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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2년(2012)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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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70) : 소중화가 대중화로 되리라

소중화가 대중화로 되리라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8[戊申]년 10월, 상제님께서는 백암리 바로 앞에 있는 태남리(泰南里) 덕두(德斗)마을로 자리를 옮기셨다. 이곳에는 최덕겸(崔德兼, 1883∼1951)이 살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최덕겸과 신원일(辛元一, 1867∼1916)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고 이르시니, 두 사람은 성심성의를 다하여 명을 받들었다. 이들은 방에 들어간 지 7일째가 되자 상제님 앞에 불려갔다. 먼저 신원일이 상제님께 “청국(淸國)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列國)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반수기앙(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었다.

  여기에서 ‘天與不取反受其殃’이란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입는다’는 뜻으로, 『통감』 「한기(漢記)」에 나오는 말이다. 약 2,200년 전, 항우와 유방이 중국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한창 싸우고 있던 시절에, 유방의 부하인 한신(韓信)은 유방을 능가하는 군사력과 인망을 지니고 있어서 얼마든지 유방의 슬하에서 독립하여 따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한신의 참모인 괴철(蒯徹)은 유방의 인물됨이 어려움은 같이 나눌 수 있어도 행복은 같이 나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훗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그와 같이 고생을 했던 공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괴철은 한신에게 유방으로부터 독립하여 항우, 유방과 더불어 중국 천하를 나누어 가질 것을 권유하였다. ‘천여불취 반수기앙’은 그때 괴철이 한신에게 한 말이다. “天與弗取反受其咎時至不行反受其殃願足下熱慮之.(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허물을 받는다고 하였으며, 때가 이르러도 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족하께서는 잘 생각하소서)” 그러나 한신은 자신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주고 더구나 입은 옷을 벗어 자신에게 주며[脫衣衣之] 먹을 밥마저 물려주는[推食食之] 은혜를 베풀었던 유방을 차마 저버리지 못해 괴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괴철은 한신의 곁을 떠났고, 초한(楚漢) 전쟁이 유방의 승리로 돌아간 뒤 괴철의 예상대로 한신은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토끼를 잡고나면 더 이상 사냥개는 쓸모가 없으니 잡아먹어버린다는 유명한 고사성어인 토사구팽(兎死狗烹)은 바로 이때 나온 말이다. 상제님께서는 이 역사에 대해 “한신은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퇴사식지(推食食之)와 탈의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린 것이니라.”고 평가하신 바가 있다.01

  신원일이 상제님께 아뢰었던 당시의 청국은 내부적으로 부패하여 정치가 크게 흔들리며 서양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받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어서 지금 당장 망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경이었다. 예전에 부안의 산에서 나름 수도를 해본 적도 있었고, 세상과 인간사에 대해 깊은 고민을 많이 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던 신원일은 이런 청국의 사정을 고려하여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시는 상제님께 중국의 천자가 되시라고 자신 있게 말씀을 올렸다. 하지만 뭇 신명들의 하소연에 따라 이 땅에 강세하신 상제님의 목적은 상생의 도로써 세상을 개벽시켜 신명과 창생, 전 우주를 건지시는 것이지, 중국이라는 ‘작은’ 지역의 군주가 되는 것이 아니셨다. 신원일의 이 말에서 당시 종도들이 상제님을 따르며 공사를 받들었지만 정작 상제님께서 온 우주를 총할(總轄)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몰랐다는 사실을 또다시 읽어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신원일의 말을 듣고만 계실 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던 최덕겸에게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셨다. 상제님의 질문에 최덕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실 그는 지금껏 농사만 짓고 살아온 평범한 26세의 청년이었기에, 배운 것도 없고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7일을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의 부족한 재주로는 중국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아무런 답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학식도 없고, 세상에 대한 경륜 등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던 그였지만(최덕겸은 42세의 신원일에 비해 16세나 어렸다), 갑자기 그 순간에 생각이 떠오르고 말도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술술 나왔다.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 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그의 말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무릎을 치시며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고 칭찬하셨다.

  신원일은 상제님께서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었다. 이를 아신 상제께서는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함으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고 깨우쳐 주셨다.

  중국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는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천하를 차지했다. 따라서 한족의 만주족에 대한 원한은 컸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고 지속되어 왔으니, 1854년에 비밀결사조직인 천지회(天地會)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목표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 홍수전(洪秀全)이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을 일으킬 때 반청혁명(反淸革命)임을 선전함으로써 세력을 급작스럽게 크게 키울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상제님께서 한족이 이제 국토를 회복하는 해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은,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한족의 해원이 국토 회복이라고만 말씀하셨다. 중국은 우리나라로부터 오랫동안 조공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에 대한 보은(報恩)의 결과로 영원한 복록을 받는 것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7세기 이후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 체제에 묶여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 조공을 경제 무역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조공이라는 게 힘없는 약소국과 큰 나라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조공품으로 열을 갖다 주면 그 답례로 중국 황제는 겨우 하나만을 줄 뿐이었다.02 중국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나라로부터 꾸역꾸역 조공을 받아먹었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인지 상제님께서는 이제 중국으로부터 보은신이 한국으로 와서 영원한 복록을 준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소중화가 대중화가 된다’는 것이다.

 

 

 

  원래 대중화란 중국문화를 의미했고, 소중화란 우리 민족의 문화가 중국문화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우리 스스로를 높여서 부르던 말이었다. 즉 17세기에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멸망 당하자, 이제 중국 대륙에서 중화문명은 사라졌으며 오직 우리나라만이 유일한 그 화(華)의 문명을 이었다는 의미로 우리 스스로를 소중화라고 한 것이었다. 소중화 의식은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끊임없는 사대로서 명나라에 의존하려는 초라한 자의식(自意識)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는 반면에, 청나라와의 병자호란에서 패배하여 굴욕을 당했음에도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게 해 주었으며 조선 후기 조선왕조를 재건하는 사상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어쨌든 소중화는 중국에 버금간다는 의미였는데, 중국 대신 우리(소중화)가 대중화로 된다고 하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중국을 뛰어넘는 위대한 문화와 문명의 창조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상제님의 공사이며 가르치심이었다.

 

 


01 교법 2장 49절.

02 조선시대에도 우리나라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중국에서 온 한 무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당시 한국의 모든 관아 1년 총비용의 1/6에 육박했다는 점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불공평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용화, 「조선의 조공체제 인식과 활용」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7-2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6),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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