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0년(2010) 8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46) 인물소개 대원종 고사 한마디 금강산 이야기 『典經』용어 28수 별자리 온고지신 그림 이야기 답사기 수기 독자코너 대순학생회 대학생코너 다시보는 우리문화 과학 그곳에서 대순논단 알립니다

대원종 : 선비와 지필묵

선비와 지필묵

 

 

글 연구위원 이상훈

 

 

 

 

  어느 때 종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상제께서 “선비는 항상 지필묵(紙筆墨)을 지녀야 하나니라”고 말씀하셨도다. (교법 2장 27절)

 

 

  삼국시대 초기에 유교문화의 수용과 함께 선비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뒤, 삼국은 제도적으로 교육기관을 두어 인재를 교육하여 선비를 양성해 나갔다. 고려 때에는 선비들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생겨났으며, 고려 말엽에는 원나라로부터 주자학(朱子學)이 도입된 후 선비에 대한 관심이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선조 때를 전후하여 선비들이 정치와 문화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해 조선시대를 이끌어가게 된다.

  명분과 의리, 그리고 덕치로써 백성을 설득하고 포용하려 했던 조선 왕조가 추구한 모범 인간형은 어떤 것일까. 조선 왕조가 설정한 이상적 인간은 학예 일치(學藝一致)를 이룬 자였다. 다시 말해 문(文)·사(史)·철(哲)의 이성적 학문과 시(詩)·서(書)·화(畵)의 교양과 감성적 학문을 체득한 자를 말한다. 즉 이성과 감성이 균형 있게 잘 조화된 인격체, 그것이 조선왕조가 설정한 학예 일치의 이상적 인간형이었다. 이러한 조선 왕조가 학예 일치의 이상적 인간형으로 삼은 것이 바로 선비이다.

  선비란 신분적으로는 양인(良人)01이고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층이다. 선비들 대부분은 비슷한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단계가 있었다. 먼저 학문을 쌓고 수기(修己)를 하여 치인(治人)하는 실천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또한 선비는 권력과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의리와 도리(이치와 경위), 그리고 백성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 살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수양 뿐만 아니라 보국안민에 마음을 둔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비는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격적 성취를 위해 스승을 찾아 오랜 기간 교육을 받고 한평생 학문과 수련에 매진하며 도리를 찾아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즉 도(道)를 밝히고 자신을 연마하여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선비였다.

  또한 이들에게는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함은 물론, 지도자로서 대중들을 교화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앎과 학문을 제자들 혹은 직접 저술을 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전하였다.

  선비가 된다는 것은 선비의 혼, 즉 선비의 정신을 갖추었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기본적인 학예(學藝)를 갖추는 것은 물론, 늘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고 수기(修己)하여 사람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선비의 길이었다. 그들이 학문을 위해 필요로 했던 지필묵 또한 단순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넘어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지필묵은 종이와 붓, 그리고 먹을 말한다. 보통 벼루를 뜻하는 ‘연(硯)’을 빼고 지필묵이라 하는데 이는 필기 할 수 있는 도구를 의미한다. 지필묵의 기원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된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문인의 서재를 문방이라 하고 수업의 장으로 존중해왔는데, 점차 문방이 그곳에서 쓰이는 도구를 가리키게 되었다. 문방구를 애완하는 역사는 한(漢)·위(魏)·진(晉)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으나, 남당(南唐)의 이욱(李煜)(재위 961~975)이 만들게 한 이정규묵(李廷珪墨)·남당관연(南唐官硯)·심당지(澄心堂紙)· 오백현(吳佰玄)의 붓인 남당사보(南堂四寶)가 문방구 역사의 기초를 이루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이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고, 이에 문방구의 종류도 연적(硯滴)·필세(筆洗)·도장 등등 45종으로 늘어났다. 한국에서는 610년(영양왕 21), 고구려의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曇徵)이 이미 일본에 건너가 채색(彩色)·종이·먹의 제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 문방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지필묵 중 특히 붓은 단순히 글씨를 쓰는 필기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붓에는 권력에 맞서 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가 들어 있으며 시와 그림을 즐기는 이들의 멋과 기품이 녹아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전하는 ‘동호지필(董狐之筆)’의 고사를 통해 우리는 붓의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동호지필’이란 동호의 붓이란 뜻으로 역사를 기록함에 외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적어 역사에 남긴다는 뜻이다.

  진나라의 군주 영공(靈公)은 가혹한 세금을 거두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폭군이었다. 재상인 조순(趙盾)은 매번 간언하여 이를 고치려 했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했다. 조순은 자신을 죽이려는 영공을 피해 국경으로 달아났는데, 이때 영공이 다른 신하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이 소식을 듣고 조순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한편 사관인 동호는 조순이 영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조순이 동호를 찾아가서 따지자 그는 “대감이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으나 대감 때문에 임금이 죽었고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지 않았으니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조순을 꾸짖었다. 조순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바르게 역사를 전하려는 동호의 뜻에 따랐다. 이 이야기가 ‘동호의 붓’이라는 뜻의 사자성어인 동호지필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붓은 권세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말을 아끼지 않는 올곧은 정신을 나타낸다. 우리 선조들 또한 붓을 선비의 곧은 절개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여겼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바른 것을 지키고 나아가려는 자세. 이는 수도를 함에 있어서도 필요한 자세이다. 이치와 경위를 제대로 알고 그에 따라 수도를 해 나감이 올바른 수도가 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나 아닌 다른 이에게서 이치와 경위에 맞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을 경우에도 모른 척 지나가서는 안 된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어 바른 길로 나아가게 도와주는 것이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참된 길을 가도록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이치와 경위에 맞게 처신, 처세해야 한다는 것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선비들은 평생을 자신의 학문과 수련에 힘쓰고 그로 인해 얻은 앎을 타인에게 실천하고 전하려 했다. 수도인들 또한 항상 자존자만하지 말고 남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도록 늘 배움의 자세를 가지며 스스로의 학문과 앎을 깊이 닦아야 한다. 그로 인해 얻은 앎과 깨달음은 남들에게 전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상생진리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결국 상제님께서 “선비는 항상 지필묵(紙筆墨)을 지녀야 하나니라”(교법 2장 27절)고 말씀하신 것은 늘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로 상제님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여 올바르게 생활하고 수도하며 남들에게도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힘써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라 생각해본다.

 

   

 


01 조선 초기 신분의 법제적 규범인 양천제(良賤制) 하에서 나타난 용어로 노비가 아닌 모든 사람을 이르는 말.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