려 800명이나 되었다. 마침내 무왕11년 2월 갑자일(甲子日)에 목야(牧野)에서 출정선언을 하고 무왕이 은나라를 쳤는데, 이미 주왕의 악정에 지칠 대로 지쳤던 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앞 다투어 무왕에게 투항하는가 하면 창을 거꾸로 들고 오히려 무왕에게 길을 내주며 함께 주왕에게 쳐들어갔다. 결국 주왕은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내려 자살했고 이로써 600년 간의 은나라는 막을 내렸다.

  이후 주왕조(周王朝)가 건국되었고 무왕은 혁혁한 공을 세운 강태공을 제(齊)나라 영구(營丘,현 산동성 치박시 동북쪽)에 봉했다. 자신의 봉지인 영구에 도착한 강태공은 그 지역의 풍습을 유지하면서 의례를 간소화했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를 본 많은 제후들이 제나라로 귀순하였다.

  무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어린 성왕(成王)은 강태공에게 주위의 제후를 징벌할 막강한 권한을 주었으며 강태공은 160여 세까지 제나라를 다스렸다.

 

 

 

 


01 대략 지금의 강소(江蘇), 산동(山東) 바닷가 일대를 말한다.
02 예시 21절, 예시 22절.

03『사기』「제태공세가」에서는 강태공의 나이가 72세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위의 글은 여러 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시기가 정확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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