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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2. 외금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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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신계사(神溪寺)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6년(519)에 보운조사(普雲祖師)가 창건한 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이 653년에 중건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계천 부근에 연어를 비롯한 물고기 떼들이 많아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신계사로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살생을 금하는 사찰의 분위기가 흐려지고 고기냄새가 경내(境內)에까지 스며들자, 보운조사가 동해 용왕에게 청하여 물고기들의 출입을 신계천 하류로 제한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다른 계곡에는 매우 높은 폭포가 자리하고 있음에도 물이 줄어드는 최상류까지 연어 등이 올라 왔지만, 이 계곡에는 거의 바다까지 계곡물이 이르러도 고기떼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한 신이(神異)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본래 ‘신계사(新溪寺)’로 창건되었던 절의 명칭을 ‘신계사(神溪寺)’로 바꿨다고 한다.

또한 예로부터 신계사는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는 명찰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였던 1911년 큰 화재가 발생한 이후 쇠락해져서 유점사의 말사(末寺)로 전락했다가, 광복 후에는 외금강박물관으로 변경되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때 전소되어 절터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남북한 불교계에서 신계사에 대한 발굴과 복원을 공동으로 추진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일부 건물들이 다시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1)

대웅전 마당의 3층 석탑은 정양사, 장연사 터 3층 석탑과 함께 금강산에 남아 있는 ‘3고탑(古塔)’으로 불리는데, 상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를 얹은 일반형 석탑이다. 현재 상륜부가 없고 기단부도 일부 손상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도 경쾌하여 탑의 건축미를 잘 나타낸 수작(秀作)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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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굴 결과에 의하면 조선 말기 신계사에는 대웅전과 만세루(절의 누각)를 중심으로 모두 15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만해도 대웅전을 비롯한 전(殿)이 여섯 채, 각(閣)이 다섯 채, 만세루 등이 있었으나, 최근까지는 대웅전 마당에 자리 잡았던 3층 석탑과 만세루를 떠받치던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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