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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2년(2012)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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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종교문화답사) : 네팔·인도 종교문화탐방 네팔 편

네팔·인도 종교문화탐방

 

-네팔 편-

 

 

연구위원 장선렬

 

 

 

  이번 네팔 ⋅ 인도 답사는 네팔과 북인도를 경유하여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의 사원과 유적지 등을 중심으로 기성종교의 폭넓은 이해를 위한 종교문화탐방이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인도 델리(Delhi) 국제공항으로 출항하여 네팔의 카트만두(Kathmandu), 포카라(Pokhara), 룸비니(Lumbini)를 거쳐 인도 국경을 버스로 넘고 인도의 바라나시(Varanasi), 카주라호(Khajuraho), 아그라(Agra), 자이푸르(Jaipur), 델리로 돌아와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10시간을 넘게 날아 인도의 수도 델리에 도착하였다. 처음으로 맞는 델리의 습한 공기는 우리나라 장마철의 기후와 비슷했다. 현지 가이드가 “나마스떼”01 하며 인도의 전통적인 인사를 한 후, 유창하게 한국어로 우리 일행에게 축복의 의미라며 생화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며 뉴델리의 도심을 버스를 타고 달리는 동안 창밖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낙후된 인도와는 다르게 뉴델리는 한창 개발 붐이 일어나고 있어서 우리나라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1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향했다. 멀리 히말라야 산맥이 보이고 산꼭대기까지 계단식 다락논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흡사 우리나라 산악지대의 논들을 보는 것 같았다.

  네팔이라는 국명은 네팔의 수호신인 ‘Ne’와 보호라는 의미의 ‘pal’에서 기원한 것인데 직역하면 ‘신의 보호’라는 뜻을 가진다. 네팔은 중국과 인도 사이인 히말라야산맥 중앙부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내륙국가로 국토의 대부분을 산이 차지하고 있어 국기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각형이 아닌 2개의 삼각형을 잇대어 놓은 모양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상징하고 있다.

  네팔의 국교(國敎)는 인접국인 인도처럼 힌두교이며 카스트제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힌두교가 81%, 불교 11%, 이슬람교 4%, 기타 4%를 차지한다. 힌두교 국가가 발전이 안 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카스트제도다. 카스트(caste)란 사람이 태어남과 동시에 신분이 결정되고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신분제도를 말한다.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Brahman)은 승려이고, 그 다음으로 체트리(Chhetri)02는 왕족이나 장군, 바이샤(Vais"ya)는 상인, 수드라(Sudra)는 제일 낮은 계급인 천민이다. 카스트는 이 4단계 외에도 더 낮은 계급으로 불가촉민(不可觸民: untouchable)으로 구분되는 하리잔(Harijan)이 있다. 네팔에서 낮은 계급인 수드라로 태어나서 어렵게 살아도,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계급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1963년 카스트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전통이 워낙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어 오랜 관습을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현지 가이드에 의하면 경제개방정책에 의해 돈이 우선시 되면서 서서히 인식이 변하고 있다고 한다.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Kathmandu)에 도착하니 대학생들 주도로 물가 인상에 대한 파업이 진행 중이었다.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에 다니는 차는 관광객을 태운 차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1980년대를 보는 듯한 풍경이었다. 네팔은 왕이 다스리던 왕국이었으나 2007년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다스리는 공화제로 바꿨으며 실권을 지닌 총리가 내각을 이끌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민주공화국이 된 나라지만 헌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이며 소수민족이 많아 의견통일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이곳도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네팔의 역대 왕이 생활했던 왕궁(더르바르 광장)으로 중세 카트만두의 쿠마리(Kumari) 사원, 시바-파르바티 사원 등 주요 건물군이 모여 있다. 왕궁 안에는 네팔인에게 살아있는 여신으로 숭배받는 쿠마리가 기거하는 사원이 있었다. 쿠마리는 고대 힌두여신 탈레주(Taleju)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총 32가지의 조건을 심사하여 석가모니 가문인 ‘샤카(Shakya)’성을 가진 여아 중에서 선발된다고 한다. 일정시간 사원 창가에서 서민이나 관광객들에게 노출되고 기도와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초경이 지나면 쿠마리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간다. 우리 일행이 가는 날은 시간대가 맞지 않아 쿠마리가 모습을 보인다는 창가만 바라보다 돌아서야 했다.

 

 

 

  광장 주변으로 힌두교의 신들을 모신 사원이 많았다. 힌두교의 중심이 되는 삼신(三神)을 살펴보면, 첫째 브라마(Brahma)는 창조의 신으로 땅과 그 위의 모든 것을 창조했지만 모시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둘째 비슈누(Visnu) 신은 세계를 지키고 유지하는 신으로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모신다. 셋째 시바(Shiva)는 파괴의 신이자 생식의 신으로 상징물로는 링가가 있다. 비슈누를 모시는 사람들에 비해 사회 하층부에 속한 사람들이 모신다. 브라마보다 비슈누와 시바가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신으로 알려져 있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시바신과 그의 부인 파르바티를 모신 사원이 있다. 건물의 정면 창가로 시바신과 파르바티가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이 인상적이었다. 신이 바라보는 그곳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식을 하거나 정치인들이 연설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이 바라보는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맹세하는 곳이기에 많은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더르바르 광장에서의 볼거리로는 힌두교의 여러 신들의 상도 있었으나 인상이 깊었던 것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광장에서 여가를 보내며 지내는 모습이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네팔에서는 젊은이들 일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이 외국에 나가 일하고 있다 한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인기가 높아 대학에서도 한국어과가 개설되고 한국어시험을 통과해야 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다음은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인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로 발길을 옮겼다. 사원의 입구에서 385개의 계단을 올라야 사원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스와얌부나트’라는 말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이라 한다. 경내에는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듯 각양각색의 탑이 세워져 있어 네팔 불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사원 꼭대기가 하얀색 돔 형식의 불탑인 ‘스투파(stupa)’03였다. 스투파는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요소를 상징하고 있는데 돔의 아랫부분은 땅(地), 흰색의 반원형 돔은 물(水), 눈과 13층 첨탑은 불(火), 우산 모양의 구조물은 바람(風), 꼭대기 첨탑은 하늘(天)을 의미하고 있어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탑 사면에는 카트만두를 수호하는 듯한 거대한 붓다의 눈이 그려져 있다. 이 눈은 ‘천안, 혜안’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인간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이라 한다. 물음표처럼 보이기도 하는 코는 데바나가리 문자04 로 1이란 숫자를 표기한 것인데,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로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경내 곳곳에 원숭이가 많이 돌아다녀 일명 원숭이 사원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원숭이들이 사원에 있으면서도 수도를 게을리 한 탓인지 무척 사납다. 스와얌부나트를 나와 카트만두에서 또 다른 불탑이 있는 보다나트(Boudhanath)로 발길을 옮겼다.

 

 

 

  보드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큰 스투파가 세워져 있는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이자 순례지다. 예전에는 티베트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지는 않았다. 1950년 중국의 핍박이 심해지자 1956년 달라이라마가 망명을 하면서 티베트 난민의 행렬이 이어져 이곳에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스와얌부나트의 스투파보다 거대한 탑의 장엄한 경관에 보는 이들은 저절로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사원 주위에 사는 티베트인들에겐 사원이란 어쩌다가 한번씩 찾아가서 소원을 비는 장소가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가는 곳이다. 스투파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진언(眞言)이 새겨진 마니차[법륜(法輪)]를 돌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또한 마무리 하는 곳이다. 이날도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탑 주위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 순례자들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옴마니반메훔(Om Mani Padeume Hum)’05이라는 불교 진언이 울려 퍼지는 평화로움 속에 발길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다음 날 카트만두를 출발하여 포카라로 향했다. 카트만두는 해발 1,330m이고 여기서 200km 떨어진 포카라는 해발 800m이다보니 계속해서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이었다. 우리나라 설악산의 미시령 고개가 험하다고 하지만 네팔의 고속도로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왕복 2차선의 도로에 중앙선은 보이지도 않고 난간대도 없는 절벽길을 80km 이상 달려가야 했다. 이곳은 카트만두로 가는 유일한 물자운송로인 까닭에 대형트럭이 즐비하게 줄을 지어 오르고 있었다.

  중간 휴게소에서 내려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휴게소라고 해야 차량 몇 대 정차 가능한 공간과 상점에서 차를 파는 곳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네팔의 전통차인 ‘짜이’를 마셨다. 홍차에 우유와 생강차를 탄 것인데 맛이 은은하고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네팔 사람들은 매일같이 마시는 차라고 한다. 소박하지만 절묘한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도로의 옆에는 민가가 드문드문 이어져 농사를 짓고 있었고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도 보였다. 도중에 통행료를 받는 톨게이트가 있었는데 판잣집과 같은 소박한 형태로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 흡사 우리나라 1960 ⋅ 70년대 시골 모습과도 같았다.

  끝없는 내리막길을 6시간 이상 달려 포카라에 도착했다. 포카라는 네팔 제2의 도시이자 유명한 휴양도시다. 카트만두가 네팔의 문화적 중추라면 포카라는 네팔 트레킹(trekking)의 도시이자 여행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먼저 들른 곳은 티베트의 난민촌이었다. 카펫을 만드는 공장에 들러 수공예로 한 올 한 올 카펫을 만드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티베트 난민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종교적 믿음을 지키며 의연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1961년 스위스 여인 데비가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사망한 이후, 데비 폭포(Devi’s Fall)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뻬딸레 창고(Patale Chango)에 들렀다. 이 폭포는 다른 폭포와는 달리, 땅속으로 물이 꺼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질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침식에 의해 형성된 특이한 지형이라 한다.

  다음으로 폭포 근처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페와호수에 도착하여 조각배를 탔다. 호수의 길이는 13km에 이르고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 흐른 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한 배에 4명씩 승선하여 호수 안에 있는 탈 바라히(Tal barahi)섬을 돌아나왔다. 석양은 보지 못했지만, 호수의 물은 무척 깨끗하였고 경치 또한 매우 아름다웠다. 일행 중 앞선 배에 탄 정교수가 멋들어지게 부른 뱃노래 소리가 어둑한 호수에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다음 날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히말라야산맥 중 안나푸르나(Annapurna: 8,091m)를 보기 위해 전망대로 유명한 사랑코트(sarangkot: 1,592m)로 출발하였다. 세계에 8,000m 이상의 높은 봉이 14개 있는데 그중 8개가 네팔에 있다. 전망대 아래 내려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사랑코트로 걸어갔다. 이른 새벽인데도 벌써 많은 인파가 모여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출에 따라 서편에 있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993m)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주 조금씩 일출이 진행되는 데 따라 장막이 걷히듯 그 위용을 드러내는 산의 모습은 마치 연극무대의 조명장치를 조작해 놓은 듯 자연이 꾸민 경이로운 연출이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이곳으로 모이는데 이날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안나푸르나는 히말라야 14좌를 등정한 산악인 엄홍길씨로 인해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졌다. 그는 어느 방송국 인터뷰에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정상을 잠시 빌리는 것이다. … 산이 나를 허락해주었기 때문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지 산이 나를 거부하면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절대로 올라갈 수 없다. 산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네팔 사람들은 히말라야(Himalaya)에 시바신이 거처한다고 믿어 히말라야를 신성시 여긴다.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강물은 시바신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온다고 믿으며 이 강물은 인도의 갠지스 강까지 내려간다. 힌두교인들은 강물까지 성스럽게 여긴다. ‘히말라야’라는 말은 고대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居處)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로 ‘눈의 거처’, 즉 ‘만년설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히말라야산맥 중 안나푸르나는 ‘곡식의 봉우리’란 뜻이며 ‘풍요의 여신’으로 불린다. 안나푸르나의 봉우리 중 가장 높아 보이는 마차푸차레는 ‘생선의 꼬리’라는 의미로 마치 손을 모아 합장을 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사실은 낮은 봉우리지만 가까이 있어 가장 높아 보인다. 사랑코트에서 걸어 내려오며 길가의 풀과 나무를 보니 고사리와 도토리나무 등 우리나라에서 자주 보던 식물들이 있어 친근하게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로 출발하였다. 버스를 타고 6시간 동안 달려가면서 가이드로부터 네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네팔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힌두교에서 소는 ‘부(富)의 여신’이자 ‘대지의 어머니’인 락슈미(Laksmi)의 화신으로 신성시 한다. 도로에 소가 누워 길을 막고 있으면 경적을 울리지 않고 소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 만약 소를 차로 치거나 죽이면 최대 20년을 감옥살이해야 한다. 소 외에 돼지고기, 개고기도 먹지 않는다. 길거리에 주인 없는 개가 항상 다니지만 사람들을 전혀 개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네팔 사람들은 주로 닭고기나 양고기를 즐겨 먹는다. 네팔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식사를 하루 두 끼 하는 것이 보통이다. 늦은 오전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는다. 주식으로는 길쭉한 안남미(米)를 먹으며 그 외에 짜이를 매일 마신다. 그리고 집안에 애기가 태어나면 브라만 계급의 사제가 와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자를 만들어 준다. 몸이 아플 때나 안 좋은 일이나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사제에게 이 책을 가지고 가서 물으면 처방을 알려준다. 네팔에는 집집마다 화장실이 없고 마을 전체 공동구역에서 대소변을 본다. 현재 도시가 생기면서 점점 변하고 있다고 한다. 힌두교인들이 매일같이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이마에 붉은 색 안료인 ‘티카(tika)’를 찍어주며 신의 가호와 축복을 빌어주는 일이다. 신상에 묻혀 기도를 하기도 하고 결혼을 한 여성은 이마에서 머리까지 티카를 묻혀 기혼자임을 표시한다. 룸비니로 가는 동안 문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면서 창밖을 바라보니 끝없이 펼쳐지는 유채꽃이 정겨워 보였다.

  오랜 시간을 달려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룸비니 동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마야데비사원과 구룡못 그리고 아쇼카석주가 있었다. 마야데비사원은 아기 부처님께서 탄생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시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신 곳이다. 이곳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고, 현재 내부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사진촬영을 일체 금하고 있었다. 아기 부처님의 발자국이 찍힌 곳은 유리로 덮어 놓은 채 현재 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발자국을 보니 갓난아기의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보였다.

  사원 뒤편에는 마야부인께서 부처님을 낳으시고 목욕을 했다는 구룡못이 있다. 중국 당나라의 고승으로 유명한 현장(玄⋅)이 남긴 인도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이곳에는 샤카족들이 목욕하던 연못이 있다. 물이 맑아 거울과 같은데, 갖가지 꽃이 다투어 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연못의 물이 흐리고 꽃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연못가에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큰 보리수나무가 구룡못을 지키고 있다.

  마야데비사원 서편으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대왕이 세운 석주(石柱)가 있다. 석주에는 다섯 줄로 된 아쇼카왕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쇼카왕은 왕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여기가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한다. 위대한 분의 탄생지임을 기려 이 지역의 조세를 면제하고 생산물의 1/8만 징수케 한다.”고 새겨져 있다. 석가모니 탄생 이후 수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찾아왔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인도의 아쇼카왕은 이곳에 석가모니를 찬미하는 돌기둥을 세웠다. 이 돌기둥은 1896년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석가모니 탄생지임을 증명하고 있다. 저녁 무렵 룸비니동산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주변 야산에서 들려오는 여우 소리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야 했다.

  룸비니동산을 다녀온 후 내일의 인도지역 답사를 위해 네팔과 인도의 국경선 부근에 숙소를 잡았다. 이곳에서 네팔 현지 가이드인 옆집 아저씨 같은 길안씨와 헤어질 때 “나마스떼.”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번 답사에서 네팔은 신과 인간이 하나 되어 공존하는 세계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져 인간의 순수성을 간직한 나라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01 산스크리트어로 “내 안에 있는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경배합니다.” 라는 뜻이다.

02 네팔의 카스트 계급에서 인도의 크샤트리아의 동일한 왕정계급을 말한다.

03 돌, 벽돌, 나무를 이용하여 쌓아올린 집 모양의 건축물로 부처나 고승의 사리, 유품 등을 안치하는 곳이다.

04 고대 인도에서 생겨나 발달한 문자.

05 불교에서 사용되는 주문 가운데 하나로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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