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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이야기 : 정읍 대흥리(井邑大興里) 2
정읍 대흥리(井邑大興里) 2
 
 
연구원 박정욱
 
▲ 대흥리 차경석의 집과 보천교 십일전 터
 
 
* 지난 206호의 ‘정읍 대흥리 1편’에서는 대흥리의 지명과 차경석의 집 그리고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집에서 보신 공사에 대해 소개하였다. 2편에서는 왕후장상을 원했던 동학 신명들의 해원 두목으로서 12 제국을 원하며 천자를 꿈꿨던 차경석, 그의 야망심이 대흥리에 어떻게 펼쳐졌는지 살펴보겠다. “수도자가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된다”(『대순지침』, p.53)라는 도전님의 가르침은 상제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다. 참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마음(일심)으로 수도에 진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흥리의 여러 자취를 통해 참된 믿음과 일심 수도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보천교 교단의 창립 과정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1911년 고수부는 상제님 강세 치성을 모신 후 상제님과 흡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등 기이한 능력을 보였다. 이런 고수부의 능력에 상제님을 좇았던 종도들이 차츰 모여들면서 고수부는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자신을 중심으로 한 교단을 창립하고 포교를 하였다.01 당시 교단의 정식 명칭은 없었으나 태을주를 외운다고 해서 훔치교(吽哆敎, 흠치교), 태을교(太乙敎) 등으로 불렸다. 교단 초기 신앙의 대상은 상제님을 옥황상제(玉皇上帝)로 신봉하며, 상제님의 권화(權化: 화신)에 의한 도통과 천지공사에 의한 새로운 세상의 개벽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02 
  그런데 고수부를 보좌하던 차경석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1914년과 1915년에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차경석이 ‘대사상(大思想)과 신통묘술(神通妙術)로 신정부를 건설한다’, ‘멀지 않아 조선을 독립하여 자기가 황제가 된다고 하며, 농촌 우민(愚民)을 유인하여 금전을 사취한다’는 내용으로 경찰에 심문을 받은 사실이다. 물론 차경석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03 1915년 당시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에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신종교를 유사종교(類似宗敎)로 분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차경석의 사건은 이후 교단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차경석의 집에 마련된 교단사무를 보던 총정원(總正院)
 

  병진(1916)년 11월 28일[동지]에는 교단의 간부인 24방주(方主)를 임명하여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고수부를 본인의 승낙과 안내 없이는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교단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런 차경석의 의중을 알았는지 교단에 들어온 상제님의 종도들은 일찍이 차경석과 뜻이 맞지 않아 교단을 떠났고, 고수부 마저도 견디지 못하여 자신을 좇는 사람들과 교단을 이탈하였다.04 이처럼 고수부와 이후 차경석이 세운 교단을 시작으로 이탈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상제님을 신앙하는 여러 교단이 조직되었다. 이를 두고 상제님께서는 “나의 일이 장차 초장봉기(楚將蜂起)05와 같이 각색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되 다시 진법이 나오게 되리라”06고 하신 것이었다.
  고수부의 교단 이탈은 고수부를 따랐던 교인들에게 신앙의 동요를 일으켰고, 차경석에 대한 반감을 갖게 했다. 그리하여 1919년 차경석은 그 해결책으로 종래 태을주 주문을 외우는 단순한 신앙체계에서 『서전(書傳)』의 홍범도해(洪範圖解), 김일부의 정역팔괘(正易八卦), 정감비결(鄭鑑祕訣), 음양설(陰陽說) 등을 활용하여 교리를 보충해 나갔다. 특히 차경석이 갑자(1924)년에 천자로 등극한다는 내용의 정감(鄭鑑)비결이 세간에 퍼지게 되었다.07 당시 기미(1919)년 독립운동이 무위(無爲)로 끝나고, 민중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민중들은 당시 유행했던 정감비결과 연결된 차경석의 천자 등극설에 희망을 품고 보천교에 입교하였다.
  차경석은 일제의 감시로 인해 1917년부터 외지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기미(1919)년 10월 9일 24방주를 60방주08로 다시 개편하고, 교인 수가 급속히 늘어나자, 경신(1920)년 1월 방주(方主) 밑에 다시 육임(六任)을 두었다. 그리고 그해 4월에 6임 밑에 12임을, 12임 밑에 8임을, 8임 밑에 15임을 다시 두니 간부의 수가 55만7천7백 명에 이르렀다.09 한편 경신(1920)년 10월에는 차경석이 도통을 시험해보기 위해 60방주에게 49일 동안 수련공부를 시켰는데 한 사람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본인은 물론 교인들이 실망한 일이 있었다.10 그리고 겨울에는 청송에서 60방주의 교단 조직 내용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는 사건으로 인해 1921년에는 차경석 또한 교단의 교주로서 체포령이 내려졌다.11 
 
▲ 차경석의 집에 마련된 보천교중앙본소 성전
 
 
▲ 본소 성전 신단에 설치된 삼광영(三光影) [출처: 『교전』]
 

  신유(1921)년 9월 24일 마침내 차경석은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대규모의 제단과 풍성한 제수(祭需)를 차려 놓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 이때 9층 제단에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을 그린 병풍을 두르고,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삼태칠성하감지위(三台七星下鑑之位)’ 삼위(三位)를 설(設)한 후 차경석은 3층단 위에서 제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축문을 통해 국호(國號)를 ‘시(時)’,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 선포하고, 교주(敎主)의 자리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12
  일제는 신장된 교세를 의식했는지 신유(1921)년 가을 보천교 교인 검거 열풍에 의해 얼마 동안 체포·구금된 서방주(西方主) 이상호와 주요 간부들에게 교단공개에 대한 회유정책을 폈다.13 그리하여 임술(1922)년 2월 차경석은 이상호를 통해 경성 동대문에 ‘보천교진정원(普天敎眞正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단을 공식적으로 알렸다.14 그러나 조선총독부에 공인을 받았음에도 교단의 단속은 여전하였다. 그리고 임술(1922)년 5월 15일 차경석은 대흥리 자신의 집인 보천교 본소에 성전(聖殿)을 준공하고, 성전 내 신단(神壇)에 천지일월성(天地日月星)을 상징하는 삼광영(三光影)을 봉안하였다.15 이때 신단의 후면 벽에는 천지·일·월·성의 자연현상을 담은 그림을 배치하고, 그 앞 우측에는 천지단(天地壇) 원형 12층탑과 중앙에는 일월단(日月壇) 4각형 9층탑 그리고 좌측에는 성숙단(星宿壇) 12각형 7층탑을 설치하였다.16
 

  1923년에 이르러 차경석은 교단 조직을 본격적으로 개편하고, ‘교헌(敎憲)’을 반포하는 등 각 지방에 진정원을 설치해 나갔다. 당시 교단은 미신단체의 본영이라고 세인의 오해를 받고 있었다. 그 오해를 잠재우기 위해 이상호 등 교단의 혁신파는 《보광》의 발행과 1924년 《시대일보》의 인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세했던 교단의 보수파와 보천교에 대한 비판여론 때문에 그 노력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어 1924년 9월 보천교의 보수파는 혁신운동으로 교단에 소란을 일으킨 혁신파를 축출하고, 친일로 과감하게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고대하였던 차경석의 갑자년 천자등극은 수포로 돌아가고, 단지 갑자(1924)년 12월에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만 조직되었을 뿐이었다. 시국대동단은 1925년 전국을 순회하며 보천교의 교리를 알리고 대동아단결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에 간부를 파견하여 보천교 교리와 시국대동단의 취지를 선전하는 한편, 차경석이 직접 상경하여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시즈오까 다다하루(下岡忠治, 1870~1925)를 만나 협의함으로써 차경석의 체포령은 풀리게 되었다. 그런데 시국대동단이 시즈오까 다다하루의 도움으로 결성되고, 제왕이 되었어야 할 차경석이 그의 명령에 따르는 친일 앞잡이로 드러나게 되자, 보천교는 민중의 무수한 모욕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17 
  갑자(1924)년 《보광》 4호에서 밝힌 보천교의 교인 수가 600만이었다고 하니18 당시 보천교의 위세는 대단했었던 같다. 이는 차경석의 갑자등극에 대한 교인들의 바람이 더 간절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결국 갑자등극이 이루어지지 않자 교인들은 큰 실망을 하게 되었고, 보천교의 교세도 조금씩 약해져 갔다.
 
 
대흥리에 세워진 보천교 중앙교당과 십일전
  갑자(1924)년 차경석의 천자등극이 아무 성과 없이 끝나자 교인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하지만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19란 글귀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아방궁과 동작대와도 같은 곳에서 천자의 꿈을 이루고자 했는지 1925년부터 대흥리 본소 부근에 중앙교당과 십일전(十一殿)20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세간에는 이 공사가 차천자의 대궐신축공사로 얘기되면서 차교주가 천자로 등극하게 되리라는 설로 퍼지게 되었다.21
  무진(1928)년 1월 4일 차경석은 신앙 체계에 대한 변화를 보였다. 그래서 교인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걸어놓고 음양(陰陽) 진퇴(進退) 소장(消長)의 이치와 천지인 배합(配合)의 도(道)를 3일간 설법했다. 또 보천교가 포교 이래로 혹자의 전도(傳道) 오류로 인하여 허령미신설에 치우치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동양도덕(東洋道德)의 정종(正宗)이 되는 원리를 전 세계에 전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22 그리하여 차경석은 상제님을 신앙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유교의 고성(古聖)을 교인들에게 신봉하게 했다.
  기사(1929)년 3월 마침내 십일전을 비롯한 교당이 대흥리 1만여 평의 부지에 40여 개의 웅장한 건물로 완공되었다. 그리하여 성전인 십일전에서 영위(靈位)봉안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이 교인들에게 전해지고, 등극식을 거행한다는 설도 퍼지게 되었다.23 이때 차경석은 옥새24를 만들기 위해 수제자 이(李)씨를 경성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씨가 경부(警部)에 잡혔고, “차천자의 등극은 기사년 기사월(음4월) 기사일(16일) 기사시라” 했다고 한다.25 결국 ‘십일전’에서의 영위봉안식과 등극식은 일제의 탄압으로 무기한 연기되어 치르지 못하였다.
 
▲ 비룡촌 부근에서 바라본 보천교 중앙교당과 대흥리 (출처: 일본 동경 학습원대학 우방문고 소장)
 

  한편, 무신(1908)년 12월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집에서 상량 공사를 보셨다. 이때 “있는 기운 그대로 풀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경석이 가져온 백목[무명천]이 모자라 더 가져오게 한 후 공사를 마치셨다.26 집을 짓기 위해서는 마련된 터에 기초 공사를 한 후, 그 위에 집의 기본 골격을 세운다. 그 골격의 마무리 단계가 상량이고, 상량이 끝난 후에야 나머지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된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차경석이 웅장한 교당과 십일전을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제님께서 보신 공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차경석에게 모자란 백목을 더 가져오게 하신 것은 차경석이 가진 기운의 부족함[한계]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 상량 공사를 필자는 이렇게 해석하였지만, 『전경』에 기록된 상량 공사의 내용이 간략하여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근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 그리하여 차경석은 ‘십일전’에서 영위봉안식과 등극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자신의 야망은 궁궐 같은 중앙교당과 십일전의 완공을 끝으로 점점 시들어갔다. 이처럼 대흥리에 본소를 둔 보천교가 크게 흥하여 중앙교당과 십일전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상제님께서 보신 동학 신명 해원 공사27가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교리와 신앙체계의 변경으로 말미암아 보천교의 중앙교당과 십일전이 완공된 후에도 교단에는 이탈자가 생기는 한편, 상제님의 신권(神權)을 믿어왔던 교인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어 교세의 약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1936년 윤3월 차경석이 사망하자, 일제는 ‘유사종교단체 해산령’을 선포하여 증산계열의 교단을 강제 해산시키고, 대흥리의 보천교 교당 건축물을 경매·처분하였다.
  현재 대흥리에 남아 있는 보천교의 흔적은 보천교중앙본소 성전과 총정원 그리고 보천교 교당의 석축 담장과 십일전 터의 기초석 등이 있다. 그래서 보천교중앙본소 외 나머지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본소 바로 맞은편 석축 담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길로 이동하였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일정한 규격의 돌로 쌓아 올린 석축 담장이 길게 남아 있었다.28
  다음은 십일전이 위치했던 곳으로 길을 따라 이동하였다. 현재 터에는 당시 사용했던 기초석만 볼 수 있다. 십일전 건물은 현재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 건물로 남아 있다. 한편 십일전은 차경석의 천자등극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당시 교당의 전체 공사비가 150만 원이 넘었고,29 전체 공사비의 1/3을 차지했던 십일전 공사비는 50만 원으로,30건물을 짓는데 대략 5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 보천교 교당의 석축 담장(좌)과 십일전 기초석(우)
 
 
▲ 십일전 내 삼광영을 모신성탑 (출처: 『보천교와 한국의신종교』)
 

  게다가 십일전 내에는 경복궁의 ‘근정전’에 있는 ‘오봉산일월도’31처럼 중앙에 입암산, 왼편에 삼성산, 오른편에 방장산 그리고 산위에 해·달·성[삼광영(三光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32 또 건물 양측에는 해태상이 있었다고도 전해지며, 건물 내에는 닫집을 설치하고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용(龍)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 예로 십일전 내 거대한 성탑(聖塔)33을 오르는 계단과 기둥 양쪽에 조각하여 도금한 용, 그리고 십일전의 정문인 삼광문(三光門) 입구 양쪽에 조각한 용머리가 있었다. 한편 차경석은 교당을 신축할 당시 자칭 ‘천자’라 하고 ‘천자의 대궐은 황와(黃瓦)로 이는 법이라’하여 십일전의 기와를 황와로 이었으나, 경찰의 제지에 의해 보통 기와로 바꿨다고 한다.34 십일전 건물 이름에 담긴 의미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십(十)은 역학에서 음의 최종수이며, 일(一)은 양의 시초가 되는 수이므로, 십일은 음양의 시종으로서,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본체 즉, 태극(太極)을 상징하는 의미로 전해지기도 한다.
  보천교 중앙교당의 정문(보화문) 앞쪽에 위치했던 차경석의 집에서 보천교 교당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석축 담장 길을 따라 십일전 터와 교당 터 주변을 둘러보면서 당시 일제가 보천교 교당의 규모와 보천교인의 위세에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1923년 이후 차경석은 물산장려운동으로 외산 물품을 쓰지 않기 위해 대흥리에 유리, 염색, 직조, 농기구 등 작은 공장을 많이 설립한 후, 운영은 교단에서 하고 생산은 교인과 그 자녀들에게 담당하게 했다고 한다.35 그래서 대흥리에는 그런 흔적으로 특히 섬유공장을 몇 곳에서 볼 수 있었다.
 
▼ 십일전의 삼광문(출처: 『朝鮮の類似宗敎』)
 
 
마무리하며
  정읍 대흥리는 차경석을 통해 동학신명들을 해원시키기 위한 공사와 27년 동안의 헛도수36가 펼쳐진 곳이었다. 기유(1909)년 4월 상제님께서 김보경의 집에 계시면서 “홍성문(洪成文)이 회문산(回文山)에서 27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27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라고 하셨다.37 이는 천자를 꿈꿨던 차경석, 그의 27년 동안(1909.4~1936.윤3) 노력이 다 헛된 일임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미(1907년)년 12월 상제님께서는 고부 와룡리에서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를 착수하셨다. 그리하여 왕후장상을 원했던 동학 신명들의 원한이 창천하다고 하시며, 후천에 그 신명들이 역도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기 위해 12 제국을 원하며 천자를 꿈꿨던 차경석을 동학 신명들의 해원 두목으로 정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동짓달과 12월에 차경석의 집에서 포정소를 정하는 공사와 상량 공사를 보셨다. 이들 공사에서 차경석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사의 내용이 서로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전경』에 수록된 공사 내용이 소략하여 구체적 의미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경석의 집에서 보신 공사는 지금까지 살펴 본 보천교의 창립 과정과 결말을 놓고 볼 때 역도를 조정하는 공사, 즉 동학 신명 해원 공사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앞부분에서 상량 공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기는 하였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후일을 기약해 본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동학 신명들의 해원 두목으로서 차경석은 상제님의 공사에 의해 자신의 집에 세워진 교단을 발판으로 보천교의 교주가 되어 세간에 천자로 알려지는 한편, 대흥리에 궁궐 같은 웅장한 교당을 지을 수 있었다. 게다가 차경석은 당시 유행했던 정감비결과 연결시켜 나라의 독립과 구원자를 원했던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경석이 꿈꾸던 십일전에서의 천자등극은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차경석의 한계[부족함]요, 상제님의 공사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60방주(方主)에 55만7천7백 명의 간부를 거느리며 권세를 누렸던 차경석, 그리고 세간에 천자로 불리며 궁궐 같은 보천교의 중앙교당과 십일전에서 천자의 자리를 마련했던 차경석을 통해 왕후장상을 원했던 동학 신명들의 원(願)은 해소되었으리라 본다.
  이곳 대흥리는 특히 지극한 성경신으로 상제님을 좇았으나 두 마음을 품었던 차경석을 통해 참된 믿음과 이심(二心)이 아닌 일심(一心)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곳이었다.  상제님께서도 차경석과 훗날의 우리 도인들을 염려하셨는지 포정소를 정하는 공사를 보신 후, 백지에 24방위를 돌려 복판에 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道德君子)라 쓰시고 종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일러주셨다.
 
“천지가 간방(艮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24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졌느니라.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 천추 도덕 군자가 배를 몰고, 전명숙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38
 
  위의 말씀에서 등장하는 도덕 군자는 우리 수도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상이다. 하지만, 결코 일심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일심으로 지난(至難)한 수도의 여정을 충실히 이행했을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 일심은 상제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아니면 결코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참된 믿음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흥리의 여러 자취를 통해 상제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올바른 수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01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3), pp.24~26 참고.
02 안후상, 앞의 글, pp.24~26 참고.
03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상 (정읍: 보천교중앙협정원, 1948), p.1, p.3 참고.
04  이영호, 앞의 책, pp.3~4 참고 ; 안후상, 앞의 글, p.26 참고.
05 초나라 장수들이 벌떼와 같이 들고 일어섬.
06 교운 1장 42절.
07 이 구절과 관련된 당시 신문 기사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각 처에 인민을 유혹케 하여 대정10(1921)년에는 악역(惡疫)이 유해(有害)할 터이니 채소를 먹어야 그 화난을 면하리라, 또는 대정13(1924)년에는 조선독립의 기운이 돌아와 강증산이라는 태을교 교주가 소생하여 황제 위에 등극할 터인데 그때에 각 대신과 관찰사 군수 같은 관직은 전부 태을교도 중에서 등용할 터인즉 지금부터 태을교에 힘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 키로 기도치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또는 교칙을 잘 지키어 진실히 신앙하면 몇 날 안 되어 눈이 열려가지고 성전에 옥황상제를 친히 볼 수 있으며 평상시에 우환질고를 면한다. 기타 여러 가지의 미신으로 인민을 유혹케 하던 태을교의 두령되는 … 채선묵은 … 이와 같은 죄명으로 평양 경찰서에 검거되어 …” (《매일신보》 1921년 7월 22일자 3면 6단)
08 60방주는 금ㆍ목ㆍ수ㆍ화(金木火)에 응하는 4명의 교정(敎正)과 동ㆍ서ㆍ남ㆍ북ㆍ춘ㆍ하ㆍ추ㆍ동에 응하는 8명의 교령(敎領)과 24방위에 응하는 24명의 포주(胞主)와 24절후에 응하는 24명의 운주(運主)를 말하는 것이다. (이영호, 앞의 책, p.11 참고)
09  이영호, 앞의 책, pp.12~13 참고.
10 같은 책, p.13 참고.
11 이영호, 앞의 책, pp.14~15 참고.
12 이영호, 앞의 책, p.23 참고.
13 이영호, 앞의 책, p.19, p.27 참고.
14 같은 책, p.34 참고.
15 같은 책, p.34 참고. 
16 『교전』 (정읍: 보천교중앙총정원, 1981) 참고.
17 이영호, 앞의 책, pp.36~56 참고.
18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보천교의 교인 수는 《보광》에서 발표한 수에 훨씬 못 미친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이었다고 하니 보천교가 밝힌 교인 수는 조금 과장된 부분도 있을 수 있겠다.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敎』 (경성: 조선총독부, 1935), pp.531~537 참고] 
19 천고의 세월을 누리고자 진시황이 지은 아방궁, 만방에 해와 달처럼 빛나고자 조조가 지은 동작대.
20 십일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 길이는 100자(30.3m) 폭은 50자(15.1m) 기둥은 24자(7.27m)였다. [김재영, 「보천교 본소 건축물의 행방」, 『신종교연구』 제5집 (서울: 한국신종교학회, 2001), p.144 참고]
21 안후상, 앞의 글, pp.39~40 참고.
22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하, p.1.
23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하, pp.3~4 참고.
24 《매일신보》 (1929년 5월 4일자)에서는 옥새의 글귀를 ‘대시국진정지보(大時國眞正之寶)’로 서술하고 있으며, 《중외일보》 (1929년 5월 2일자)에서는 ‘대시국지보(大時國之寶)’로 서술하고 있다.
25 《중외일보》 (1929년 5월 2일자), ‘차천자 경석의 몽’ 참고.
26 교운 1장 28절 참고.
27 공사 2장 19절 참고.
28 담장의 높이는 옛 사진과 남아 있는 실제 석축 담장을 근거로 할 때 2.5~3m 사이로 추정된다.
29 《매일신보》 (1929년 4월 14일자), 3면 8단 참고 ; 《개벽》 창간호(서울: 개벽사, 1935), pp.62~66 참고.
30 1925년도 《매일신보》에서 밝힌 각 월별 쌀 1가마니의 가격은 대략 16원으로, 50만 원을 계산하면 쌀 31,250가마니에 해당된다. 요즘 쌀 1가마니(80kg)를 대략 13만 원으로 계산해 보면 당시 50만 원은 지금의 약 40억 원에 해당되는 거액이다.
31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는 조선시대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만 설치하였다. 그림에는 해,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소나무, 파도(물)가 그려져 있다. 해와 달은 임금을 상징하고, 다섯 개의 봉우리는 산신에게 제(祭)를 올리던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삼각산, 지리산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나무는 왕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파도는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고 집행하는 조정(朝廷)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림에는 왕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칭송과 왕족의 무궁한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32 장봉선, 『정읍군지』 (정읍: 이로재, 1936), p.19 참고.
33 십일전 내에 있는 탑으로 높이가 30여 척(9.1m)이고 둘레가 80여 척(24.2m)인 거대한 탑이었다. (장봉선, 앞의 책, p.19]
34 김재영, 앞의 책, pp.158~160 참고.
35 차용남 구술(1991. 1. 21), 안영승 구술(1993. 11. 10) 참조 [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권 (서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8), p.397]
36 ‘27년 동안의 헛도수’에 대한 내용은 《대순회보》 68호, ‘돋보기’를 참고하기 바람.
37 예시 53절 참고.
38 예시 5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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