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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82) :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9년 4월, 상제님께서는 계속 김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보셨다. 하루는 백지에 ‘二十七年’이라고 쓰시기에 종도들이 그 뜻이 무엇인지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홍성문(洪成文)이 회문산에서 27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27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백지 한 장을 열두 개로 오려내시며 각 쪽지마다 어떤 글을 내려쓰셨다. 상제님께서는 열두 쪽 중 한 쪽만을 불사르시고 나머지 열한 쪽은 시좌하고 있던 이치복에게 주시며 불사르도록 시키셨다. 그러자 갑자기 비가 쏟아졌고, 가뭄에 말라가던 보리가 생기를 되찾았다.
金屋瓊房視逆旅 금으로 지어진 집과 옥으로 만든 방들이라고 해도 여인숙처럼 여기고(귀하게 여기지 않고)
회문시(回文詩)의 일종인 이 시는 그 해석이 다양하여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다만 위에 풀어놓은 것은 정확한 해석은 아니며 편의상 적어놓은 해석일 뿐이다. 이 시에서 돋보이는 특징은 팔음과 28수, 그리고 64괘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먼저 각 행의 첫 글자인 ‘金, 石, 絲, 竹, 匏, 土, 革, 木’은 팔음(八音)을 말한다. 팔음이란 각각 金, 石, 絲, 竹, 匏, 土, 革, 木으로 만들어진 8개의 국악기에서 나는 소리를 말한다. 즉 편종·징 등이 금(金), 편경·특경 등이 석(石), 거문고·가야금·아쟁 등이 사(絲), 피리·대금 등이 죽(竹), 생황 등이 포(匏), 훈(塤: 질나발)·부(缶:질그릇 닮은 악기) 등이 토(土), 장구·소고 등이 혁(革), 박(拍)·축(祝) 등이 목(木)으로 된 국악기인 것이다. 다음으로 이 시에서 각 행의 네 번째 글자인 ‘房, 壁, 尾, 心, 星, 柳, 畢, 牛’는 28수에 속한 것들이며, 각 행의 마지막 글자인 ‘旅, 師, 解, 離, 履, 隨, 益, 頤’는 64괘의 괘명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 불가지의 현재 모습. 現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불가절. 지금은 마을이 거의 사라지고 1∼2세대 정도만 남아있다.
상제님께서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신 후 전주 용머리고개에 살고 있는 김덕찬을 불러오도록 시키셨다. 상제님께서는 김덕찬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는 그 말씀을 귓가로 흘려들었다. 그러자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이제 용소리(龍巢里) 김의관(金議官)의 집에 가서 자고 오너라.”고 이르셨다. 김덕찬은 상제님의 말씀에 따라 용소리에 사는 김의관의 집으로 갔는데, 그의 집 근처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만나 심한 곤욕을 당했다. 그는 분에 이기지 못해 김의관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신 상제님을 원망하며 불가지로 되돌아왔다. 상제님께서는 불가지 김성국의 집 밖에 서 계시다가 웃으시며 김덕찬을 보시고는 “왜 자지 않고 되돌아오느냐?”고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그를 데리고 방에 들어오신 후 그에게 마음을 달래라고 술을 한 잔 부어주시며 “사람과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고 넌지시 말씀하시니, 깜짝 놀란 김덕찬은 상제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김덕찬은 작은 일이라도 지극히 언행을 조심하였다.
▲ 현재의 용소리 모습. 용이 깃들어있는 형국이어서 용소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09 사진 중앙에 나무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 옛날 시목정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용소마을에 소재하며 전주 용소초등학교 동쪽 편에 있다.
상제님께서는 김덕찬을 데리시고 불가지를 떠나 용소리 시목정(柿木亭)으로 가셔서 그곳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다니셨다. 그 무렵 상제님께서는 김덕찬과 함께 싸리재10를 넘어가시다가 고사리를 캐던 한 노구를 만났다. 상제님께서 그 노구에게 중이 양식을 비노라고 양식을 청하시니, 그 노구는 처음에 없다고 거절하다가 상제님의 청을 재차 받고 가지고 있던 쌀 두 되 중에서 한 홉을 상제님께 내어드렸다. 상제님께서 이 양식을 받아드시고는 김덕찬에게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 하는 것이 옳도다.”하고 말씀하셨다.
▲ 1900년대 초기의 대전역
01 순창의 구전설화(下)』 (순창문화원, 2003), pp.72-110; 최삼룡, 「전북지역의 道家에 대한 고찰」, 『한국도교사상의 이해』 (한국도교사상연구회, 1996), p.316. 02 「27년 동안의 헛도수」, 『대순회보』 68호 (2007), pp.17-29 참조. 03 마원(馬援, 기원전14~기원후49). 산시성[陝西省] 싱핑현[興平縣] 유푸펑[右扶風] 마오링[茂陵] 출생. 전한(前漢) 이래 명문가 출신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직분을 다하고자 평생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빈객(賓客) 수백 가(數百家)를 포섭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다. 왕망은 그런 그를 불러 한중랑태수(漢中郞太守)로 삼았다. 후에 마원은 광무제의 신하가 되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어 농서태수(陇西太守)로서 간쑤성[甘肅省] 방면의 강(羌)ㆍ저(免) 등의 외민족을 토벌하였다. 41년 이후에는 복파장군에 임명되어, 교지(交趾: 북베트남) 지방에서 봉기한 징칙(徵側)과 징이(徵貳) 자매의 반란을 토벌하고, 하노이 부근의 낭박(浪泊)까지 진출하여 그곳을 평정하였다. 그 공로로 43년 신식후(新息侯)가 되었다. 45년 이후는 북방의 흉노와 오환(烏丸)의 토벌에 활약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남방의 무릉만(武陵蠻)을 토벌하러 출정하였으나, 열병환자가 속출하여 고전(苦戰)하다가 진중에서 병들어 죽었다.(두산백과사전, doopedia 참조) 04 필탁(畢卓, ?~?): 동진(東晉) 신채(新蔡) 동양(鮦陽) 출생. 유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주어진 직분에 소홀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원제(元帝) 태흥(太興) 말에는 이부랑(吏部郞)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술을 즐겨 직분을 돌보지 않았는데, 사랑(舍郞)에 술이 익으면 훔쳐 마시다가 관원에게 붙잡히곤 했다. 후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온교(溫嶠)의 평남장사(平南長史)도 되었지만, 여전히 벗들과 어울려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웃통을 벗은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동안 내리 술을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한 손에는 게 다리를 들고, 한 손에는 술잔을 쥔 채 술 연못 속에 빠져 생애를 바치면 좋겠다.”고 스스럼없이 말하곤 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928&docId=1710154&mobile&categoryId=1981 참조) 05 용(龍)으로 변신하거나 용의 기운을 사용하여 조화를 부리는 술법. 용둔은 비를 내리게 하거나 멈추게 하고 수전(水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여러 전투 환경을 조성할 때도 사용된다. 이것은 용이 물을 다스리는 동물로 알려져 왔던 사실과 관계가 있다. 06 이마두에 대해서는 「신성ㆍ불ㆍ보살의 하소연으로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오시다」, 『대순회보』 68호 (2007), pp.10-12 참조. 07 최수운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 최제우에게 천지대도를 내리시다」, 『대순회보』 70 (2007), pp.10-15 참조. 08 자세한 내용은 「천하를 평정한 당태종」, 『대순회보』 90호 (2008), pp.22-29 참조; 특히 당 태종이 24장과 함께 혼란한 시국을 바로 잡기 위해 활동했던 20년간은 중국 전체 인구의 2/3 이상이 목숨을 잃은 시기였다. 이재원, 「중국 섬서성, 하남성을 다녀와서(4)」, 『대순회보』 82호 (2008), pp.102-103 참조. 09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 하』 (한글학회, 2003), p.361. 10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싸리재. 11 홍문관은 조선시대 집현전의 후신으로서 유학 경서와 역사 서적을 관리하고, 문장의 작성 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홍문관 정자는 위계는 낮으나 청직(淸職) 중에서도 으뜸가는 관직이었으므로 선발 과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12 『증산도 도전』 2쇄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1996), pp. 505-506. 증산도는 『증산도 도전』 3쇄를 간행하면서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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