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3년(2013) 6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81) 청계탑 대원종 고사 한마디 금강산 이야기 일각문 답사기 대순광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 민간신앙 춘계체육대회 대순청소년 여름캠프 상생의 길 특별기고 대순문예 퀴즈 및 퀴즈 정답자 알립니다

답사기 : 도교절(道敎節) 기념 노자(老子) 성지답사

도교절(道敎節) 기념 노자(老子) 성지답사

 

 

연구원 백경언

 

 

 

  세계도교협회에서 도교절 기념행사와 노자 관련 성지순례에 종단 관계자를 초청하였다. 2006년 세계종교지도자 대회로 대순진리회의 놀라운 면모를 본 대만과 중국의 도교협회가  이번에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필자를 비롯해 4명의 교무부 인원으로 구성된 일행은 지난 3월 20일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2시간 40분 남짓 비행한 우리는 노자의 고향이라는 안후이 성(安徽省) 와양에 있는 합비(合肥)공항에 착륙하였다. 노자는 실존인물이 아닐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던 필자에게 “노자는 역사적 인물이며 고향도 녹읍(鹿邑)이 아닌 와양”이라는 현지인의 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넓은 중국이니 역사 기술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을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안후이 성은 장강 중하류에 위치해 있다. 성(省)의 면적은 13만여km²로 남한 면적(9만 9천여km²) 보다 크다. 인구는 약 6,369만 명이고 성(省)소재지는 합비(合肥)다. 유명한 황산, 구화산, 천주산, 랑아산 등이 모두 안후이 성에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 인정되는 최초의 왕조인 상(商)나라가 이곳의 북부 보저우(亳州) 근처에 수도를 정했었다 한다. 보저우는 박(亳) 땅01이다. 박 땅에서 탕(湯)에게 초빙된 이윤(伊尹)의 이야기를 알고 있던 터라, 허름하게 보이는 이곳이 상나라의 발상지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숙소는 합비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저녁에 만난 이번 순례단은 15~6명으로 다소 단출하였다. 도교협회장은 싱가포르 사람이었고 이번 일정을 주관하고 있었다. 가수 싸이의 말춤을 멋지게 흉내 내는 말레이시아 사람도 합류했다. 도교의 행사임을 실감한 것은 도사(道士)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면서 부터다. 도교의 복장은 까만 군청색으로 도법 자연(道法自然)02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가방과 어우러져 산속 생활을 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자아냈다. 도통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수행한다는 도사들은 오래전부터 보아온 동네 사람 같이 순수하고 친근해 보였다. 저녁 식사는 천정궁(天靜宮) 주지가 자리를 마련하였다.
  다음날 하루를 거의 이동하는 데 시간을 보낸 우리 일행은 22일에 비로소 와양의 천정궁으로 향했다. 길은 포장되지 않아 먼지가 날렸다. 운하로 보이는 강에는 고기를 기르는 양식장이 즐비했고. 천정궁 근처에 다가갈수록 조그만 차량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추위에 상기되어 불그스레하고, 목은 바람이 들어올세라 수건이나 머플러로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먼지바람에 머리칼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이었고 문명을 일궈낸 선조와 달리, 삶에 매몰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후손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 일어났다.

 

 

▲ 천정궁 주변에 들어선 장에 열린 경극

 


  노자 탄생지라는 천정궁에 도착하니 어제 저녁 식사를 대접했던 주지가 화려한 복장으로 도사들을 이끌고 나와 천정궁 문을 열었다. 많은 사람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난 듯 몰려들었는데, 이들에게도 도사들의 복장은 신기해 보이는 듯하다. 경내로 들어서자 집전하는 도사들의 무구(舞具) 소리가 더욱 흥겹게 경내에 울려 퍼졌다. 1시간 반 동안 우리를 위한 법회는 정성스레 계속되었다. 무척이나 자부심이 강해 보였던 천정궁 사람들은 이곳을 국가 3A급 관광 절경구일 뿐만 아니라 노자가 태어난 곳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는 『괄지지(括地志)』03에 “노자의 집에는 아홉 우물이 있다.”라는 사실에 기인한 듯하다. 천정궁 우물에서 발견되는 기와 파편들이 춘추전국시대의 것이며 그 물줄기가 아홉이란 사실이 이곳을 노자의 생가(生家)로 보는 이유란다. 법회가 끝나고 우리는 성(聖)스런 우물에서 길렀다는 물을 선물 받고 천정궁을 나왔다.
  천정궁 밖에는 장(場)이 섰다. 중국의 시골장을 볼 기회다 싶어 오후내내 장을 누볐다.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다양한 장사치들이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었고, 노모를 모시고 온 사람도 눈에 띄었다. 사탕수수, 파인애플, 고구마, 기름에 튀겨낸 먹거리가 주를 이루었다. 시골길을 따라 임시로 선 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성남 모란시장의 열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어린아이들도 가게를 보고 있었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의 많은 아이가 수학(受學)할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든다고 한다.

 

 

▲ 서시묘

 


  23일 우리는 동태청궁에 가기 전에 서시(西施)04의 묘에 들렀다. 서시는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으려고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보낸 여인이다. 오자서(伍子胥)가 부차에게 미녀를 받지 말라 진언하지만, 미녀에 넘어간 부차는 서시를 총애하다 결국 부흥한 월에 패하고 만다. 일설에는 그녀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나라를 망하게 한다 하여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져 죽게 하였다고도 하지만, 오나라가 망한 뒤 범려(范蠡)와 사라졌다고도 전한다. 바로 와양에 그들 둘을 합장한 묘가 있는데 2,500여 년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의 묘가 덩그러니 밭 가운데 남아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했다.
  오후에는 동태청궁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청나라 광서제(光緖帝)가 복원했다고 하는데, 문화혁명의 광풍으로 혁명 당시 주지가 우물 속에 던져 겨우 소실되지 않은 비석이 건물 벽체의 일부가 되어 그 사실을 희미하게 전하고 있었다. 시대를 통해 민중과 더불어 있으면서도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도교가 겪은 상처는 적지 않아 보였다. 동네 어른들이 나와 순례단에게 열과 성을 다해 이곳을 설명하는 모습에서 민중 속의 도교 모습을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 동태청궁

 


  그 다음 본 곳은 윤희(尹喜)의 묘다. 노자가 쇠망해가는 주(周)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던 관문지기다. 이에 응해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다. 도(道)와 덕(德)을 논한 도덕경은 그가 있어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파트 공사현장에 조그마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
  24일은 허난성(河南省) 녹읍으로 출발하였다. 16만km²가 넘는 면적에, 인구 1억이 넘는 대성(大省)이다. 하남(河南)이란 황하(黃河) 이남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우(禹)임금과 치수(治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우가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어 통치했을 당시 그 중심지로서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곳이다. 곧 세계 4대 문명 중 황하문명의 발상지다. 하(夏)나라 때부터 북송(北宋)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20여 개 왕조가 이 지역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니 문화역사적 가치가 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중원의 역사가 고스란히 땅속에 떡시루처럼 묻혀있다는 것이다. 산이 없고 끝없는 평야 지대인 이곳은 황하가 크게 범람할 때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묻히고 말았다 한다. 
  먼저 도착한 곳은 허난성의 보저우였다. 관성제군을 모신 곳이라는 화희루를 먼저 가보았다. 들어가는 마을 입구부터 탕왕(湯王)이 기우제 드리는 모습,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찾아와 예(禮)를 묻는 모습, 노자가 공자에게 술을 대접하는 모습, 화타(華陀)가 5가지 동물모습의 기공체조를 가르치는 모습 등이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어 중국문명의 중심에 와있음을 실감케 하였다. 보저우는 화타가 태어난 인연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한약시장이 열린다 한다. 청(淸) 때 성공한 상인들이 신에게 보은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화희루는 연극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건물의 돌과 나무의 조각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 이곳은 ‘대관제묘’로 불리고 있다. 이는 관우(關羽)를 모신 곳으로 더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보저우 사람들이 이곳 출신인 조조(曹操)보다 관우를 더 숭상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 화희루(대관제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중태청궁이 있었다. 사당에는 가운데에 커다란 태극을, 좌우로는 8선(八仙)을 모셔놓고 있었다. 이곳 역시 당(唐) 태종의 명(命)으로 지어진 곳이라 한다. 태종은 한족(漢族)들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老子)라고 선전하여05 왕조의 성립에 이용하였다. 동태청궁, 중태청궁, 서태청궁이 그러한 사고의 산물이다. 개원의 치(開元之治)를 행했다는 당 현종 역시 도교를 숭상하여 당나라는 도교의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다르게 오늘날의 쇠락함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가끔 찾는 사람들은 굳이 노자가 아니라도 사당을 찾아 복을 비는 그런 류(類)의 사람들로 보였다.

 

 


  25일 드디어 녹읍(鹿邑)의 서태청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눈에 띈다. 와양에서 보았던 노자고리(老子故里)란 이름이다. 노자가 태어난 고향이 하나의 나라에 두 곳이라니… 가이드 말로는 두 지역에서 경쟁하는 중이란다. 최근에는 노자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와양에 비해 이곳 녹읍이 본격적으로 노자의 고향이라고 개발하고 있어, 와양 학자들마저 자신들의 지역에서 못하는 것을 이곳에서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자조적인 위안을 한다고 한다. 가이드가 서태청궁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은 지표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비석이었다. 송(宋)나라 때 비석이라고 설명한다. 땅 아래 있는 이유는 황하가 범람하여 땅속 몇 미터 아래로 묻혔기 때문이라 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송나라 수도 개봉이나 그 앞의 역사가 이 땅속에 고스란히 묻혀 있다는 것이다. 좀 나아가서 이번엔 당나라 시대의 비석을 가리킨다. 모두 지표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 비석은 송나라 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도교를 바라보던 각 시대의 분위기를 비교하며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노자의 탄생처라고 하는 건물에는 노자 탄생 2,584년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갑자년의 8월 15일이면 우물의 정 중앙에 보름달이 들어온다는 망월정(望月井)이 정면에 있고, 당나라 때 심었다는 두 그루의 향나무가 같은 마당에서 좌선(左旋), 우선(右旋)하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했다. 뒤로 연속하여 노자를 모신 삼청궁이 본전으로 있었다. 현재 중국 도교협회장이 썼다는 유도독존(唯道獨尊)이라는 현판은 불교의 유아독존(唯我獨尊)과 비슷해 보였다. 노자의 일대기를 성화(聖畵)로 그려놓은 고거(故居)와 어머니 묘도 볼 수 있어 이곳을 노자의 고향으로 보는 것도 일면 일리가 있어 보였다. 어머니 묘에는 한(漢)나라 때부터 제사를 지냈다 전한다.
  마지막으로 노군대(老君台)에 들렀다. 이곳은 노자의 묘라는 설과 노자가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한 곳이라는 설이 있다. 함곡관을 나와 사라졌다는 전설과 또 다른 점이다. 33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노자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 옆에는 박격포탄이 박혀있었던 나무와 벽면이 있다. 중·일 전쟁 당시 이곳에 일본군이 13발의 포탄을 쏘았는데 모두 터지지 않았다 한다. 노자의 신비한 힘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가이드의 설명이 장황하다.

 

 

▲ 노군대

 


  26일은 도교절 행사가 거행되는 날이다. 행사는 숙소에서 가까운 노군대에서 행해졌다. 노자탄생 2,584년을 기리는 애드벌룬과 현수막으로 길거리가 요란하다. 호텔에서부터 통행이 제한된 도로로 일행은 호위를 받으며 길을 나섰다. 구경나온 사람을 통제하는 공안들이 수백 명이다. 우리에게 베푸는 호의(好意)에 비해 자국민을 너무 통제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음력 2월 15일을 노자탄생일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한 것이 이번이 세 번째란다. 최근 들어 국가차원에서 도교를 적극 후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요란한 축포와 폭죽이 터졌다. 각국에서 온 내빈이 소개되고 노자의 사상이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치가 있으므로 널리 연구되고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축사(祝辭)와 헌화(獻花)로 식(式)은 간단히 끝났다. 진설한 음복을 움켜잡으려고 뛰어드는 관중으로 장내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복을 받겠다는 민중과 도교의식과는 달리 사람들이 자연스레 융합된 모습이었다. 식이 있기 전인 어제의 한산했던 경내는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도교의 신자도 노자를 신봉하는 것도 아닌듯한데 향을 사르고 비는 모습에서 인간의 순수한 신앙심을 보는 것 같았다.

 

▲ 나무에 박힌 포탄과 벽면의 포탄자국

 


  모든 식(式)이 끝나고 노자를 모신 광장으로 나왔다. 돌로 만든 20여 미터가 넘는 노자의 모습, 태극문양으로 바닥을 장식한 거대한 광장, 시대별로 그려진 노자의 전신상(全身像)이 있었다. 무(無)와 허(虛)를 말하던 철학자 노자가 자 신을 신(神)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무거운 몸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노자의 사상이 현대 자본주의와 물질본위의 패러다임을 극복할 대안으로 연구·발표되는 도교절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나라는 작고 백성이 적어야 한다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가르침과, 영토·정치적인 면에서 무리한 확장을 기하는 중국의 모습도 괴리가 있어 보인다. 차창에 비쳐오는 거리의 모습을 보니, 시장(市場)이 서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길거리 장이다. 거기엔 삶에 힘든 노인들과 어린아이들 모습이 가득하다. 자신들의 풍속을 아름답게 여기고, 거처를 편하게 여겨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는 사회를 꿈꾸던 노자의 고향 모습이다. 돌아오는 길에 먼지에 쌓인 허름한 집들과 무심히 버린 쓰레기가 쌓여있는 거리를 보니,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노자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27일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싱가포르 도교협회장은 한국 일행이 도교절 폐막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아쉬움을 표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입은 옷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상을 이해한다는 사실 하나로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아쉬움을 남기며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우리를 위하여 일정을 앞당겨 와양으로 온 그들은 저녁 비행기로 출발할 예정이라며 뒤에 남았다. 도통을 목적으로 수도하는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다른 복장을 하고 궁극적 진리를 향하는 깨끗한 영혼들을 보았다. 모두가 성공하는 시대, 각자 목표하는 만큼은 이루어지리라 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맑은 공기를 그리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01 하(夏)나라 걸(桀)왕이 조금도 회개할 기미가 없어 이윤이 실망하고 있을 때, 술 취한 몇 사람이 “왜 박(亳)으로 가지 않는가? 박은 크기만 한데”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윤은 이 노래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걸을 섬겼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탕(湯)왕이 있는 박으로 향했다..
02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에서 道法自然은 道가 자연을 법 삼는다는 말이다.
03 당대(唐代)의 학자 복왕태(濮王泰) 등이 편찬한 것인데,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를 보면 괄지지는 550권 및 서략(序略) 5권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 산일(散佚)되고 현행본은 청(淸)나라의 손성연(孫星衍)이 여러 책에 인용된 일문(逸文)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이 책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출처: naver 지식백과)
04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명으로 손꼽히며 부차에게 접근하여 오나라가 멸망하게 하였다.
05 노자는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수(隋)나라 장수였던 이연(李淵)의 혈통은 오랫동안 유목세계의 인접지에 살았던 선비족의 피가 많이 섞여있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이를 극복하고 한족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한족이 숭상하는 노자를 자신의 조상이라 내세웠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