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4년(2014) 9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청계탑 벽화이야기 대원종 대순칼럼 『전경』속 역사인물 일각문 28수(宿) 신명 나누고 싶은 이야기 독자코너 대학생 종교문화답사기 종교산책-한국종교편 대순문예 Q&A 게시판 상생의 길 퀴즈 및 퀴즈 정답자 알립니다

28수(宿) 신명 : 심(心) 별을 관장하는 가복(賈復) 신명

심(心) 별을 관장하는 가복(賈復) 신명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심수(心宿)
  심수(心宿)는 28수 가운데 다섯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다섯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3개로 동물은 여우이다.01 심수는 동방 청룡 칠수 전체를 용으로 볼 때 허리에 해당한다. 
  심수를 의인화하여 동방심월호성군(東方心月狐星君)이라 부르는데 손에는 장창(長槍)을 지닌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가복
  심(心) 별을 관장하는 가복(賈復,?-55)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02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가복의 자(字)는 군문(君文)이고 남양(南陽) 관군[冠軍, 현재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 서북]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상서(尙書)03를 배웠다. 또한, 무음(舞陰) 땅의 이생(李生)을 섬겼는데 이생이 그를 비상하게 여겨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가군(賈君)의 용모와 기상이 이와 같고 또 배움에도 부지런하니 장군, 재상이 될 만한 그릇이오.”
  가복은 왕망(王莽, BCE 45-CE 23)04의 신(新, 8-23)나라 말엽에 현의 관리였는데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인망이 높았다. 가복이 하동(河東)에서 소금을 운송해오는 임무를 맡았을 때의 일은 이러한 그의 평판을 더욱 높여 주었다. 소금이 예로부터 중요한 물품이었고 그 수송도 작지 않은 임무였지만 가복이 담당한 일은 누구라도 수행할 수 있는 일반적 사무였다. 하지만 당시는 난세였다. 왕망의 복고적 개혁정책이 파탄을 맞이한 상황에서 중국 전역에 반란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던 시기였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국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도적이 창궐했다. 가복 일행이 소금을 가져오다가 도적떼를 만났는데 동료 십여 인은 모두 도망갔지만 그만이 홀로 남아 소금을 온전히 지켜내었다. 이후 그가 별일 없었다는 듯이 소금을 현으로 가지고 돌아오니 현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실함을 칭찬하였다.
  이때에 하강(下江)과 신시(新市)에서 군사가 연이어 일어나니 가복 또한 우산(羽山)에서 군사 수백을 모아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했다. 하강과 신시에서 일어난 농민군이 주축이 되어 유현(劉玄, ?-25)을 옹립하니 이가 곧 경시제(更始帝)05이다. 경시제가 즉위하자 가복은 곧 자기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 ?-39)06에게 귀의하여 그의 교위(校尉)가 되었다. 경시(更始)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의 사람들은 왕망이 타도한 한나라가 다시금 일어나서 혼란한 시국을 평정해 주기를 기대했고 또한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경시제 유현은 당시의 혼란을 수습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가복은 경시제의 다스림이 문란하고 그의 장수들 또한 집권 세력으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유가에게 유세하여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요순(堯舜)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탕무(湯武)요, 탕무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환공(桓公)·문공(文公)이요, 환공·문공의 일을 도모하다가 미치지 못한 자는 한(韓)·조(趙)·위(魏)·연(燕)·제(齊)·초(楚) 여섯 나라요, 여섯 나라의 법률을 정하여 편안히 잘 지키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자는 망한 여섯 나라들입니다. 지금 한(漢)의 왕실이 중흥하려 함에 대왕께서는 친척들을 제후로 삼으시고 천하가 채 평정되기도 전에 보존하시는 것만을 지키려 하시는 데 현재 보존하신 바를 앞으로도 보존하실 수 있겠습니까?”
  가복의 말은 ‘이대로 가다가는 지금 지키고 있는 것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유가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유가가 답하였다.
  “경의 말이 너무 커니 내가 감당할 것이 못되오. 대사마(大司馬) 유공(劉公, 유수)이 하북(河北)에 있는데 필히 시행할 수 있을 터이니 나의 편지를 가지고 가보도록 하시오.”
  가복이 유가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의 편지를 지니고 하수(河水)를 건넜다. 이때 28장의 한 사람인 진준[陳俊, 미(尾) 별을 관장]도 유가의 휘하에 있었는데 그의 추천서를 갖고 가복과 함께 하수를 건너 유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유수는 백인(柏人, 하북성 唐山縣)에 있었는데, 가복은 등우[鄧禹, 각(角) 별을 관장]를 통하여 유수를 만날 수 있었다.
  유수는 가복을 비상한 인물로 여겼고 등우 또한 그가 장수의 절개를 지녔다고 칭찬하였다. 이에 유수가 가복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임명하여 도적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수가 보니 가복의 말이 매우 수척하였다. 유수는 자신의 왼쪽 참마(驂馬)07를 풀어 그에게 주었다. 가복과 같이 전쟁을 치를 장수의 말이 수척하다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유수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말을 하사함으로써 가복에 대한 신임을 표시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수 휘하의 장수들은 가복이 뒤늦게 와서 동료들을 능멸한다고 여겼다. 이들은 가복을 호(䧚) 땅의 위(尉)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유수에게 상주했다.
  이때 유수는 양부(兩府)를 두어 자신을 보좌하도록 했는데 중복되는 직책이 나타났다. 가복은 단효(段孝)와 중복되는 직책으로 같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단효는 뒤늦게 온 가복이 자신과 같은 자리에 배치된 것이 불편했다. 단효가 말했다.
  “경은 군독(軍督)이나 나는 대사마독(大司馬督)이니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소.”
  가복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가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와 나는 유공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입장인데 어찌 존귀(尊貴)가 있을 수 있겠소.”
  단효는 이를 불손하다고 여기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가복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청하였다. 단순한 에피소드 같지만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조직의 단합을 위해 중요하다.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같은 틈이 결국에는 분열과 파국으로 귀결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유수의 판결은 단호했다.
  “가독(賈督)은 천리에 떨치는 위엄을 지녀 그 직책을 맡긴 것이다. 제멋대로 옮기려 하지 말라.”
  유수는 신도(信都)에 이르러 가복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고 한단(邯鄲)을 함락시킨 이후에 도호장군(都護將軍)으로 옮겨주었다. 도호장군이 된 가복은 사견(射犬)에서 청독(靑犢)을 공격하였다. 대전투가 벌어져서 해가 중천에 뜨도록 계속 되었지만 적의 진영은 견고했다. 유수가 명령을 전달해 가복을 불러 들였다. 유수는 지친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이후 다시 공세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병사나 관리가 모두 굶주렸으니 아침밥을 먹여도 괜찮으리라.”
  유수의 지시에 가복이 답하였다.
  “먼저 격파시킨 연후에 먹이십시오.”
  그리고는 그 스스로 깃발을 등에 지고 선봉에 섰다. 가복이 가는 곳마다 적군이 쓰러지니 마침내 적군은 패주할 수 밖에 없었다. 뭇 장수들은 이러한 가복의 용맹에 탄복했다.
  가복은 전투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는 장수였다. 그는 다시금 북쪽으로 진정(眞定, 하북성 正定縣)에서 오교(五校)와 싸워 크게 격파했는데 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다. 유수가 크게 놀라 말했다.
  “내가 가복으로 하여금 별동대를 이끌지 않도록 한 것은 그가 적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었다. 과연 염려한 대로 나의 명장(名將)을 잃게 되었도다. 듣건대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하니 만일 딸을 낳으면 며느리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사위로 삼겠노라. 가복에게 처자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라.”
  가복의 병세는 얼마 후 호전되었고 계(薊, 현재 북경시 大興縣) 땅에서 유수와 상봉하였다. 유수가 매우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크게 먹이고 가복을 선봉에 세워 업(鄴)의 적군을 격파했다.
 
 
광무제의 즉위와 가복의 활약
  25(건무 1)년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가복을 집금오(執金吾)에 임명하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복은 하수(河水)를 건너 낙양(洛陽)에서 경시제 휘하의 주유(朱鮪)를 격파하고 백호공(白虎公) 진교(陳僑)와 싸워 연달아 격파하고 항복시켰다.
  26(건무 2)년에 양(穰)과 조양(朝陽) 두 현이 추가로 봉해졌다. 경시제 휘하의 언왕(郾王) 윤존(尹尊)과 남방에 있는 여러 대장군들 중에 아직 항복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광무제가 장수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케 하였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이 계속 되었다. 이에 광무제가 격문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언성(郾城)이 가장 강력하고 완성(宛城)이 그 다음이니 누가 이들을 격파할 수 있겠소?”
  광무제의 말이 떨어지자 가복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신이 언성을 격파하겠습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말하였다.
  “집금오가 언성을 공격한다면 짐이 다시 무엇을 근심하리오. 완성은 대사마가 공격하도록 하라.”
  마침내 광무제가 가복과 기도위(騎都尉) 음식(陰識), 효기장군(驍騎將軍) 유식[劉植, 유(柳) 별을 관장]을 파견하여 남쪽으로 오사진(五社津)을 건너 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공격으로 한 달 남짓 만에 윤준이 항복하였고 언을 모두 평정하였다. 가복이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경시의 회양(淮陽) 태수 폭범(暴氾)을 공격하니 폭범도 항복하고 회양현이 모두 평정되었다.
  그해 가을에 가복은 남쪽으로 소릉(召陵, 하남성 郾城縣)과 신식(新息, 하남성 息縣)을 공격하여 평정했다. 이듬해 봄에 좌장군(左將軍)으로 옮겨졌고 별도로 신성(新城)과 민지(澠池)의 사이에서 적미(赤眉)를 공격하여 연달아 이들을 격파했다. 그는 의양(宜陽)에서 광무제를 만나 적미를 항복시켰다.
  가복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정벌에 나서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었고, 여러 차례 장수들이 포위당한 것을 풀어주고 위급함을 구원했다. 그의 몸 열 두 곳의 난 상처는 가복의 이러한 분투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히 영광의 상처라 할 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전공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가복은 자신의 공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광무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공을 칭찬했다. 
  “가군의 공은 내가 아오.”
  37(건무 13)년에 가복은 교동후(膠東侯)로 봉해졌고 욱질(郁秩), 장무(壯武), 하밀(下密), 즉묵(卽墨), 정호(梃胡), 관양(觀陽)의 여섯 현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후한 창업 이후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자 천하대란이라 불리던 혼란도 수습되어 안정을 찾아갔다. 가복은 광무제가 전쟁을 억누르고 문덕을 닦고자 하며 공신들이 서울을 옹위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가복은 곧 고밀후(高密侯) 등우와 함께 자신의 휘하 병사를 해산하고 유학을 돈독히 하였다. 광무제는 이에 호응하여 좌·우장군의 직책을 없애버렸다. 가복은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하야하였으나 특진(特進)08이 가해졌다.
  가복은 사람됨이 강직하였으며 절개가 곧았다. 하야한 후에는 문을 닫고 위의와 명망을 쌓았다.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는 가복이 마땅히 재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거했으나 광무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무제는 후한 창업 공신들의 작위를 유지해 주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창업공신들을 관직에서 제외한 것이다. 광무제는 전한의 공신들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한고조 유방의 공신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은 이들이 한나라 창업 이후에도 계속해서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 상층부와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후한 창업 공신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작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자손들에게도 부귀영화가 이어졌던 가장 중요한 까닭은 공신들을 관직에서 배제한 광무제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열후로는 오직 교동후 가복, 고밀후 등우, 고시후(固始侯) 이통(李通) 이 셋 만이 공경과 더불어 국가의 대사에 참여하여 의논할 정도로 광무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55(건무 31)년 가복이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강후(剛侯)라 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09.
02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전한(前漢)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의 9세손(世孫). 자(字)는 문숙(文叔). 9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 유량(劉良)의 밑에서 성장했다. 1세기 초 외척 왕망(王莽)이 궁정 쿠데타를 통해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신(新)을 건국한다. 그러나 왕망의 복고적 개혁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한실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등에 업은 한 왕실의 후예들의 한 사람이었던 유수는 22년 가형(家兄) 유연(劉縯)과 함께 남양(南陽)에서 호족들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이후,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대파하고 25년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즉위 이후 10년 동안 경시제(更始帝), 적미(赤眉), 외효(隗囂), 공손술(公孫述) 등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묘호(廟號)는 세조(世祖), 시호(諡號)는 광무제(光武帝)이다.
03 한나라 이전까지는 ‘서(書)’라고 불렸다. 이후 소중한 경전이라는 뜻을 포함시켜 한나라에서는 『상서(尙書)』, 송대(宋代)에 와서 『서경(書經)』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虞), 하(夏), 상(商), 주(周)나라에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04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자(字)는 효손(孝孫). 남양(南陽) 채양[蔡陽, 현재 호북성(湖北省) 조양(棗陽) 서남] 사람. 광무제 유수의 족형(族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과 장안(長安)에서 같이 수학하였다. 왕망(王莽) 말년에 유현을 따라 병사를 일으켰는데, 유현이 경시제가 되자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고 흥덕후(興德侯)에 봉해졌다. 경시제가 장안에 도읍한 이후 한중왕(漢中王)에 임명되었다. 26(건무 2)년 광무제에 항복하여 이듬해 낙양에서 천승태수(千乘太守)에 임명되었고 37(건무 13)년 순양후(順陽侯)에 봉해졌다.
07 고대 마차는 네 필의 말이 끄는데 바깥쪽 좌우의 말을 ‘참(驂)’ 또는 ‘비(騑)’라 하고 안쪽의 두 말은 ‘복(服)’이라고 했다.
08 조회에 참여하는 지위.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