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0년(2010) 8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47) 청계탑 『典經』속 역사인물 인물소개 대원종 금강산 이야기 『典經』용어 28수 별자리 함께하는 공간 그림 이야기 답사기 수기 독자코너 대학생코너 다시보는 우리문화 특별기획 과학 그곳에서 알립니다

금강산 이야기 :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詩)와 일화[上]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詩)와 일화[上]

 

 

글 교무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성심(性深)이며, 호는 난고(蘭皐)라 한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일생 동안 삿갓을 쓰고 방랑하였다 하여 이름보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자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대대로 벼슬을 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병연이 6살 되던 해에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큰 화(禍)를 입었다. 이때 어린 병연은 노복의 도움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한동안 숨어 살았다. 후에 멸족에서 폐족(廢族)01으로 감형되어 형제는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살았다. 모친은 남편이 화병으로 죽고 세인의 괄시와 천대가 심하자 강원도 영월로 옮겨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지냈다. 이런 내막을 모르고 성장한 김병연은 스무 살이 되던 무렵 강원도 영월 향시(鄕試)에 응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그는 홍경래의 난 때 투항했던 김익순을 비판하는 시제(詩題)로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후에 그는 모친으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재능은 있었으나 꽃피울 수 없는 불우한 처지에 놓였던 김병연은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놓아 둔 채 집을 뛰쳐나와 방랑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자책하며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쓰고 죽장을 벗 삼아 다녔으므로 ‘김삿갓’ 또는 ‘김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주로 각지의 서당을 순방하며 떠돌다가, 4년 뒤인 24세 때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머물며 둘째 아들 익균(翼均)을 얻었다. 그리고 또다시 고향을 떠나 한양, 충청도 및 경상도 등지로 방랑의 길에 오른 뒤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차남 익균이 몇 번 그를 찾아갔으나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때때로 훈장 노릇도 하며 떠돌던 그는 57세를 일기로 전라도 동복(同福: 전남 화순)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그로부터 2년 후 익균이 유해를 옮겨 와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삿갓은 한 조각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일생을 방랑하며 시를 읊은 불우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지붕 삼고 술을 벗 삼아 조선팔도를 떠돌며 파격적인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래서 그가 남긴 즉흥시에는 권위적인 양반과 부패한 당대의 권력자들을 풍자하고 조롱한 것들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민중시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런 그도 생전에 천하명산 금강산을 이웃집 다니듯 하면서 그 절승경개를 기발하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시를 많이 지었다.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다니다 거들먹거리는 양반과 굶주리고 헐벗은 농민들의 참상을 보면서 울분과 연민의 정으로 괴로워하다가도 금강산에 들어가면 만 가지 시름을 잊고 그 아름다움을 자유분방하게 노래한 김삿갓이었다.

 

 

정처없이 떠도는 이 몸 또다시 가을을 맞아

벗들과 짝을 지어 약속한 절간 누각에 모였노라.

작은 골짜기에 많은 사람들 오니 그 그림자로 시냇물 가리고

옛 절엔 중이 없고 흰 구름만 떠돌고 있네.

 

 

잠간 동안 금강산에 올라 삼생의 소원 풀었으니

마음껏 마시는 술 만가지 시름 모두 잊네.

내 이제 그윽한 회포를 읊어 감잎에 적어 놓고

누운 채 서원의 빗소리 들으니 회포 더욱더 그윽하네.

 

 

  이것은 그가 팔도(八道)를 유람하며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금강산을 다시 찾은 기쁨을 노래한 ‘강호랑적(江湖浪跡)’이란 시이다. 그리고 어느 날 외금강의 구룡연 계곡으로 들어서던 김삿갓은 그 절묘한 경치에 그만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바로 시 한 수를 읊었다.

 

 

검푸른 산길 따라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정자가 시인의 지팡이를 머물게 하네.

용의 조화는 눈 내리는 듯한 폭포를 만들었고

칼의 정신은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를 깎았도다.

 

 

고고한 학의 흰털은 수천 년을 묵은 것이며

냇가의 나무는 300장(丈)이 넘는 큰 소나무일세.

절간의 스님은 봄에 취한 내 마음 알 길 없어

무심히 한낮에 종을 쳐 놀라게 하네.

 

 

  금강산의 명승지를 다 돌아보고 난 후에, 김삿갓은 어느 한 누각에 올라 이 세상의 절승경개를 다 모아놓은 듯 장엄하게 솟아 빛나는 금강산의 모습을 ‘만이천봉(萬二千峰)’이라는 시에 담았다.

 

 

금강산 만이천봉 두루두루 유람하고

봄바람 불어올 제 나 홀로 중루에 올랐노라.

거울과 같이 둥근 일월이 내리 비치니

이곳서 보는 아득한 천지 작은 조각배 같구나.

 

 

동쪽으로 굽어보니 넓은 바다 삼도(三島)가 가깝고

북으로 바라보니 높은 고원에 육봉(六峰: 6개의 높은 산)이 떠 있구나.

알지 못하였도다! 천지 우주가 어느 해 열려

태고적 산세가 저렇게 늙어 흰머리 된 것을.

 

 

  김삿갓은 이 외에도 금강산의 장쾌한 모습과 수려한 풍치를 노래한 많은 시를 지었다. 하지만 일정한 거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신세인지라 제대로 기록된 것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떠오르는 시흥에 못 이겨 즉석에서 읊고 바람결에 날려 보내거나, 나뭇잎과 나무껍질 같은 데 적어 흐르는 물 위에 떠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들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의 재치 있고 기발한 금강산 시들을 통해서 이 강토의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소리 높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그는 금강산에서 주옥 같은 시와 함께 일화들도 적지 않게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01 조상이 큰 죄를 짓고 죽어 그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됨. 또는 그런 족속.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