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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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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가화의 모델이 되기까지(2)

가화의 모델이 되기까지(2)
 
 

동해1 방면 차선감 성귀순

 
 
 
환골탈태하다
  어느 날 휴가가 나와서 집에 올 수 있다고 남편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빠 만난다고 무척 좋아하는 딸을 데리고 터미널에 마중을 나갔습니다. 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면서 가방을 메고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남편이구나 생각하고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아난존자 같은 모습을 잠깐 스치듯이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하고 내 앞에 떡하니 서서
  “잘 있었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본 그 얼굴. 잘 닦아내면 그 모습이 나타나리라 믿었던 그 모습. 나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울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죽음을 오가며 닦인 모습이리라. 가슴이 아려 왔습니다. 그 고통을 참아준 남편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살이 빠져 몸무게는 많이 줄었지만, 단단해진 모습이 훨씬 더 멋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휴가를 몇 번 다녀갔는데,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병원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하산하라는 명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생활하는데, 친구들이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만나는 분들마다 물어봅니다.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나요? 신수가 훤합니다. 좋은 거 있으면 우리도 알려주세요.” 보는 사람마다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정말 더 감사한 건 남편이 대순진리회의 진리를 깨닫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수도하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들고 싶었던 소망도 이루어졌습니다. 모습, 마음 모두 다 변하고 바뀌어 돌아왔으니, 온 가족이 고생한 보람인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조상님께서 주신 직장 
  남편은 집에 돌아온 후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했습니다. 시학공부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고향 형님 회사에 일용직으로 다녔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학공부를 그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식 공부도 시켜야 하고 수도하는 당신 뒷바라지도 하고요. 고민하다가 의논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공부는 계속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생각을 좀 해봐요. 우리 생활도 힘들고, 당신이 나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 안 되겠어요. 가정이 안정되어야 수도하면서 먼 길을 갈 수 있어요. 고정수입이 들어와야 합니다.” 
  남편은 자신이 일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시학공부를 못하면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하지 않아요. 부부가 한 사람은 열심히 상제님 뜻을 받들고, 한 사람은 일해야지 가정이 원활하게 돌아갑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따르겠습니다. 훗날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네.”
 
 
  남편은 그때부터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사십 대 중반인지라 좋은 직장은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맥을 동원해 다 찾아보았습니다. 몇 군데 연락해 두고 기다리고 있을 때, 도장에서 대진요양병원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자기 도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남편은 임시로 다니고 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진요양병원공사에 참여하려고 집을 떠났습니다. 저는 딸이랑 살면서 1년 반 동안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였습니다. 몸은 자꾸 아파오고 힘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만나 편하게 수도하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인가? 내 업보가 얼마나 많은 걸까? 고생이 너무 되니까 여러 생각들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달랬습니다. ‘남편과 수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잖아. 그런데 무슨 이런 약한 생각을.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참았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상제님 앞에서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은 울면서 심고 드리다가 잠들어 촛불이 다 타서 범벅되어 있는 날도 있었습니다. 날이 밝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남몰래 울었던 시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상제님만은 아실 것입니다.
  사실 저는 8남매의 막내였기에 호강하며 자랐습니다. 친정집이 나름 부유하다 보니 고생을 하지 않았고, 궁핍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혼자 수도할 때도 이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돈이 제 주머니에서 떨어져 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남편을 만나면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활을 안 했더라면, 아마도 돈에 대한 해탈까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어린 딸 때문에 돈의 고비를 넘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식을 굶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우는 어린 딸아이에게 돈이 한 푼도 없어 못 해주는 엄마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너무 힘이 들 때면 항상 상제님을 뵈러 도장에 갔습니다. 어느 날은 방면 수반들과 어린 딸을 데리고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참배 가서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친정 아버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저의 손을 꼭 잡고,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미안하다.”
  “아버지께서 제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한 씨 가문에 팔았다. 내 전생에 한 씨 가문에 노름빚이 있었다. 그래서 너를 그 집에 팔았다.”
  저는 꿈인데도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신혼 초에 그렇게 남편이 싫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손만 닿아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당시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남편은 다른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고생을 하는 것이며, 남편과 어떤 인연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상님의 빚을 갚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이 들어도 우리 아버지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면서 더 참고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진요양병원에 공사하러 간 남편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의논도 않고 집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부탁한 것이 될 것 같아서 집에 왔다고 합니다. 직장이 되면 연락받고 내려와도 되는데 ….
  저는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되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가고, 생활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매달 지출은 있는데, 수입이 없으니 빚은 늘어만 갔습니다. 저는 더는 돈벌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의논도 않고 무작정 내려왔으니, 본인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까? 없을까?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심고 드리고, 정성 드리고, 겨우겨우 이겨 내고 있을 때입니다. 당시 저는 건강상태가 너무 안 좋아 지탱하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당신 혼자 이 가정을 책임지세요. 저는 앞으로 더는 돈을 벌거나 당신을 도와주지 못할 것 같아요. 당신이 천지공사를 잘 받들면, 우리의 업이 닦기고 희망도 생기니까, 몸이 다 망가지도록 일을 했습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고 이 가정을 끌고 간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확고한 뜻을 전했습니다.
  3개월, 5개월이 흘러가도 기다리던 직장은 소식도 안 오고,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잔소리를 했습니다.
  “나랑 의논만 하고 왔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앞으로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면 셋이 다 같이 하늘나라로 갑시다.”
  나는 압박 아닌 압박을 했습니다. 남편은 미안해서인지 공사현장의 위험한 일을 택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포항에서 가는 교통편도 불편한, 충남 당진에 있는 현대제철 공사 현장이었습니다. 먼 길 떠나는 남편에게 저는 잔소리를 또 했습니다.
  “도장에서 공사하고 있으면 되는데, 무슨 생각으로 내려와서 고생을 자초하는지 모르겠네요. 도장에 있으면 딸이라도 볼 수 있지만, 이제 더 멀리 떨어져 볼 수도 없네요.”
  떠나는 남편 가슴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혼자 결정해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전 너무 독한 사람 같았습니다. 한순간 잘못 생각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편은 마음을 모두 비우고 후회하면서 집을 떠났습니다.
  저는 딸이랑 또 현실과 부딪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5개월을 수입 없이 비워버린 우리 가정은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울면서 또 상제님을 찾아 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내정 뒤쪽에 있는 4초소에서 수호를 서면서 도전님께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간청하는 심고를 드렸습니다. 이틀째 4초소에서 수호를 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도련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형수, 형님이 전화를 안 받습니다. 형님 어디 계신가요?”
  “형님은 지금 당진에 일하러 갔습니다.”
  “그러시면 지금 형님께 연락해서 빨리 내려오시라고 하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내일 아침에 서류를 회사에 내셔야 합니다. 내일 꼭 해야 합니다.”
  “형수가 책임지고 연락하셔야 합니다.”
  저는 급하게 남편에게 연락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당진은 차편이 일찍 종료되어서 내려올 길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였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무슨 방법을 찾아서라도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방법을 찾아보시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같이 일하는 책임자분에게 부탁했더니, 대전역까지 태워주어서 덕분에 대구역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대구에 있는 회관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첫차를 타고 포항에 도착해서 동사무소, 공공기관을 다니며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튿날부터 출근했습니다. 1년 반 세월을 기다렸던 일이, 하룻밤 사이에 되었습니다. 꿈같은 직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편안하게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회사에 입사하려면 최소한 3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취업하기 어려운 시기라 명문대 졸업자도 줄을 서는 곳입니다. 입사하고 싶은 서류들이 쌓여 있어도 퇴직하는 사람이 소수라서 입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 월급이 높아서 서로 입사하고 싶어합니다. 모두 경사 났다고, 축하하면서 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시댁, 친정에서는 “대순진리회에서 수도한다고 고생하면서 돌아다니더니, 잘 되긴 잘 되는구나,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하시면서 우리가 수도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믿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도인들은 잘됐다고 다들 우리 마음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두 부부가 고생하면서 진실로 하더니, 복을 받는구나.”
  먼저 양위 상제님, 도전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님께 무릎 꿇고 감사드렸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셨지만, 믿고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인연은, 시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문상 오신 분을 만나 인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겁액을 겪다
  옛 어른분들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살 만하면 몸이 아프거나 돌아가신다는 분들이 종종 있어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돈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제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병원, 한방에 침, 경락, 뼈 맞추기, 봉침, 민간요법, 식품 등.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다해 보았습니다.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수도를 열심히 해서 푸는 방법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연수가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후각 선사랑 연수를 가게 되어 신나게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에 연수를 갔습니다. 그때가 차선감 임명을 모시고 3~4개월쯤 지났을 때인 것 같습니다. 연수 이튿날 오죽헌 답사하고 경포대 답사 중에 어슬어슬 춥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눈앞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정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 내가 왜 이러지?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옆에 앉아 있는 선사에게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따라 식당청소 당번이 우리 조였습니다.
  연수 온 첫날부터 아파서 청소도 못 한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눈앞이 흐려지면 정신을 차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건강 상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수반 선사를 따라 주방으로 청소하러 갔습니다.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선사라도 옆에 있으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습니다. 식당 바닥을 솔로 싹싹 문질러 닦고 있는데 앞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남 몰래 마무리를 하고 혼자 샤워실로 갔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면 괜찮아질까?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아 숙소에 들어와서 그대로 누워 잤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조장분과 수반 선사, 방면 식구들이 모두 저를 바라보면서 정신이 드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왜 그러고 있는지, 제가 정신을 잃어버렸는지도 몰랐습니다. 선사는 계속해서 물수건을 번갈아가면서 제 이마에 올리고 있었습니다.
  “차선감요, 괜찮습니까?”
  “응”
  “내일 병원에 가보셔야겠습니다.”
  “내 몸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연수생들과 같이 움직이지 못하고, 전 결국 병원에 가고 말았습니다. 가벼운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야 합니다. 쉽게 보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의사진단이 나왔는데도 몸살감기라고 우기면서 해열제와 간단한 약을 받고 돌아오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이 안 내리면 바로 병원에 오세요. 소견서 가지고 종합병원에 가셔서 입원하셔야 합니다.”
  “네.”
  속으로 괜찮아질 텐데, 뭐 저리 걱정을 하시나 생각했습니다만, 이튿날 또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사를 맞고 소견서를 가지고 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강사분께서는 집으로 내려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연수 마치기 전에는 못 내려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연수 마치기 전에는 절대 안 내려간다고 강하게 부정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냥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연수자 숙소에서 누워만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식당에서 잣죽을 매일같이 끓여 주셨습니다.
 
 
 
  넷째 날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통일전망대를 따라갔습니다. 괜찮을 것 같아서 갔는데, 또 고열이 올랐습니다. 이빨 부딪히는 소리와 신음에 기사분께서 히터를 틀어 주셨습니다. 그 큰 차 안이 숨이 막힐 정도인데도 나는 여전히 춥다고 떨고 있었습니다. 도장으로 돌아와 바로 눕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잘 버티다가 나오는 봉심은 드렸습니다. 도장 출발하는 날 새벽에 강의실에 모였습니다. 죄송스러워 고개도 못 들고 있는 제게, 강사 한 분께서 다가오시며 말했습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나 겁액이 있습니다. 조상님의 겁액이 아니면 이생에 와서 내가 지은 업일 수도 있으니, 잘 참고 견뎌내면 됩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지방에서 연락을 받은 남편은 대구까지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저를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되도록 집에 오질 않고 뭐 하고 있었나요?”
  속초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고 화를 냈지만, 말도 못하는 저를 보고 말문이 막혀 정신없이 차를 몰고 포항으로 내려와 병원으로 바로 갔습니다. 실신한 사람처럼 축 처져서 남편과 선사가 겨우 부축해 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급성 신우신염과 급성 폐렴이었습니다. 두 종류 모두 고열을 동반하는 병이니 계속 실신을 했다가 정신이 들었다가 했나 봅니다. 의사는 안 죽고 살아온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급성신우신염은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입원해서 치료를 하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차도는커녕 아프기만 더 했습니다. 밤새 기침과 온몸의 열 때문에 사경을 헤맸습니다. 저는 너무 아파서 ‘상제님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 지금까지 아픈 고통만 해도 참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큰 병이 아닌데도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밤낮으로 아프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몰골이 망가져 버렸으면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차선감이 왜 이렇게 되셨나요?”
  저는 입도 못 떼고 눈으로만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흐트러진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놀랄 만도 했습니다. 입원 후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정신이 조금 들었는데 번뜩 시학공부 생각이 났습니다. 이틀 있으면 공부를 가야 하는데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퇴원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이 상태로 퇴원하면 죽어요. 저 의사면허 취소시킬 일 있으세요?”
  의사는 화를 내면서 가버렸습니다. 공부 가야 된다는 생각에 아픈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회진 오신 의사를 잡고 애원을 했습니다.
  “제발 좀 보내주세요. 제가 평생을 걸고 한 공부라서 꼭 가야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공부라서 가야 하지만 열이 내리지 않는데 어떻게 갑니까? 이대로 나가면 죽어요. 열이라도 내리면 생각이라도 해보지요.”
  그런데 이때부터 신기하게도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걱정은 되지만, 워낙 간절히 애원하니까, 가퇴원을 시켜주었습니다.
  “의사 목숨 걸고 해주는 거니까, 마치고 바로 돌아오시고 약은 꼬박꼬박 잘 챙겨 드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는 연수에서 5일 동안 사경을 헤매며 참고 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와서 또 5일 만에 치료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시학공부를 갔습니다. 밥을 먹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죽만 먹다가 공부를 갔으니, 아무 힘도 없었습니다. 죽어도 공부는 한다는 마음을 먹고 상제님께 간절히 심고를 드렸습니다. 공부반에서는 비상 아닌 비상상태였습니다. 연수 때부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왔다고 했습니다. 공부반 사람들 모두 저를 위해 또 우리 반 공부가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저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공부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나 때문에 공부반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면 안 되기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남편이 걱정이 가득 실린 얼굴로 데리러 왔습니다. 마누라가 죽을 것 같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겠지요. 저는 혼자 서지도 앉지도 못했습니다. 이틀 후에 초강식도 참여해야 했습니다. 병원에 바로 입원하러 가야 하는데 남편보고 집으로 바로 가자고 했습니다. 병원부터 가야 한다는 남편과 실랑이를 하였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초강식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또 가퇴원을 부탁합니까? 병원에서 나를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다고, 돌았다고 하지 않겠어요?” 
  종교가 대순진리회라고 병원차트에 기록까지 해 두었는데, 우리 대순을 욕 먹일 수 없었습니다. 가퇴원 이후에 사실 저는 병원에서 준 약을 한 첩도 안 먹었습니다. 식사도 못 했지만, 시학공부 기간이라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도 약은 물론이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먹어봤으면 하는 음식들을 다 싸서 왔지만, 겨우 몇 숟갈 먹고는 먹질 못했습니다. 참 다행인 것은 그때 남편의 휴가 기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직장 때문에 치성참석이나 도장참배를 자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방면 회관치성도 있고 해서, 그 기간에 휴가를 냈습니다. 수반들과 같이 치성을 참석하려고 계획이 세워져 있을 때였습니다. 나 혼자 밥도 못 먹고 혼자 누워있어도 남편과 수반들은 치성참석을 보냈습니다. 같이 다녀오라고 했을 때 남편이 못 간다고 했습니다.
  “아픈 당신을 혼자 두고 어떻게 갈 수가 있습니까?”
  “나를 살리고 싶으면 다녀오세요.”
  그 와중에 치성참석을 다 시켰습니다.
  “제가 죽을 것 같았으면 벌써 상제님께서 데리고 가셨겠죠. 다녀올 때까지 살아있을 테니, 정성이나 잘 드리고 오세요. 아버님 어머님 만나 뵙고요. 인사 잘 드리고 오십시오.” 
  이틀 후에 초강식을 하러 여주본부도장에 갔습니다. 제 인생에서 최저의 몸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이 고갈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거죽만 남아 푹 내려앉으면 없어져 버릴 것 같은 몸으로, 어금니 꽉 물고 간신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강식을 하려고 신생활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는데 밥알이 돌이 되어 입안에서 굴러 다녔습니다. 목에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뱉어 내지도 못하고 억지로 넘기려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초강식을 하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갈 같은 밥알을 삼켰습니다. 강식시간은 다가와서 연습을 하는데 주문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문을 잘해야 강식을 하는 것인데, 본전에 올라가서 잘할 수 있을까? 말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강식은 시작되었고 상제님 앞에 앉아서 강식을 했습니다. 주문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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