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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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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칼럼 :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풀리리라

무위이화(無爲而化)로 풀리리라
 
 
 
연구위원 백경언
 
 
 
  사람이 제대로 해내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배가 아프다는 아들을 놓고 손바닥으로 배를 쓸어내릴 때에도, 허리가 아프다고 하소연하시는 부모님을 대할 때에도 한없이 무력한 자신을 보게 된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는 종류도 많거니와 언제나 만만하지가 않다. 행복할 땐 능력 있어 보이던 사람마저 이러한 과정을 겪다보면 풀이 꺾여 절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혹자는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이런 차원에서 사람이 믿는 것은 어쩌면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에 사건의 해결을 맡긴다는 것은 일면 무능력한 인간의 소치로 보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가장 현명한 대처법일 수도 있다. 이때 인위적(人爲的)으로 어떤 행위를 하지 않고 시간을 따라 순리적으로 일이 처리되는 것을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말한다. 도수(度數)에 따라 자연 만물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은 대표적인 무위이화 현상이다.
  상제님 재세 시(在世時)에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님께 고(告)하면 그 일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다. 1904년(甲辰) 김병욱이 나라의 중진으로 있으면서 민심의 동요를 진무하여 그 천직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 끓듯 하는 민심을 진무할 수 없어 “상제의 처분만을 바라옵니다.”라고 고하자 그날 밤 눈비가 내리고 몹시 추워져 노영(露營)에 모였던 민중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해산하게 된다. 이후 사흘 동안 계속된 추위와 눈비로 민중이 다시 모이지 못하니 민요는 스스로 가라앉았다.01 같은 해 도적이 함열(咸悅)에 출몰하여 주민들이 공포에 떨자 김보경은 자신의 집이 부자라는 소문에 도적의 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이를 상제님께 고하였다. 상제님께서 웃으시며 보경의 집 문 앞에 침을 뱉으신 뒤로 도적이 들지 않았다.02 박공우 역시 아내가 물을 긷다가 엎어져서 허리와 다리를 다쳐 기동치 못하자 매우 근심하다가 상제님 계신 곳을 향하여 자기의 아내를 도와주십사고 지성으로 심고하였더니 그의 처가 곧 나아서 일어났다고 전한다.03 이외에도 직접 고하거나 심고(心告)를 드리기만 하는 것으로 일이 순조롭게 풀린 예는 허다하다.
  상제님께서는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人事)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일이라도 천지공사의 도수에 붙여 두면 도수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이다. 사시(四時)를 따라 만물이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대로 진행되듯이 상제님께서 인식한 내용이 도수에 박혀 그대로 진행되고 풀린다는 사실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상제님께서 인간을 파멸에서 구제하기 위해 해원(解冤)을 위주(爲主)로 천지공사를 해놓으셨기 때문이다. 상제님을 해원신(解冤神)으로 신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러나 현실적으로 우환(憂患)을 만나면 무위이화로 풀린다는 확신보다 불신과 의뢰심으로 근심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쩌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언제나 걱정을 이고 사는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인지 모른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이 자신의 걱정을 고한 뒤에 다시 근심하면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며 종도들을 위로하셨다. 옛말에 화복(禍福)이라는 말이 있다. 당하는 화를 견디어 잘 받아 넘기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수도인에게도 화(禍)는 표면상 분명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삼계(三界)를 통찰(統察)하시는 상제님을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황응종이 아들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청수를 떠놓고 멀리 상제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구하여 주실 것을 두 손을 모아 발원하였던 일이 그 좋은 예이다. 아들의 병세로 고통을 받았으나 지극한 심고로 고비를 넘긴 응종은 다음날 동곡 약방에 가서 상제님을 배알하고 “내가 어제 구름 속에서 내려다보니 네가 손을 모으고 있었으니 무슨 연고이냐?”04고 물으시며 웃으시는 상제님을 뵙게 된다. 이런 경험은 화를 겪고 난 사람만이 실감할 수 있는 상제님에 대한 사실적인 자각(自覺)이 된다.  
  그러므로 무위이화로 풀려나갈 수도와 인생사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심령(心靈)을 구(求)하여 상제님의 임의(任意)에 맡기는 일이다. (세상) 모든 일이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 덧없는(뜬구름 같은) 인생이 부질없이(공연히) 저 혼자 바빠하고 있다는 “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05이란 말처럼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음을 버리거나 허둥대는 것은 욕속부달(欲速不達)의 우(愚)를 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위이화는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거친다. 이는 시간을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된다는 말이다. 개벽을 이루고자 하시는 상제님의 일이 시일이 많이 걸리는 것도06 이 때문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각자가 겪는 고통도 선천의 역사를 거치면서 쌓아놓은 무수한 겁액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성급하게 결과를 기다릴 일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난경(難境)이라도 혹 발견되는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에 쌓인 원울(冤鬱)이 풀리는 신도(神道)를 믿어, 안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고 한마음으로 나아갈 일이다.
  “한 사람이 원한을 품어도 천지 기운이 막힌다.”07고 하셨다. 결국, 언젠가는 모든 원울이 상제님의 덕화(德化)로 풀리게 되어 있다. 이제 짐을 내려놓자. 달리는 기차에서 짐을 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은 기차가 모든 짐을 운반해 주기 때문이다. 해원신으로서 삼계를 관장하고 계신 상제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이유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단주(丹朱)로부터 시작되어 삼계에 채워진 원(冤)을 모두 풀어 인간을 구제(救濟)하시겠다는 상제님의 덕화는 가히 자모의 정[慈母之情]이 아닐 수 없다. 걱정 근심을 비롯한 모든 우환(憂患)이 무위이화로 풀려나감을 경험함으로써 실제적 상제님의 존재를 자각하고 신심(信心)을 두터이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덕화를 망각함이니 어떠한 경우라도 경계할 일이다.
 
 

01 행록 3장 25절 참조.
02 행록 3장 24절 참조.
03 권지 2장 1절 참조.
04 권지 2장 12절.
05 교법 3장 47절.
06 교법 3장 7절 참조.
07 공사 3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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