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 Home
대원종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진주강씨 문중(門中) 탐구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진주 강씨 문중(門中) 탐구 上

  지금으로부터 135년 전, 천상의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 계시던 상제님께서 비겁(否劫)에 쌓인 신명과 재겁(災劫)에 빠진 세계 창생을 건지시기 위하여 인세(人世)에 강림(降臨)하셨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그때 상제님께서 잠시 인간의 몸[人身]을 의탁하신 곳은 전라도 고부의 한 양반 가문인 진주 강씨 집안이었다.

강성(姜姓)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 215~282)이 서술한 『제왕세기(帝王世紀)』에 따르면, 강씨는 염제신농씨가 그 시조이며 인류 최초의 성(姓)인 태호복희씨의 풍성(風姓) 다음으로 출현한 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성으로는 풍(風)성이 먼저 있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다만 풍채(風采)·풍신(風身)·풍골(風骨) 등으로 몸의 생김새의 칭호만으로 남아올 뿐이오. 그 다음은 강(姜)성이 나왔으니 곧 성의 원시(元始)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반본이 되므로 강(姜)성이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행록 4-17)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풍성은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은 강성이 되며 개벽시대에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원시반본(元始反本)의 이치에 의해 상제님께서는 인세(人世)에 오실 때 강씨가(姜氏家)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


강씨의 시조, 염제신농씨

 

  강씨의 시조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는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성군(聖君)들인 삼황(三皇: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헌원씨) 중 한 분이다.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에는 신농씨가 약 5000여 년 전인 서기전 3218년 4월 16일에 천수(天水: 지금의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날은 중국에서 ‘신농선제만세일(神農先帝萬歲日)’이라 하여 신농씨에게 제사지내는 날이기도 하다. 신농씨는 강수(姜水: 지금의 섬서성 기산현)로 옮겨와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이로부터 ‘강(姜)’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신농씨는 태호복희씨가 창안한 팔괘(八卦)를 이용하여 육십사효(六十四爻)의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현금(五鉉琴)을 만들어 음악을 일으키고 저자(시장)를 통해 백성들이 교역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발명함으로써 농경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또한 각종 풀들의 약성(藥性)을 밝혀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농업과 의약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1) 염제신농씨는 약초를 찾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보았는데, 전설에 따르면 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맛보다가 중독되어 손도 쓰지 못한 채 장이 끊어져 죽었다고 한다.2)

  이처럼 인류 역사에 많은 치적을 남긴 신농씨는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희생(自己犧牲)’을 몸소 실천한 성군이었다. 

  그로부터 약 900년 정도가 지나면 요순시대이다. 이 무렵 염제신농씨의 한 자손3)이 사악(四嶽: 임금이 나라 안을 다니며 두루 살피는 일을 보좌하는 벼슬)이 되어 우(禹)의 치산치수(治山治水)를 도와 큰 공을 세움으로써, 여(呂: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서쪽)와 신(申: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 땅에 제후로 봉해졌다. 그 이후로 강씨가(姜氏家)는 크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3100년 전에 강태공은 부국강병의 술법을 내고 신명을 땅에 봉안해


  지금으로부터 3100년 전인 상(商) 왕조 말기에는 강씨가에 한 위인(偉人)이 출현했으니 그는 곧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본명이 ‘강상(姜尙)’이나 옛날 그의 선조가 여(呂) 땅에 제후로 봉해졌으므로 대개 ‘여상(呂尙)’이라고 불린다.

  강태공은 나이 72세 때 위수(渭水: 지금의 섬서성 보계현 번계)에서 낚시를 하다가 제후국인 주(周)나라의 문왕을 만나 그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부국강병의 술법으로4) 주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폭정을 일삼던 천자국 상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365신명(神明)을 땅에 봉안함으로써 신봉어지(神封於地)의 시대를 열었다. 강태공이 신명을 땅에 봉했다는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구전(口傳)을 통한 전설로는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왔고, 명나라 때는 이것을 주제로 한 『봉신연의(封神演義)』5) 라는 소설이 나오기에 이른다. 강태공이 신봉어지(神封於地)한 사실이 현재 전설과 소설로만 전해지고 역사 기록으로 제대로 남겨지지 못한 이유는 역사 기록에 관여했던 주 계층이 유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신명을 땅에 봉한다는 ‘신(神)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치중하는 유학자들의 가치 기준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으므로 기록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큰 업적을 이룬 강태공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인 제(齊)나라를 봉지(封地)로 받아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도 농업·어업·상업을 일으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강태공의 후손들도 대대로 제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그 중에서도 환공(桓公, 기원전 685~643년 재위. 이름은 강소백(姜小白))은 명재상 관중(管仲)과 함께 제나라를 강국(强國)으로 만들어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되기도 하였다.


강씨들의 천수 이주와 강이식의 등장


  그러나 기원전 386년 제나라 강공(康公, 이름은 강대(姜貸)) 때에 이르면 전씨(田氏)들에 의해 나라를 찬탈 당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강씨들은 전씨들로부터의 화를 피하여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중국의 동쪽인 산동을 떠나 방랑하던 강씨들 중 일부는 유방이 한(漢)나라를 건국할 즈음인 기원전 2세기 무렵, 중국의 서쪽인 천수(天水)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천수는 염제신농씨가 태어난 곳이다. 이로부터 약 700여 년이 더 지나면 이곳 천수에서 강이식(姜以式)이라는 분이 나타나게 된다. 그는 양견(楊堅: 수 문제)을 도와 당시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통일하고 수(隋)나라를 건국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사실은 812년에 당나라의 임보(林寶)가 지은 『원화성찬(元和姓纂)』의 ‘生太公封齊爲田和所滅子孫分散… 因天水上   縣漢初以豪族徙關中遂居天水(강태공은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고, 전화(田和)에 의해 제위를 찬탈 당하자 그 자손들은 흩어졌다.

  자손들은 천수(天水)의 규현(   縣)에 몸을 의지하였다가 한나라 초기에 호족으로서 관중으로 이주하였으나 결국은 천수에 정착하였다)’라는 기록과 강익문(姜翼文, 1568~1648)6) 의 문집인 『당암집(戇庵集)』7) 에 ‘公天水縣人其先本山東豪族系出齊康公漢太祖時移于天水縣(공(강이식)은 천수현 사람이다. 그 조상은 본래 산동의 호족이었는데 제나라 강공의 후예였으며 한나라 유방 때 천수현으로 옮겨와 살았다)’라는 기록, 그리고 중국 『광동 강씨보(廣東姜氏譜)』의 ‘公佐太祖以定天下後煬帝簒位公以退野(공(강이식)이 태조(수나라 문제)를 도와 중국 천하를 안정시켰으나 (태조의 아들인) 양제가 제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라는 기록을 종합하면 확인할 수 있다.


강이식은 진주 강씨의 시조


  『전경』에 ‘강씨는 상고 신농씨로부터 시작되고…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는 이식이니…’(행록 1-1)라고 하였듯이, 강이식은 수나라 때 우리나라로 건너와 진주 강씨의 시조가 된 분이다.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자료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지은 「대사간 서계공 휘 렬[姜烈, 1400~1465, 조선 문종 때 판중추원사를 지냄] 행록」의 ‘遠祖姜以式爲隋元帥伐高句麗因留東國(첫 조상은 강이식이니 수나라 원수가 되어 고구려를 치고 그대로 머물렀다)’라는 기록이다.

  초계 최씨(草溪 崔氏)의 시조인 최산두는 사인(舍人)8) 벼슬을 지낸 분으로서 문장이 뛰어나 ‘호남의 삼걸’로 알려졌던 분이다. 이 분이 「서계공 행록」을 언제 지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략 그 시기가 1500년대 초기일 것은 확실하다. 「서계공 행록」은 『진주 강씨 대동보(大同譜)』에도 실려 있으며, 현재 전해지는 강이식 관련 문헌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강이식이 수나라 때 우리나라로 귀화하였음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사료라 하겠다.

  또한 예조참의를 지낸 남양희(南梁喜)가 1559년에 찬한 「서계공 묘비문」9) 에도 ‘晉陽姜氏自隋元帥諱以式出留東方世有名德赫赫於羅麗至我(진양(=진주의 옛 이름) 강씨는 수나라 원수 이식이 나타나 동방에 머물면서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대대로 이름나고 덕망이 혁혁한 집안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당암집(戇庵集)』에도 ‘姜氏貫慶尙道晉州郡隋煬帝時元帥公始出東國奠于晉陽(강씨의 본관은 경상도 진주이니, 수나라 양제 때 원수공(강이식)께서 처음 동국에 나오셔서 진양(진주)에 자리를 잡았다)’라고 하여 위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10)

(교무부)

<다음호에 계속>


1) 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 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예시 22)

2) 혹은 지네를 먹었는데 그것이 뱃속에서 많은 벌레로 변하여 결국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고도 한다.

3)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4) 상제님께서는 “강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놓아…”(예시 22)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후세에 용병술과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을 그 주모자로 존숭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5) 『봉신방(封神榜)』 또는 『봉신방연의(封神榜演義)』라고도 불린다. 중국 명나라 때의 장편소설로서 육서성(陸西星) 또는 허중림(許仲琳)의 작품이라고 전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오늘날 『봉신연의』는 『서유기』, 『수호전』, 『삼국지연의』와 더불어 중국의 4대 소설로 꼽히고 있다.

6) 조선 중기의 문인(文人)으로 예조좌랑·정언·헌납·지평 등을 역임하고 문학(文學)·장령·사간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 왕실에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한 정3품 벼슬)에 올랐다.

7) 1848년에 간행되었다고 하나, 현재 규장각에 전하는 당암집은 1908년에 재편집되어 간행된 후필사본이다.

8) 의정부에 둔 정4품관으로 사무를 정리하여 정승의 결재를 받아 육조의 관원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맡아보았다.

9) 이 묘비문은 최산두의 제자이자 강렬의 증손이던 강응규(1507~1576)가 己未년(1559)에 남양희에게 의뢰하여 씌어졌다.

10) 1985년에 완간된 『동아원색대백과사전』에 ‘강이식은 중국인 예부랑(禮部郞) 문성(文星)의 아들이다. 수나라 병마원수로 있을 때 정적의 모함으로 고구려에 귀화하였으며…’라는 내용이 있으나, 이에 대한 원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