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37년(2007) 11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13) 교리소개 도인탐방 『전경』 속 역사인물 답사기 수기 포토에세이 대순학생회 대원종 인물소개 고사 한마디 금강산 이야기 아름다운 세시풍속 상생의 길 철학과의 만남 영화 속으로 이달의 책 & 십자말 맞추기 Q&A 게시판 알립니다

인물소개 : 익(翼) 별을 관장하는 마무(馬武)신명

익(翼) 별을 관장하는 마무(馬武)신명

 

 

글 교무부

 

  마무[馬武:?~61, 자(字)는 자장(子張)]는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그의 고향은 남양군 호양현(南陽郡湖陽縣:현 하남성 당하현 서남)이었지만, 원수를 피해 강하군(江夏郡:현 호북성 무한시 신주서쪽)에서 기거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기원후 8년 왕망(王莽)은 전한(前漢)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웠지만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정책 파탄으로 비롯된 각지의 농민반란과 호족(남양유씨)02반란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때, 경릉(竟陵:현 호북성 잠강시 서북)과 서양(西陽:현 하남성 광산현 서쪽)의 삼로(三老)03가 군(郡)의 경계에서 병사를 일으키니 마무가 이에 가담하였다. 얼마 후인 20년에는 강하군의 녹림(綠林:현 호북성 대홍산)을 근거지로 하여 ‘녹림(綠林)의 병(兵)’이라 불리는 농민반란이 발발했는데, 마무도 이때 녹림병에 들어갔다. 이 녹림병은 남양 유(劉)씨의 호족반란군과 합세하게 되어 갱시제 유현(劉玄)04의 배후세력이 되었고, 마무 역시 갱시제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갱시제는 마무를 시랑(侍郞)으로 삼아 유수(劉秀:훗날의 광무제)와 함께 왕심(王尋)05 등을 격파하게 하였고, 또 진위장군을 제수하여 상서령 사궁(謝躬)과 함께 하북의 한단(邯鄲)에 웅거해 있던 왕랑(王郞)06을 공격하게도 하였다.

  광무제는 한단을 점령한 후, 사궁과 마무 등을 청해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베풀고 기회를 보아 사궁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술자리가 파한 후, 광무제는 총대(叢臺)07에 올라가 마무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이번에 어양(漁陽)·상곡(上谷)의 돌격대(突擊隊)08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싶은데, 그대의 의향은 어떻소?” 마무가 대답하기를 “저는 둔하고 겁이 많아 방략(方略: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광무제가 “그대는 오랫동안 장군으로 있으면서 병사(兵事)에 익숙하니 어찌 나의 연리(掾吏)09들과 똑같겠소?”라고 하니, 마무가 이에 광무제에게 귀의하였다.

  이후 마무는 광무제를 따라 전장을 누볐다. 한번은 광무제가 우래(尤來), 오번(五幡) 등을 공격하다가 신수(愼水:현 안휘성 영상현 근처)에서 패하였는데, 마무가 홀로 후진(後陳)으로 남아 적의 진영을 허물어뜨리니 적들이 급히 추격할 수 없었다.

  광무제가 즉위(25년)한 후, 마무는 시중(侍中)10, 기도위(騎都尉)가 되었고 산도후(山都侯)에 봉해졌다. 28년(건무 4) 호아장군 합연(蓋延:參별을 관장) 등과 함께 유영(劉永)11을 토벌하였는데, 마무는 따로 제남(濟南:산동성 중서부)을 공격하여 성무(成武)·초구(楚丘)를 함락시키고 포로장군(捕虜將軍)을 제수 받았다.

  30년(건무 6) 여름, 건위대장군 경감(耿:箕별을 관장)과 함께 서쪽으로 외효(隗囂)12를 공격하였으나 한(漢)의 군세가 불리하여 병사를 이끌고 농(:현 감숙성 중부)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외효가 급히 추격하자 마무는 정예 기병을 선발하여 뒤로 돌아가 막으면서 몸소 갑옷을 입고 창을 메고 달려 공격하여 수천 명을 베니 외효의 군대가 마침내 패퇴하였고 군대는 무사히 장안(長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7년(건무 13) 식읍이 더 늘어나고 유후(侯)에 봉해졌다. 마무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하곡양(下曲陽:현 하북성 진주시 서고성)에 주둔하면서 흉노에 대비하였는데, 그러던 중 군리(軍吏)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명령을 받고 처자를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마무는 낙양(洛陽)으로 나아가서 장군의 인수(印綬)13를 바치고 식읍 오백호를 삭감 당하였다. 그리고 양허후(楊虛侯)에 봉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마무는 조정에 남아서 광무제를 받들 것을 청하였다.

  마무는 위인(爲人)이 술을 좋아하고 활달하여 거리낌 없이 속에 있는 말을 하였다. 때로는 취한 상태로 어전에서 대신들을 면전에 두고 핍박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단점에 대해 서슴없이 말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광무제는 마무의 이런 행동을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웃으며 즐겼다.

  49년(건무 25) 중랑장(中郞將)으로 병사를 거느리고 무릉(武陵)의 만이(蠻夷)14를 공격하였는데, 돌아와서 인수(印綬)를 바쳤다. 마무는 61년(영평 4)에 세상을 떠났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전한(前漢)왕조의 후손들 중 하나.

03 ()이나 향()에 두어진 그 고장 출신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

04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王莽)정권에 대항하여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시도는 유수(劉秀:광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23년에 유현(劉玄)은 낙양에서 갱시(更始)를 연호로 하여 한나라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지지기반이던 농민군 세력이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불과 2년 뒤인 25년에 권력을 잃고 살해당하였다.

05 왕망(王莽)의 부하장수.

06 ?~24, 장안의 점술가였는데 자신을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자여라고 속여 반란군 세력을 규합한 다음 이를 토대로 하북 일대를 장악하였다.

07 한단성(邯鄲城) 안에 있는 누대.

08 어양(漁陽)과 상곡(上谷)지역은 하북의 북쪽변방에 위치해 있어서 강력하기로 소문이 난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경감(_:별을 관장), 구순(寇恂:별을 관장), 경단(景丹:() 별을 관장) 등이 이들을 이끌고 광무제에게 투항하였다.(대순회보69경단편 참조)

09 하급관리. 즉 마무를 존중하는 표현.

10 ()의 벼슬. 천자의 좌우에서 여러 가지 일을 받들고 고문(顧問)에 응하였다.

11 유영(劉永)은 전한(前漢)시대 양왕(梁王)의 아들로 왕망(王莽)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나서 한()의 제후왕을 모두 폐했을 때 왕위를 잃었지만, 갱시제(更始帝:劉玄)가 즉위하자 다시 양왕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갱시제가 259월 패망하자 11월에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고 수도를 수양(:현 하남성 상구시 남쪽)에 정했다. 광무제가 낙양(洛陽)에서 후한을 건국(25)한 이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웅(群雄)들을 평정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대결한 인물이었다.

12 감숙성 지방에 웅거하던 인물.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67좨준편 참조)

13 ‘인수를 허리에 찬다는 말은 임관한다는 뜻이고, ‘인수를 풀다는 말은 퇴관(退官면관을 의미하였다.

14 예전에, 중국 사람들이 중국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종족을 낮잡아 이르던 말.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