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 Home
답사기
북경국제학술답사를 다녀와서 Ⅰ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북경국제학술답사를 다녀와서 Ⅰ

 

 

  대한민국의 96배 크기! 56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대륙! 중국을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들이다. 하늘을 치솟은 마천루와 그 사이에 놓여있는 고가도로, 그 위를 달리는 외제 차량들의 모습은 이제 중국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나 중국은 종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靜)적이다. 5대 종교(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 외에는 일체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참에 8월 12일 북경대학교에서 미미한 변화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북경대학 국제동아시아연구소와 종교연구소, 그리고 한국 신종교학회 주최로 ‘동아시아 사회변혁과 신종교(新宗敎)’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한ㆍ중ㆍ일의 학자들이 모인 것이다.

중국정부는 북경대학교 내에서만 종교관련 연구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행사당일 학술대회장인 북경대학 100주년기념관에 중국 사회과학원 출신 학자들과 중국 종교사무국, 기타 단체장들까지 미리 자리를 잡고 한국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반까지 마라톤 발표로 지칠 만도 한데 3국 학자들은 신종교만이 가지는 특성과 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열정과 호기심으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어느 중국학자는 가까운 미래에 중국 내 산업발달로 인한 문제해결에 있어 기존 종교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한 신종교가 제시하는 다양한 매력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며 신종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발표 후 가진 토론 시간에 종교 사무국 담당자는 신종교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중국학계뿐만 아니라 ‘중국’이 심도 있게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금지종교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대회장 분위기를 다소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은 이런 중국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끝나는 시간까지 머리 속에 화두로 남게 되었다.

  학술대회를 마친 다음날에는 북경 내 종교시설물 답사가 있었다. 불교(옹화궁과 운거사), 유교(국자감), 도교(백운관), 천주교(남당) 순으로 진행된 이번 답사는 중국종교문화의 단면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행사가 벌어지는 북경은 중국의 수도로 남경이 수도였던 짧은 기간(1928~49)을 빼고는 그 지위를 지켜와서인지 아직까지도 전통문화유산이 도시 군데군데 많이 남아있다.

 
 

불교 - 옹화궁과 운거사

 

  보통 중국의 사찰을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우선 향의 크기와 양에 놀란다. 흔히 우리들이 접하는 짧고 단아한 토막이 아닌 긴 막대기 형식의 다발로 된 향이니, 연기의 양이나 향의 강도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불교 종교시설물로 처음 찾은 옹화궁(雍和宮) 역시 입구부터 향으로 뒤덮혀 있었다. 이곳은 북경 최대의 티베트불교 사원으로 강희 33년(1694) 건립되었다가 3대 황제인 옹정제가 즉위 전에 살았던 집이다. 그 후 옹정 3년(1725)에 옹화라는 이름이 하사됐다고 한다. 옹화궁 내의 주요건물의 현판은 한자와 몽골문자, 티베트문자, 만주문자로 적혀 있어 각 민족을 포용하려는 중국의 정책을 엿볼 수 있다.

  옹화궁의 면적은 3만㎡(약 9천 평)이며 전각과 누각이 1천여 칸에 달한다고 하니 꼼꼼히 살펴보려면 일행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사원은 붉은 담장에 누른 기와를 씌워 화려함을 주고 규모가 방대해 장엄함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옹화궁 내 백단목을 조각한 대불 입상은 불상 머리가 천장에 거의 닿아 있을 정도로 웅장하다. 이 불상은 하나의 나무를 깎아 만든  중국 최대의 통나무 조각으로 기록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발길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높이 18m, 지하에 묻힌 부분은 9m에 달해 조형이 웅대하면서도 섬세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볼거리가 눈앞에 있어도 일정에 쫓겨 전체를 자세하게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만 남기고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옹화궁이 외형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면 북경 방산현에 있는 운거사(雲居寺)는 부단(不斷)히 흐르는 내면의 정신을 담고 있다. 중국북방불교성지이기도 한 이곳에 들어서면 불법성(佛法城)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불법의 무엇을 말하려는지요?”라는 물음에 가이드는 둘러보다보면 알게 된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중국 천태종 제2대 조사인 혜사(慧思)의 제자인 정완(靜琬)이란 스님에 의해 창건된 이곳에는 돌에 새긴 석경(石經) 14,800여개가 1000여 년 동안 놓여있다. 석판 하나의 길이가 80cm정도에 폭이 40cm, 두께가 10cm에 달하니 전체 무게를 쉽게 짐작할 수가 없다. 석판에 새겨진 글 한자 한자의 섬세함도 놀랍지만 날렵하고 끝이 살아있는 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한국의 합천 해인사에 있는 목판 팔만대장경과 수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석판을 만들게 된 과정과 그 노력에 실로 정성스러움을 느낀다. 가이드의 간단한 설명으로도 그 과정이 절절하게 가슴에 느껴진다.


  북위 태무제때 법난(法難, 국왕이나 정치권력의 불교박해나 탄압)으로 절망한 정완은 정법(正法)을 후손들에게 꼭 전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석경을 새기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정완이 방산에 들어올 때가 수나라 원년(605)이었습니다. 그는 우선 석경을 만들기 적당한 청석이 풍부하고, 석굴을 파기 좋은 석경산 밑에 운거사를 설립했죠. 그 후부터 석경 새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석경 작업이 당대에 끝나지 않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 불법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신념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한때 작업이 원대에 단절될 위기에 놓이자 고려 천태종 스님 혜월(慧月)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한다. 머나먼 오지에서 불법을 지키기 위해 흘렸던 그의 땀방울에 애환이 어찌 없었을까. 1000년이 넘도록 석경을 보관한 것은 불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가슴에 식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발걸음이 다시 불법성 비석에 와 닿았다. 다시 보니 정말 그 이름에 걸맞는 듯하다.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