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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4년(2024)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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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만장

만장



교무부 손영배


▲ 1961년 충남 태안 장례식 만장 행렬, 「김언석 기증 충남 상례 사진전」, 국립민속박물관


입을 두고도 감히 말을 못하고         有口不敢言(유구불감언)
눈물이 있어도 감히 곡을 못하네      有淚不敢哭(유루불감곡)
베개를 만지되 남이 볼까 무섭고      撫枕畏人窺(무침외인규)
소리를 삼키며 몰래 눈물만 삼키네   呑聲潛飮泣(탄성잠음읍)
그 누가 날 선 칼날을 가지고서        誰將快剪刀(수장쾌전도)
굽이굽이 맺힌 간장 잘라내 줄고      痛割吾心曲(통할오심곡)


  위의 한시는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오성 이항복(李恒福, 1556 ~ 1618)이 억울하게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은 벗을 위해 쓴 글이다.01 절친한 친구를 잃은 슬픈 감정을 감출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이항복은 이 시를 유가족 몰래 관 속에 넣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인에 대해 애달프게 슬퍼하며 지은 시를 만장(挽章 또는 輓章), 만사(輓詞)라고 불렀고, 이를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旗]처럼 만들어 장례 행렬에서 사용한 것도 만장, 만사라고 불렀다. 이 글에서는 만장의 유래를 살펴보고, 『전경』에 나오는 최익현, 손병희, 민영환과 남원 양 진사의 만장 네 편을 간략히 이해하고자 한다.



만장의 유래와 장례 행렬에서의 만장


  만장의 유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기원전 221)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례 행렬에서 상여의 뒤를 따르던 사람이 죽은 사람을 추모하며 애절하게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만가(挽歌)라고 한다. 장례 행렬에서 부르던 만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죽은 자를 추모하는 한시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만가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기원전 141~기원전 87) 때 이르러 장례의 정식 절차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02 예를 들어 나라에서는 장례 때에 왕족이나 귀족에게는 해로(薤露)라는 시를 만가로 부르게 하였고 사대부나 평민에게는 고리(蒿里)라는 시를 만가로 부르게 했다.03 그 후 시 문학과 예술이 발달했던 당(唐)나라 때 와서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만장이 성행하였다. 이렇게 만가에서 시작된 만장은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형태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만장은 고려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을 비롯한 명현들의 문집에서 발견되고 고려 후기 무신 집권기에 들어와서는 양적으로 늘어났다.04 조선시대에는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유교식 장례 의례가 보급되면서 고인을 기리는 만장을 짓거나 이를 상가(喪家)에 보내는 일이 활성화되었다. 이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 형태의 만장으로 만들어 장례 행렬에 사용한 것도 만장이라 하는데, 고려 말 성리학자인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장례에도 이를 사용했다고 전한다.05 16세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만장을 짓거나 장례 행렬에 사용하는 것이 중시되어 서민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시대 유교식 장례 행렬을 보면 방상(方相)-명정(銘旌)-영여(靈輿)-만장-공포(功布)-운삽(雲翣), 불삽(黻翣)-상여[喪輿:대여(大轝)]-상주(喪主)-복인(服人)-조문객 순으로 이뤄져 있다. 행렬 맨 앞에 서는 ‘방상’은 도사처럼 관복을 입고 가면을 쓴 채 창과 도끼를 휘둘러 잡귀와 부정을 몰아내며 망자의 저승길을 깨끗이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 뒤를 품계ㆍ관직ㆍ성씨 등 망자의 신분을 밝힌 ‘명정’이 따르고, 그다음으로 망자의 혼백을 모신 작은 가마인 ‘영여’가 뒤따른다.
  이어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장’은 ‘앞에서 끈다[輓]’라는 뜻에 맞게 상여 앞에 선다. 이때 쓰이는 만장은 긴 대나무 끝에 종이나 비단을 매달아 길게 늘어뜨린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 상여 행렬에서 우뚝 솟아 있어 상여를 앞에서 이끄는 듯한 모양새를 띈다. 뒤따르는 ‘공포’는 장대에 삼베 천을 매달아 가는 길의 좋고 나쁨을 알리는 ‘신호기’ 역할을 한다. 뒤이어 행렬의 중심인 상여가 선다. 상여 옆에는, 죽은 사람의 혼이 하늘로 편안히 인도되기를 바라는 ‘운삽’과 망자의 넋이 명부(冥府)에 무사히 인도되기를 기원하는 ‘불삽’이 선다. 상여 뒤에는 상주와 상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조문객이 따른다. 장례가 끝난 뒤 만장은 신주(神主)를 모셔 놓는 곳에 같이 보관했고, 망인의 문집을 발간하는 경우 부록에 수록했다.06


▲ 조선시대의 장례 풍속도, 「행상하는모양」, 『기산풍속화첩』



  깃발로 쓰인 만장의 경우 폭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길이는 약 240㎝(8자), 폭은 약 60㎝(2자) 내외였다. 색상은 백ㆍ청ㆍ홍ㆍ황 등 다양했다. 만장의 개수는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 비들의 장례와 같은 국장급의 경우 96개를 만든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위상에 따라 그 가짓수를 달리했다.07
  신분이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양반들은 주로 부인, 자식, 형제, 벗을 대상으로 만장을 지었는데 노비, 기녀를 대상으로 한 만장도 적지 않았다.08 문신 김려(金鑢, 1766~1822)는 젊은 시절 자주 드나들던 술집 주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모와의 과거를 회상하며 공허한 심정을 표현하였다.09 이처럼 만장은 죽음 앞에 신분의 벽을 넘어 애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만장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로는 조선 후기에 밀양으로 귀양 갔던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서울에서 온 문사라고 온갖 문자를 써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나무꾼이나 소치는 사내, 떡 파는 아줌마, 주모를 따질 것 없이 걸핏하면 지본(紙本: 종이) 하나를 마련하여 이리저리 쫓아가서 만사를 지어달라 구걸”한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10 이처럼 당시에는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의 상갓집에 만장을 써 보내는 것을 가장 큰 부조(扶助)로 생각했고, 받은 상가에서는 영광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만장의 수효에 따라 망자의 덕망과 학식을 평가하기도 하였다.11 또한 세간(世間)에 학식과 덕망이 높다고 알려진 사람으로부터 지은 만장을 받은 망자는 더 높게 평가받기도 하였다.


▲ 운삽(왼쪽)과 불삽(아삽, 오른쪽), 출처: 『한국의 만장』



  『전경』 속 만장
  『전경』에는 최익현, 민영환, 손병희 세 사람을 위해 상제님께서 지으신 만장과 외워주신 양 진사의 만사가 있다. 위 네 편의 만장을 이해하는 데에 특기할 만한 것은 그 말씀을 하신 시기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암시적 내용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만장12은 상제님께서 최익현이 순창에서 병오(1906)년 윤 4월 23일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으신 것으로 그의 죽음이 예언된 글이다. 최익현은 윤 4월 13일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0일 만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7월에 대마도로 유배된 최익현은 10월에 풍토병으로 쓰러진 후 1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만장 내용에서 ‘시월대마도 예예산하교(十月對馬島 曳曳山河橇)’는 최익현이 대마도에 유배되어 10월에 병으로 쓰러져 사망한 뒤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운상 행렬에 사람들이 길게 뒤따르는 모습을 표현하신 것 같다.13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만장은 상제님께서 1909년 화천하시기 전에 지으신 것이다. 손병희가 살아있을 때 만장을 지어 불사르시며 행하신 공사이다. 예시 59절에는 “대인의 행차에 삼초가 있으니, 갑오(甲午)에 일초가 되고 갑진에 이초가 되었으며 삼초를 손병희(孫秉熙)가 맡았나니 삼초 끝에 대인이 나오리라.”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있다. 여기서 일초는 갑오(甲午,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해당하고, 이초는 갑진(甲辰, 1904)년에 있었던 개화운동이며, 삼초는 상제님 화천 이후인 갑인(甲寅, 1914)년 삼갑운동(三甲運動)으로 보인다. 1914년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는 천도구국단14을 결성하여 민중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대대적인 계몽운동으로 ‘삼갑운동’을 계획하였다. 상제님께서 ‘삼초를 손병희가 맡았나니’라는 말씀은 1914년 손병희가 펼치고자 했던 삼갑운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손병희의 만장을 지으셨다. 내용을 보면 손병희를 충과 의(義)를 아는 사람으로서 임금과 백성들을 평화롭게 하고 세상을 한층 새롭게 만들려고 했던 뜻을 높이 사 중국 전국시대 4군자(맹상군, 평원군, 춘신군, 신릉군)에 빗대셨다.15 상제님 화천 이후의 손병희 행적을 말씀하신 예시적 의미가 담겨는 것으로 보인다. ‘삼초 이후에 대인이 나오리라’는 말씀은 손병희 이후에 도주님께서 나오셔서 상제님의 대도를 펼치실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여겨진다.16 
  민영환(閔泳煥, 1861~1905) 만장17의 경우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순국한 이후에 상제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보인다. 자주독립을 염원하였던 그는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여 1905년 11월 30일에 유서 2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이 소식은 당시 각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었고, 그의 성스러운 충절은 온 국민에게 알려져 의병운동[을사의병]의 기폭제가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민영환의 의기를 ‘일도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나뉘어 존재한다(一刀分在萬方心)’18라는 구절로 만장에 표현하셨다. 만장을 지으신 후 상제님께서는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라고 일러주셨다. 이 말씀이 「예시」 편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시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양 진사의 만장은 조선 말기 영의정이었던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이 스승 양석용을 위해 지었던 것을 상제님께서 읊어주신 것이다.19 권지 2장 27절을 보면, 기유(1909)년 6월 어느 날 상제님께서 류찬명에게 “너는 나로 하여금 오래 살기를 바라는도다”라고 하시며 이 만장을 외워주셨다. 이달 24일에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셨다. ‘상제님께서 오래 살아계시기를 바라’는 류찬명에게 남원 양 진사의 만장을 외워주신 것은 화천할 것을 암시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장례문화에서는 만장이 중요한 의례 중 하나여서 상갓집에 만장을 써 보내는 것을 가장 큰 부조(扶助)로 생각했고, 만장은 깃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장례 행렬에서도 사용했다. 이러한 만장을 받은 상가에서는 이를 영광으로 여겼는데, 현재는 만장을 보내는 풍습이 사라진 대신 화환을 보내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이처럼 만장은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추모하는 글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상제님께서 말씀해 주신 네 편의 만장은 그 시기를 고려해 볼 때 예시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의 일환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01 「만장」, 『한국일생의례사전』.
02 주기평, 「중국 만가시의 형성과 변화과정에 대한 일고찰」, 『중국어문학』 60 (2009), p.33.
03 『樂府詩集』 권27, 相和歌辭2, “薤露蒿里, 泣喪歌也. … 至漢武帝時, 李延年分爲二曲, 薤露送王公貴人, 蒿里送士大夫庶人. 使挽柩者歌之, 亦謂之挽歌.”
04 김보경, 「고려후기 명시ㆍ만시의 특성과 장르적 상관성」, 『한문학논집』 61 (2022), pp.106-107 참고.
05 정몽주의 후손이자 묘소 관리인이 말하길 “상여는 만장을 달고 한양도성을 경유 용인 땅 풍덕천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며, “이 몸이 죽고 죽어!” 서울대 ACPMP 17기 모임길에, 포은 정몽주선생 묘소를 방문하며!」, 개성의 봄은 언제 오려나!, https://m.blog.naver.com/yskwoori/222381119178.
06 홍우기ㆍ박종현ㆍ서명택(편역), 『한국의 만장』 (서울: 다운샘, 2009), pp.21-23.
07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경우에는 96개에 예비용으로 4개를 더 만들었고, 영조의 첫째 아들로 10세에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는 80개, 효장세자빈 현빈 조씨(趙氏)는 50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첫째 아들로 2세에 죽은 의소세손(懿昭世孫)은 60개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성남: 신구문화사, 2017), pp.167-310.
08 안대회, 「한국 한시의 죽음 소재」,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10), p.55.
09 만시에는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가족뿐만 아니라 술집 주모를 애도한 시도 있다. 김려(金鑢)가 주모를 애도한 시가 그것인데 서울에 있던 젊은 시절, 자주 드나들던 술집 주모가 죽은 소식을 듣고 그 주모에 얽힌 일화를 소탈하게 서술하는 중에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같은 책, p.77.
10 같은 책, p.54.
11 국사편찬위원회 편,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 (서울: 두산동아, 2005), p.103.
12 교법 3장 20절, 상제께서 최 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라사대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 낙언(鄭樂彦)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최 익현의 만장을 다음과 같이 지으셨도다.
讀書崔益鉉(독서최익현) 독서 최익현
義氣束劒戟(의기속검극) 의기는 창칼을 하나로 묶었네
十月對馬島(시월대마도) 시월 대마도에서 쓰러지니
曳曳山河橇(예예산하교) 산하에 교(橇)를 길게 끌었네
위 시의 해석은 [이재원, 「돋보기: 최익현의 만장」, 《대순회보》 207 (2018), p.34.]에서 인용한 것임.
13 이재원, 같은 글, pp.40-41 참고.
14 1914년 8월,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명예총재를 손병희, 단장을 이종일로 한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조직하였다. 천도구국단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따라 좀 더 능동적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민족운동을 모색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단이다. 박걸순, 「1910년대 비밀결사의 투쟁방략과 의의」,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서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p.55.
15 주현철, 「대순논단: 대순사상의 인간론 소고」, 《대순회보》 126 (2011), p.103 참고.
16 강대성, 「대원종: 삼초 끝에 대인이 나오리라」, 《대순회보》 190 (2018), p.43 참고.
17 예시 37절 참고.
18 김성수, 「민영환의 만장」, 《대순회보》 270 (2023), p.50.
19 김주우, 「상생의 길: 남원 양진사에 대한 인물 고찰」, 《대순회보》 124 (2011), pp.120-1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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