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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난(亂)을 동(動)케 한 전봉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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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난(亂)을 동(動)케 한 전봉준1)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 땅에서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시작된 농민의 봉기는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지휘 아래 점차 조직화되었고, 또 가담인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급기야는 전주성을 함락(5.31)시킬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에 관군의 힘만으로 이들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정부는 청(淸)나라에 원병을 요청(6.2)하게 되었다. 파병요청을 받은 청의 이홍장은 톈진조약2)[天津條約, 1885]에 의거하여 일본에 파병사실을 통고하고 군사 2,800명을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급파하였다.

  한편,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킨(1876) 바 있는 일본은 그동안 청에 대항하여 조선 내에서 자국의 세력을 점차 확장해가던 중이었으며 더 나아가 대륙침략의 원대한 계획도 함께 세우고 있었다. 청과의 전쟁기회 포착을 애타게 기다리던 일본은 청군의 파견소식을 듣자마자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무려 13,800명이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6.12)하였다.

  청일전쟁(1894~95)은 7월 25일 일본 해군이 아산 앞바다에서 청국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서구 열강들의 예측을 뒤엎고 파죽지세로 청군을 격파하여 11월에는 요동반도의 뤼순과 다롄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이 청일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의 역학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지역은 열강의 이권다툼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 영국은 식민지 건설의 선두에 있었는데 세계 곳곳에서 자국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크림전쟁(1853~56)3)의 패배로 유럽 쪽에서의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영국이 이 지역을 러시아에게 잠식당할 경우 양자강 유역에서 가지고 있던 영국의 기득권은 물론이고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의 안전까지 위협당할 상황이었다. 때문에 영국의 관심은 자연히 러시아를 저지하는데 맞춰지게 되었고 청과 일본을 자국의 앞잡이로 내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청의 허무한 패배 즉, 일본의 압도적 승리는 동아시아의 세력구도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청은 이제 열강들에게 더 이상 교역의 상대국이 될 수 없었다. 일방적인 약탈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청과 우호관계를 유지해 오던 영국도 등을 돌리고 일본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여기에 감정이 상한 청은 영국을 떠나 러시아로의 접근을 촉진하였고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청· 러 대 영· 일이라는 양대 진영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청은 패전국이었고 영국은 지구 반대편에 있던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구도는 실상 만주와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직접 부딪치게 된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승전국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우위확보에 만족하지 않고 요동반도에까지 손을 뻗치려 하였다. 이를 좌시할 수가 없게 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3국간섭(1895.4)을 이끌어냄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에게 다시 반환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조선의 명성황후는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일본이 러시아의 일갈(一喝)에 힘없이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고 나서, 러시아로 하여금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물러 간 청의 특권을 물려받도록 해주었다. 일본은 세력회복을 위하여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10)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암살을 두려워하던 고종이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사태[아관파천]가 벌어지는 바람에 조선 내에서 러시아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게다가 러시아는 1897년 12월 무력으로 요동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였다. 불과 2년 전에 3국간섭을 주도하여 강압에 못이긴 일본으로 하여금 다시 토해내도록 하였던 그 땅을 러시아 스스로가 가로챈 이 사건은 일본의 참을 수 없는 적의(敵意)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제 러· 일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일본함대가 뤼순군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영일동맹, 1902년)에 있었고 미국 또한 일본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일은 서쪽으로는 프랑스,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러불동맹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외교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관심을 동아시아로 돌리게 만들었으며 러· 일간의 전쟁을 부추겼다. 

  이러한 열강들 간의 세력구도 역시 러일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적대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는 일이 발생하였다.(영불협상,1904) 두 나라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에 비하여 이미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당시 국내공업 발달로 인해 크게 증가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재분할을 요구하였으므로 이 두 나라에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동아시아의 전쟁은 독일의 도전에 직면해 있던 두 나라로 하여금 서로 힘을 합치도록 유도했다. 영국의 경우 ‘동맹국에 대해 만일 다른 1국 또는 수 개국이 전쟁을 걸어올 경우 체약국은 동맹국을 도와 전투에 참여한다’는 영일동맹의 조약 때문에 러시아의 동맹국 프랑스가 참전할 경우에는 참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영국이 쓸 데 없이 동아시아의 전쟁에 휘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동안 식민지 쟁탈전에서 경합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관계개선을 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러불동맹 조약상 참전의무는 없었으므로 직접 전쟁에 휘말릴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이길 경우 앞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질 경우에도 유럽 문제에서 발언권을 잃게 될 것이므로, 전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러시아는 동맹국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이웃한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외교의 방향을 바꿔 대영관계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은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시간이 지날수록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져갔다. 봉천회전(1905.3)에서의 패배이후 발트함대마저 동해상에서 괴멸(1905.5)됨으로써 이제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더 이상 영국에게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적성국가인 영국과의 타협이 가능해졌는데, 이는 러시아가 대독 포위망의 일원으로서 영국에게 충분한 가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부터 계속하여 러시아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독일의 협상제의를 수차례 받아 왔지만 결국 거부하고 말았다. 자국을 전쟁으로 부추긴 독일에 대한 원망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러일전쟁의 결과로 인해 러시아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었다. 패전 후 아시아 침략이 불가능해진 러시아는 남하의 방향을 발칸과 근동지역으로 수정하게 되어 독일· 오스트리아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외에 바그다드 철도 및 페르시아 만에 대해 영국과 공통이익을 갖게 됨으로 해서 러시아는 독일을 버리고 오랜 적대 국가였던 영국과 손을 잡게 되었다.(영러협약, 1907)

  러일전쟁으로 인해 변화된 국제관계는 향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밑그림이 되었다. 영불협상(1904)은 영러협약(1907)과 함께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국협상으로 이어졌으며, 여기서 소외된 독일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3국동맹을 결성하였다. 1910년까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위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잠재적인 충돌의 위험에 휩싸이게 되었다. 1914년 6월 동아시아에서의 기반을 잃고 발칸 쪽으로 방향을 돌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대립이 바탕이 된 사라예보 사건4)을 계기로 시작된 양대 진영 간의 전쟁은 점차 확산되어 미국, 중동, 일본까지 참전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대전이 되었다. 1918년까지 4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의 패배로 끝이 났고, 4개의 거대한 구제국(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투르크)이 해체되었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였던 조선의 한 귀퉁이에서 전봉준에 의해 타올랐던 혁명의 불꽃이 청일전쟁을 불러일으키고 계속해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되어 전 세계를 전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게 되는 과정은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각 전쟁의 발발시기가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제1차 세계대전(1914)으로 정확히 10년의 간격을 보이고 있어 마치 잘 놓인 도미노의 패가 잇달아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교무부>

1)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 전 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 (교법 3장 30절)

2)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2개 대대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리고 양국 간의 무력충돌의 위험이 커졌다는 명분으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사로 톈진에 보내 이홍장과 담판을 지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하려고 했다. 그 결과 1885년 4월 전문 3개조의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을 보면 ① 청일 양군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철병할 것  ②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 것  ③ 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구실이 되었다.

3) 러시아와 프랑스· 영국· 오스만투르크· 프로이센 · 사르데냐의 연합군 사이에 크림반도· 흑해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흑해에 군함을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되어 남하의 방향을 동아시아로 돌리게 되었다.>


4)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건.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에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부르짖는 세르비아의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하고 마침내 7월 28일에는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는 세르비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인 러시아의 즉각적인 참전을 불러 일으켰으며 오스트리아를 배후에서 지원하던 독일역시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등도 참전하면서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의 열강들이 참여하였고 나아가 중동과 일본, 미국까지 참여하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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