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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코너 : 중국의 역사서 『춘추(春秋)』에 대하여
중국의 역사서 『춘추(春秋)』에 대하여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밝혀 천하의 질서를 세우려 하다
자양57 방면 교정 최정락
춘추의 표현은 은미(隱微)하면서도 뚜렷이 드러나고 기록하되 흐릿하게 감추고 완곡하면서도 문채를 이루고 곡진(曲盡)하면서도 비루하지 않고 악을 징계하면서 선을 권장하니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그것을 수사(修史: 역사를 엮음)할 수 있겠는가? (『좌전』 「성공」 14년)
1.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의 효시(嚆矢)
『춘추』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은공(隱公) 원년(元年: 周平王 49년, 기원전 722)부터 애공(哀公) 14년(周敬王 39년, 기원전 481)까지 제후국인 노나라 12공(公) 242년간의 역사01를 기록한 책이다. 기원전 5세기 초에 공자(孔子, 기원전 552~479)가 노나라에 전해지던 사관(史官)의 기록을 직접 편수(編修)02하였다.
2. 현대에 전해지는 『춘추』 삼전(三傳)
한대(漢代)에 들어와 유가(儒家)의 기본적인 책을 경(經)06이라 하여 존중함에 있어, 『춘추』는 그 하나가 되어 시(詩)·서(書)·역(易)·예기(禮記) 등과 오경(五經)에 들었다. 그런데 『춘추』의 글은 극히 간결해서, 『춘추』의 경문(經文)이 과연 어떠한 뜻을 지니고 있는가를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쉽게 해석하고 또 경문에는 없으나, 후세에 알릴 일을 첨가해서 집필한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을 『춘추』의 전(傳)이라 한다.
『춘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춘추』가 저작된 시대상황적 배경을 이해하여야 한다. 『춘추』에 기술되어진 기간을 중국 역사상 춘추시대라 한다.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동천(東遷)한 시기10, 즉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76년까지를 말한다. 이때는 하·은·주를 통틀어 정치와 도덕이 가장 문란한 시기였다.
4.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위해 『춘추』를 지은 공자
『춘추』는 주대 노나라를 중심으로 기술된 편년체 사서이다. 그런데 공자가 윤리적 입장에서 필삭(筆削)하여 정사선악(正邪善惡)의 가치판단을 한 책으로 어느 경전보다 권선징악적 기술이 많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찌하여 『춘추』를 지었는가?
세상에 올바른 정치가 쇠퇴하고 어진 도가 희미해져, 옳지 못한 설(說)과 모진 행동이 제창되고 행해지니, 신하로서 그의 군주를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그의 부친을 죽이는 자가 있자, 공자께서는 그 사태를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시었다. 춘추에서 권선징악한 일은, 원래 천자(天子)가 행할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선(善)을 권장하고 악을 응징(膺懲)한 사람이라고 알아주는 자는, 내가 지은 춘추를 가지고 그렇게 알아줄 것일 게다. 그리고 하찮은 사람이면서 분수를 넘어 천자가 하는 일을 함부로 했다고 책망하는 자도 내가 지은 춘추를 가지고 그럴 것이다.13
위의 글에서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하고 역사에 기록된 구체적 사례를 통해 후세 사람들이 시비선악(是非善惡)의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춘추』를 짓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을 밝혀 난세를 구하고자 공자는 난신적자(亂臣賊子)에게 필주(筆誅)14를 가한 것이다. 그 결과 맹자는 “공자께서 『춘추』를 완성하시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15고 평하였다.
참고자료 . 『대순지침』.
01 오늘날 전해져 있는 『춘추』는 노나라 은공 원년에서, 애공 14년까지, 은공(隱公)·환공(桓公)·장공(莊公)·민공(閔公)·희공(僖公)·문공(文公)·선공(宣公)·성공(成公)·양공(襄公)·소공(昭公)· 정공(定公)·애공(哀公) 등 12공 242년간의 노나라 역사 및 노나라와 관계가 있는 여러 나라의 사건을 간결하게 기재하고 있다. 02 공자가 편수하기 이전에 이미 노나라에는 『춘추』라고 불리는 사관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맹자』에는 춘추시대의 열국(列國)들이 각각 사관을 두어 사적(事跡)을 정리했는데, 진(晉)에는 ‘승(乘)’, 초(楚)에는 , 노에는 ‘춘추’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노에 전해지던 기록을 공자가 스스로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새롭게 편수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오늘날의 『춘추』이다. 유학에서 오경(五經)의 하나로 여겨지며, 동주(東周)시대의 전반기를 춘추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이 책의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03 두예(杜預, 222~284)는 중국 진대(晉代)의 학자이면서 정치가. 진주자사(秦州刺史)·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저서 『춘추좌씨경전집해』는 춘추학으로서의 좌씨학을 집대성하였고 『좌씨전』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았다. 04 편년체는 연월(年月)에 따라 기술하는 역사편찬의 한 체재이다. 중국의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이 이런 체재의 원초형태라고 한다. 그러나 기전체형식(紀傳體形式)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이러한 기술방식을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은 후한대(後漢代)의 순열(荀悅) 편저의 『한기(漢紀)』에서부터이다. 그 후 역대로 단대사적 편년(斷代史的編年)의 역사서가 작성되어 왔으나,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에 이르러 비로소 통사(通史)로서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이 편찬되었다. 이를 계승하여 이도(李燾)의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등의 우수한 편년체의 사서 편찬이 계속되었고, 연월에 따르기 때문에 생기게 되는 기사의 분단(分斷)을 보충하기 위한 방식으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형식의 사서도 편찬되었다. 05 정태현 역주, 『역주 춘추좌씨전 1』, 전통문화연구회, 2010, p.7. 06 송대(宋代)에 확정된 경서를 십삼경(十三經)이라 한다. 십삼경(十三經)은 『역경(易經: 周易)』, 『서경(書經: 尙書)』, 『시경(詩經: 毛詩)』, 『주례(周禮)』, 『예기(禮記)』, 『의례(儀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논어(論語)』, 『효경(孝經)』, 『이아(爾雅)』, 『맹자(孟子)』 등이다. 한대(漢代)에 중시된 『시경』, 『서경』, 『예기』, 『역경』, 『춘추』를 오경이라 한다. 07 『한서(漢書)』는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로 전한의 역사를 반고가 편찬하였다. 다루는 시대는 한 고조 유방이 전한을 창건한 기원전 206년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24년까지이다. 총 100편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08 문선규 역저, 『신완역 춘추좌씨전 (上)』, 명문당, 2009, p.15. 09 중국 후한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시종 재야 학자로 지냈다.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10 중국 주나라가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한 후 각 지방의 제후들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진의 시황제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각 제후국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혼란의 시기였다. 11 이춘식, 『중국 고대사의 전개』, 서울: 도서출판 신서원, 1986, p.101. 12 강춘화, 「孔子의 仁學」, 『인문사회과학연구』제2집, 호남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95, p.18. 13 『맹자』 「등문공 하」, “世衰道微, 邪說暴行有作, 臣弑其君者有之, 子弑其父者有之. 孔子懼, 作春秋. 春秋, 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 14 허물이나 죄를 글로 써서 꾸짖음을 말한다. 15 『맹자』 「등문공 하」, “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것은 71세에서 73세 무렵이므로 『춘추』는 육경(六經) 중에서 제일 나중에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16 남상호, 「공자와 춘추」, 『공자학』 제7호, 한국공자학회, 2000, p.195 참조. 17 장자(莊子, 기원전 369~289년경)는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도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이는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며[無爲],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自然]고 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18 『장자』 「제물론」, “春秋經世, 先王之志.” 19 사마천(司馬遷, 145년경~86년경)은 전한시대의 역사가이며 『사기』의 저자이다. 무제의 태사령이 되어 사기를 집필하였고 기원전 91년 『사기』를 완성하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20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0년경~120년경)는 중국 전한 때의 유학자이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크게 인재를 구하므로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았다. 전한의 새로운 문교정책에 참여했다.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게 되고 국가 문교의 중심이 유가에 통일된 것은 그의 영향이 크다. 21 『사기』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이 동중서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孔子知言之不用, 道之不行也, 是非二百四十二年之中, 以爲天下儀表, 貶天子, 退諸侯, 討大夫, 以達王事而已矣.” 22 오석원, 「유교의 역사의식」, 『한국 도학파의 의리사상』, 유교문화연구소, 2005, pp.64∼85. 23 『대순지침』, p.70. “先誠吾心, 以誠他心, 先敬吾身, 以敬他身, 先信吾事, 以信他事” 24 『대순지침』,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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