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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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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자사(子思)

자사子思

 

 

글 교무부

 

 

 

 

성인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고대의 자사(子思)는 성인이라. 위후(衛侯)에게 말하기를 약차불이 국무유의(若此不已 國無遺矣)라 하였으되 위후가 그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국(衛國)이 나중에 망하였다.(교운 1장 29절)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노(魯)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 기원전 552∼479)의 손자이다. 이름은 급(伋) 자사는 그의 자(字)이며, 한때 위(衛)나라에서 재상(宰相)을 지냈다. 우리에게는 『중용(中庸)』의 저자01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일설에는 자사학파 혹은 여러 유가학자들이 모여 보충과 해설을 덧붙여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주자(朱子, 1130∼1200)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첫 머리에 자사의 저서임과 집필 이유를 밝히고 있다는 점이 눈에 뛴다.02 그럼에도 자사의 생애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몇몇 고서(古書)에서 다른 특정 인물과의 짧은 일화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가 4살 무렵, 할아버지인 공자를 여의었다. 그래서 직접 공자로부터 유교를 배우지는 못했으나, 공(孔)씨 집안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한다. 총명하며 품행이 단정하였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는 소년이었다. 어느덧 장년이 되어서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바로 조부(祖父)의 제자인 증자(曾子, 기원전 372~289)였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나 어린제자로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공자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은 유일한 제자로 손꼽혀 왔었다. 더구나 공자의 가르침을 이행하는 데 철두철미하였던 증자는 자사에게 특별한 사제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부모를 봉양하는 법을 가르쳤고, 인(仁)을 임무로 삼아 조부의 사상을 반복하여 익혀 실천하기를 바랐다. 매일 배운 것을 복습하며 실천해 나가던 자사는 어느덧 자신의 학식(學識)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질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외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술은 사치스럽다고 외면했으며, 더욱더 스스로 겸손하게 행동하여 매우 금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던 어느 때 그가 위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매사에 해어진 상의를 걸치며, 삼십일 동안 아홉 끼만 먹고서 공자와 증자의 가르침을 전하며 산다는 소문이 고을 안에 퍼지게 되었다. 이를 전해들은 전자방(田子方)이 흰 여우 가죽으로 지은 옷 한 벌을 주려 했지만, 자사가 받지 않을까 두려워 이런 말을 전하도록 했다. “나는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빌려준다는 것은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사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러자 전자방이 물었다. “나에게는 있고 그대에게는 없는 것이기에 주는 것인데 왜 받지 않습니까?” 자사는 이 말에 이렇게 답변하였다. “의미 없이 함부로 주는 물건은 진흙탕에 처넣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을 진흙탕으로 여기기는 싫습니다.” 하고 끝내 거절하였다. 이렇게 자사는 일상 자신의 삶에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았고, 청렴한 삶과 허물없는 처신의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이내 자사의 인품이 위후(衛侯)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는 자사를 불러 재상(宰相)의 관직을 하사하며, 정사(政事)를 돌보게 하였다. 마침 나라에 대장군 자리가 공석 상태였기에, 위후는 괜찮은 인물을 추천하라는 명을 자사에게 내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순섭(荀燮)이라는 인물을 천거하였다. 그러자 위후가 말했다. “그 사람은 지방관으로 있을 무렵, 백성들로부터 계란 두 개를 받아먹은 일이 있었으니 등용은 곤란하오.” 자사가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성인이 사람 쓰는 법은 목수가 목재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부분은 살리고, 나쁜 부분은 도려내면 그만입니다. 큰 나무에 약간의 흠이 있다고 그 나무 전체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처럼 인재가 필요한 시국에 겨우 계란 두 개를 받았다고 귀중한 인재를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위후의 얼굴에 깨닫는 기미가 보이자 자사는 말을 이었다. “지금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는 바람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위나라는 병사가 적고 세력이 미약해서 누차에 걸쳐 외침을 당했습니다. 이런 판국에 어찌 계란 두 개 때문에 나라의 사직과 영토를 지킬 간성(干城: 방패와 성, 즉 임금의 방패가 되어 막아주고 성이 되어 지켜줄 인물을 말한다)의 대장군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위후는 이치에 맞는 말임을 느끼고 자사의 의견대로 순섭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하루는 위나라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게 되었다. 국가 안위를 위해 중신들과 함께 다각도로 방책을 모색하려 했지만, 어느 누구도 충언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더구나 한 나라의 군주인 위후는 이런 정세를 가벼이 여길 뿐만 아니라 옳지 않은 계책(計策)만을 늘어놓으면서 자화자찬에 빠져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중신들 하나같이 군주의 계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일색을 늘어놓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자사가 “내가 위나라를 살펴보니 이른바 임금은 임금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다는 말이 이와 같습니다.”라며 위후와 중신들에게 경계의 목소리를 던졌다.

  하지만 위후와 중신들은 자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자사는 “임금이 스스로 미리 옳다고 여기면 여러 사람들이 계책을 건의할 수 없습니다. 설령 옳은 일이라고 해도 왕 자신이 먼저 그것을 맞다고 해버리면 여러 사람들의 계책을 가로막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신하들이 그른 일에 부화뇌동(附和雷同 : 우레 소리에 맞추어 천지 만물이 함께 울린다는 뜻으로, 자기 생각이나 주장 없이 남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말)하여 임금의 잘못을 조장한다면 오죽하겠습니까? 무릇 일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는 것만 기뻐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또 이치가 담겨 있는 바를 헤아리지 않으면서 임금에게 아첨하고 호감을 사서 용납되기만을 구한다면 이보다 더한 아첨은 없습니다. 임금은 어리석고 신하는 아첨하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한다면 백성들이 지지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若此不已 國無遺矣)”라고 거듭 충언하였다.

  계속해서 자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이미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면, 아랫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윗사람을 현명하다고 칭찬해 주고 복을 받습니다. 반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면 거슬려서 화(禍)를 당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 어디서부터 선정이 베풀어지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모두 내가 성인이라고 말하니,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아볼 수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지금의 임금과 그 신하들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위후와 중신들은 자사의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와 회한을 하기에는 이미 백성들의 가슴 속에 위(衛)는 없었다. 결국 자사의 말처럼, 위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자사는 패망한 위나라를 떠나 노(魯)나라와 송(宋)나라를 주유하며 다시금 스승들의 가르침을 대중들에게 폈다. 하지만 무심한 세월을 이기지 못한 채, 예순 둘에 생을 마감하였다.

 

 

 

 

<참고문헌>

ㆍ사마천, 『사기(史記)』

ㆍ이기석 한용우 譯解, 『(신역)대학 중용』, 홍신문화사, 1994

ㆍ김영수 譯解, 『간신론』, 아이필드, 2002

ㆍ임동석 譯解, 『십팔사략』, 동서문화사, 2009

ㆍ사마광 저, 박종혁 역, 『자치통감 경세요결 100선』, 아세아문화사, 1998

 

 

 


01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따르면, “공자는 아들 이(鯉)를 낳았고, 이의 자(字)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아들 급(伋)을 낳았고, 급의 자(字)가 자사이다.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나라에서 고생을 했었고, 후에 『중용(中庸)』을 지었다.”(孔子生鯉字伯魚伯魚年五十先孔子死伯魚生伋字子思年六十二嘗困於宋子思作中庸)

02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꼭 알맞은 것이 ‘중(中)’이며, 언제나 변함없이 일정하고 바른 것이 ‘용(庸)’이다. 그러므로 중(中)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올바른 도이고, 용(庸)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지켜야만 할 일정한 원리인 것이다. 자사(子思)는 이러한 『中庸』의 가르침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본뜻으로부터 어긋나게 될까 걱정이 되어 이 책을 지으셨다. 그리고 자사(子思)는 이 『中庸』을 맹자(孟子)에게 전했다. 『中庸』은 세상의 기본이 되는 한 가지 원리로부터 설명을 시작하여, 나중에는 세상의 모든 일에 그 원리를 적용시키고 다시 세상의 모든 현상을 한 가지 원리로 귀납시키고 있다. 『中庸』의 원리는 크게 보면 온 우주에 가득차 있고, 작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어떤 물건 속에도 그것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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