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2년(2012) 5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68) 청계탑 벽화 이야기 『典經』속 역사인물 기획 인터뷰 대원종 금강산 이야기 일각문(一覺文) 대순광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 독자사연 신생활관 동양고전 읽기의 즐거움 포토에세이 철학과의 만남 생각이 있는 풍경 대순 문예 상생의 길 퀴즈 및 퀴즈 정답자 알립니다

기획 인터뷰 : 대진대학교 총장 인터뷰를 다녀와서

대진대학교 총장 인터뷰를 다녀와서

 

편집 교무부

 

 

  “이제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할지는 확연히 알 수 없지만 그간의 성장통을 디딤돌로 삼아야 합니다. 보다 냉철한 눈으로 지나온 20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약력>

이근영 총장은 1955년 생으로 1991년 3월에 입도하였으며, 1993년 9월에 교감임명을 모셨다. 대진대학교 설립 때 학과장으로 오게 되었으며, 교무처장과 인문과학대학 학장 들을 역임하였다. 2012년 대진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추대되어 현재 총장으로 재임 중이다.

 

 

  대진대학교가 포천 왕방산에서 92년도에 처음 개교한 지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올 2012년이 개교 20주년이 되는 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벌써 두 번의 강산이 변했을 세월이다. 물론 그동안 대진대학교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많이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내 ⋅ 외적인 발전보다 대진대학교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진단하여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정확히 설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임진년은 변화가 많은 용의 해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도 임진년에는 크고 많은 일이 있었다. 종단의 울타리 역할을 해온 대진대학교도 올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학교의 수장인 총장이 새로 선출된 것이다. 물론 그동안 총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에 불어온 대학 평가의 위기감을 느낀 시점에서 수도인이 총장으로 선출되었기에 많은 수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러한 도인들의 관심에 부응하기 위하여 대진대학교를 향했다. 학교 교정에는 많은 학생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진대학교를 둘러보는 동안, 곳곳에 도인들의 추억과 정성이 깃들어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총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본관 건물로 향했더니 이근영 총장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인터뷰 내내 웃음 띤 화사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도전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두 시간의 인터뷰가 짧기는 했지만, 이근영 총장이 온화하지만 다부진 솔선수범형의 총장으로 도장 및 교수, 학생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소통형의 총장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인터뷰는 총장께서 “학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면서 시작하였다. 다음은 이근영 총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우리 학교가 가지고 있는 종립(宗立) 학교01의 특성상 보편성과 특수성을 다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종단의 입장이 강화되면 학교는 좀 움츠러듭니다. 하지만 학교의 입장이 강해지면 종단에서는 지원을 해줬는데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는 것 같아 서운한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학교와 종단 간의 적절한 조화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도전님께서는 학교가 종단의 울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몇몇 임원들은 “우리가 본체고 학교는 그냥 주변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다. 울타리인 대진대가 잘 운영되어야 종단이 어려울 때 견디는 힘이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볼 때 종단과 학교는 같은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동안 서로 같이 보는 시각이 부족해서 학교 발전이 늦춰졌던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각차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인분들이 제가 사업을 해보았다는 측면과 수도인이라는 측면을 따뜻하게 봐 주셔서 총장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입도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건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대순진리회를 몰랐습니다. 제가 어느 대학교 교수로 가기로 예정 되어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제가 이력서를 써준 사람은 교수가 되고 저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는데 그때 누가 대순진리회에 입도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입도후 젊은 내수임원이 저에게 도담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저를 쫓아다녔는지 지방대학 가서 강의가 끝나고 나오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을 태우고 이천휴게소에 들렀을 때, “제가요 천지 대도를 닦는데요.”라는 말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젊은 20대인데, “이분들이 천지대도를 닦는다고 하는데 그동안 나는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입도식을 하게 되었고 입도하고 나니 잠을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방면에 기도를 모시러 가서 봉축주를 봉송하는데 ‘무~ ’ 하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뻥 뚫리는 것 같더니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때 ‘이때까지 내가 사회에서 수련한 게 주문 첫 구절보다도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때의 그 경험이 없었으면 계속 도를 닦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포덕도 하게 되었습니다. 지인들에게 수도하자고 전화하는 방식으로 30호 포덕을 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선무 임명을 모실 수 있었고, 얼마 후 교정 임명도 모셨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나이만 많았지 도에서는 제일 막내였습니다. 군대에서도 그렇듯이 방을 닦는 것은 제일 기본이었기에 입도식 방을 열심히 닦았는데 그게 소문이 나서 선각자들로부터 좋은 인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도 사업도 재미있었습니다. 잘 풀린 거죠.

  어디에도 연성(煉性)이 없는 데는 없습니다. 그때 연성을 혹독하게 시킨 분이 있었는데 저는 수도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하루는 임원 한 분이 급한 일로 여주에 가신다고 했습니다. 제가 여주 가는 길을 몰랐기에 제 차로 선사를 태우고 임원을 모시고 가게 되었습니다. 고속도로를 탔는데 뒤에서 갑자기 임원분이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임원 한 명 여주 가는데 왜 수반이 둘씩이나 따라가.”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렸죠. 차는 제 차였지만 저는 길을 모르니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속도로를 걸어서 다시 포덕소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방면 임원분이 그 사실을 아시고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견뎌냈느냐고 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오랜만에 들길을 걸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저는 그러한 연성을 힘들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즐겁게 받아들였습니다.

  또 한번 제가 도를 존엄하게 생각하는 경험을 한 것은 교정 때 시법공부에 들어가서였습니다. 시법공부 주문을 돌리는데 태을주를 하려 해도 주문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났습니다. 혀도 말려들어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습니다. 공부하면서 교만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뻐저리게 반성하며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했던 깊고 깊은 반성을 계기로 항상 제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심고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총장이 되었지만 ‘혹시 교만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그때 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습니다.

 

 

 

학교 교수로 오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마 도전님께서 대학을 세운다고 미리 교수들 이력서를 다 받으신 것 같아요. 처음 10개 학과를 정하고 학과장들을 다 결정하신 거죠. 도전님께서 수의에서 10명의 이름을 부르셨답니다. 1991년 7월에 학과장으로 10명의 교수를 뽑을 때 들어오게 됐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라서 어떻게 뽑혔는지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때 교수의 자격요건에 관해서 잘 모르는 방면도 있었나 봅니다. 조교나 교수를 똑같이 보신 분들도 계셔서 교숫감을 조교로 올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교수가 되었지요. 10명 이외에 교수를 더 뽑아서 92년에 첫 학기를 33명의 교수로 시작했습니다. 학과가 있어서 온 교수도 있고 교양으로 온 교수도 있었습니다. 도전님께서 첫해인 92년 3월에 직접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아마 제가 알기에는 임명장을 딱 한 번 주셨을 겁니다. 그러니 1기 교수들(92년)로 임명된 분들의 소감은 남달랐을 겁니다.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이 좀 더 유별났죠. 벌써 20년이 되었네요.

 

 

초기 학교에 부임하셨을 때 도전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나 도전님과 관련하여 기억이 나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도전님에 관한 질문에 갑자기 울컥하셨는지 눈물을 보이셨다.)

  저희가 좀 더 잘했으면 더 좋은 대학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학교를 경영하는 책임자로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처음에 좋은 대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전님과 도인들의 후원이 있었던 덕분일 것입니다. 구성원은 그때도 지금과 비슷합니다. 우리 학교의 1년 예산이 40억 정도 되었는데 도전님께서 20억 정도 후원해주셨습니다. 거의 반을 해주신 것이라 아주 큰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학교가 발전 가능성 1위였습니다. 첫해 학생 400명에 교수 33명을 뽑아주셨으니까, 학생 대 교수 비율이 1:12 정도 됐었죠.

  1991년 7월에 처음 도전님께서 부르셔서 학과장으로 첫 번째 10명의 교수로 뽑혀 들어오게 됐을 때, 도전님께서 “여러분이 잘하면 학교가 좋은 학교가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전님을 학교 안에서 여러 번 뵈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교수들을 잘 대해 주셨습니다. 잘하라고 워커힐에서 밥도 사주시고, 뷔페도 가고, 그래서 다들 희망에 부풀었고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박물관 앞에 내수 임원들이 잔디를 깔고 있었을 때, 도전님께서 한쪽 편에 파라솔을 펴고 그 뜨거운 볕에 앉아 계신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있어야 다르다.” 하시면서 내수 임원들이 잔디를 심고, 물을 뿌리고, 심은 잔디를 밟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도전님을 뵈면서 우리 학교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고 계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데 초심을 갖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도전님의 당부 말씀이 어제 하신 것처럼 생생합니다. 언제나 도전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 생각하고 심고를 드리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학교 문제에 대해 생각하신 것이 있으셨는지요?

 

 

  저는 제게 주어진 일에 전력(全力)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라면 보직이 없을 때는 과에 충실해야 합니다. 총장이 되고 아쉬운 게 있다면 수업을 못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행정보다 수업이 더 적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총장으로 써 주셔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학교 전체를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게 제 본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총장 4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면 4년이 남습니다. 남은 정년 동안은 학생들과 즐겁게 수업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무처장이 될 때 심고를 드렸습니다. 제가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어서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저한테 기운을 붙여서 쓰시는 것인데, 도전님이 쓰셔서 제가 하는 것이니 빈 마음만 가지고 당신께서 쓰시는 대로 공평무사하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로 보답을 해야겠지요.

 

 

 

당면한 학교 문제의 원인과 학교 발전 방안은 무엇입니까?

 

 

  학교가 어려워진 것은 갑자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10여 년 나태해지다 보니 어려움이 온 것이지요. 가장 큰 문제는 집행부에서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것입니다. 학과를 정확하게 평가했으면 됐는데 그걸 늦추고 있었던 거지요. 5~6년 전에 미리 대비했으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물론 미리 판단은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총장이 되고 이전의 보고서를 보니 계속해서 보고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결단을 못 내리고 주저하다가 시기를 놓친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가 기회라고 이제는 학교가 어려워지자 교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역량 강화사업에서 작년에 16등 했습니다.02 꼴찌에서 2번째인 성적입니다. 교수들이 동참하니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작년 9월에 14등에서 지금은 10등까지 올라왔습니다. 8등하고 점수 차이가 불과 1점도 나지 않습니다. 8등까지 국고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내년쯤이면 국고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은 전임교수가 45%, 시간강사가 55%의 수업을 담당하였습니다. 올해는 교수들의 동참으로 전임교수가 55%, 시간강사가 45%였습니다. 이제는 대진대학교 지표를 위해서 교수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재 취업을 위해서도 교수들이 직접 발로 뛰고 있습니다. 작년의 취업률은 47%였습니다. 올해 현재 52%로 교과부의 수치인 51%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금년 목표 수치를 62%로 올렸습니다.

  교수들이 학생과 면담을 한 학기에 두 번씩 의무적으로 해야 하고 학생도 면담을 받아야 합니다. 이게 의무적이거든요. 그런데 교수들이 노력하면서 학생들도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요즘 저희 직원들은 일찍 퇴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늦게 결혼한 직원이 있는데 결혼하고 집에 일찍 못 들어가니 아기가 안 생기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제자 하나가 졸업하고 초콜릿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학교에 와서 초콜릿을 많이 주고 갑니다. 요즘 중간고사 기간이라 밤 11시에 도서관에 가봤더니 한 400명 정도 학생이 있었습니다. 자유시간 하나씩 나눠주었더니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이건 놀랄 만한 변화입니다.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총학생회에 갔더니 이제 학생들이 저를 알더라고요. 초콜릿 돌리고 다니는 걸 말입니다. 학교에 오는 길에 학생들을 태워줬는데 어제 초콜릿을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작지만, 학생들과도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초콜릿 총장’으로 불리겠습니다. (다 같이 웃음)

 

 

 

  그리고 작년에 연구비 500만 원을 가지고 연구과제를 냈습니다. 그동안 예산 5억을 가지고도 다 집행을 못 해서 4억밖에 못 썼는데, 작년에 선착순으로 하니까 너도나도 다 신청해서 오히려 예산을 초과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1편당 350만 원, 2편에 700만 원, 3편에 1,000만 원 해보자고 했더니 신청 예산이 확 늘어났습니다. 그만큼 신청을 많이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1편 쓰게 하고 500만 원 줄 바에야 2편을 쓰게 하고 700만 원 주는 게 더 낫죠. 3편 쓰게 하고 1,000만 원 주던가요. 제가 봉급을 그냥 올려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센티브제로 해서 돈을 더 주겠다고 했지요. 이렇게 하면 노력한 사람한테 더 주게 되니 교수들도 열심히 하고, 아무것도 안 한 교수는 다른 교수들이 열심히 하면 상대적으로 실적이 떨어져 연구비를 못 받게 됩니다. 그러니 너도나도 연구과제를 다 하게 되는 것이지요.

  좋은 대학이 되려면 좋은 학생을 받으라고 주변에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좋은 학생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영어 능력이 많이 향상되면 오히려 장학금만 받다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편입합니다. 그래서 대순진리회에서 요구하는 학생 상(像)을 잘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학교의 대학발전위원회에서도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례로 한동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한동대는 내실로 키운 대학입니다. 그 학교에서는 기도도 다 시키고 총장이 큰 교회에 가서 헌금을 지원해달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특성화가 잘 되어 있는 학교로 유명합니다. 저희도 이처럼 어느 정도는 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견해로는 결국 도전님께서 세우신 대학의 설립 취지와 이념에 맞는 대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대진대학교의 자랑은 종단 대순진리회입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부분도 종단 대순진리회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종단과 학교가 같이 노력해 나가야겠지만 우리의 안 좋은 이미지를 학교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단에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이때까지 학교에서 힘들었던 점은 자신의 의견을 가지신 분들이 각자 방면에 가서 자기 견해로 학교에 관해 이야기를 함으로써 학교에 대한 많은 이견이 혼용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법인을 통하여 학교에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서 지금은 이러한 소통의 혼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봅니다.

종단 임원분들이 학교에 써 주시는 지대한 관심에 감사드리며, 아울러 학교를 사랑해 주시는 만큼 너무 조급하게 결과를 바라기보다는 믿는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학교가 결국은 지역사회와 더불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지역사회와의 교류는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요?

 

 

  이번에 제가 7대 총장이 된 것에 대한 축하파티 기금을 재미있게도 지역사회 노인분(포천 용정회관)들이 제일 먼저 보내주셨습니다. 조그마한 돈이었지만 제가 그동안 지역사회와 소통을 중시한 것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첫해부터 지금까지 향교를 시작으로 학생들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대학교와 지역 간의 링크사업이나 지역거점사업을 통한 연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학교는 경기 북부에 있는 대학이라는 큰 이점이 있습니다. 이 장점을 살린다면 학교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지역사회와의 교류를 통한 소통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는 앉아서 지역 주민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저는 발로 뛰어다니면서 주민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벌써 지역주민으로부터 발전기금을 많이 유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제가 총장 취임식을 마치고 방면 선각분을 뵈었더니 그분께서 “총장 이전에 수도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처럼 제가 수도인이라는 것을 명심하여 도전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학교를 잘 이끌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하면서 ‘아! 역시 이분은 수도인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이근영 총장이 종단과 교수와 학생 및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것을 보면서 대학 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원상생의 원리에 따라 풀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근영 총장이 취임사에서 밝힌 구체적인 학교 발전 방안은 첫째 교육의 내실화, 둘째 대학구조의 효율적인 개선, 셋째 산학협력활동의 강화, 넷째 구성원 간의 즐거운 소통이다. 현재 어려움에 직면한 학교의 현실에서 어려움보다는 앞으로의 희망을 발견한 인터뷰였기에 내일에 대한 부푼 기대를 품고 학교를 나섰다.

 

 


01 종교단체가 설립한 대학을 말한다.

02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학생수가 5,000에서 10,000인 대학교에 대한 평가.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