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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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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다시 읽기 :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 회문리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 회문리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 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창령·남지에 이르러 천계산·안국산·여항산·삼족산·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교운 2장 1절)
 
 
이번 호에서는 도주님 탄강지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지세나 지명의 유래 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 회문리 전경과 도주님 생가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이도다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곳은 경상도01 함안군 칠서면의 회문리이다. 상제님께서 ‘도(道)를 온전히[全] 편다[羅]’는 의미를 가진 전라도(全羅道) 땅으로 오셨음을 상기해 볼 때, 그와 같은 상제님의 ‘도(道)를 기뻐하고[慶] 받들어 숭상한다[尙]’는 문자적 의미를 가진 경상도(慶尙道) 땅에 도주님께서 탄강하심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함안과 회문리와 관련해서는 도전님께서 그 의미를 밝혀 주셨으니 다음 훈시 말씀을 살펴보자.
 
 
증산은 상제님의 호니까 다들 잘 안다. 그러나 정산은 모른다. ‘아무나 솥 정(鼎), 뫼 산(山)이라 하면 되지’ 하겠지만 도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 그 어른께서는 함안 땅으로 오셨다. 다 함(咸), 편안할 안(安)이니 다 편안해진다는 뜻이다. 회문리는 모일 회(會), 글 문(文)이니 글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글을 배우려면 글이 모여 있는데 가야 찾고 배울 수 있다. (음력 1991년 1월 6일)   
 
 
원래 함안 지역은 가야국(伽倻國) 중의 하나인 아라가야가 번성했던 곳인데, 신라에 복속되고 경덕왕 때부터는 함안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다 함께 화합하여 안가태평(安家泰平)을 기원하였던 때문이다.02 상제님께서는 천하를 주유하시다가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 함열(萬人咸悅)’이라 하시며 기뻐하셨다.03 함열(咸悅)은 다함께[咸] 기뻐한다[悅]는 뜻이며, 이것은 상제님의 삼계 대순과 천지공사로써 모두가 기뻐하는 후천 선경 세계가 이루어짐을 상징한다.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함안(咸安)은 도주님의 탄강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咸] 평안[安]하게 될 것을 의미함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주님께서는 함안 중에서도 칠서면에 오셨다. 칠서(漆西)의 칠(漆)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가장 우수한 도료로서, 마지막 단계에서 사용되어 어떤 물건을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도록 보존하고 아름답고 빛나게 완성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서(西)는 서신(西神)이신 구천상제님의 도로 읽을 수 있으니, 결국 칠서(漆西)의 의미는 상제님[서신(西神)]의 도를 진법으로 완성하여 빛내신[漆] 도주님의 공부와 여합부절한 의미가 있다할 것이다.
바로 이 칠서의 회문리에 도주님께서 오셨다. ‘글이 모여 있는 곳’이 회문리라는 도전님의 가르치심은 ‘글[文]’이 지닌 의미에 대해 우리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함을 알려주시고 있는 듯하다. 사실 글[文]은 단순한 글자를 넘어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문(文)의 고문을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으로 설명하며 이를 ‘교차하는 무늬를 상형한 것’이라 하여 ‘글자’ 이전의 뜻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더 구체적으로는 유교의 13경 가운데 하나인 『주례(周禮)』의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가 “푸른색과 붉은색을 교차하여 그린 것을 문이라 한다.(靑與赤謂之文)”라고 말하고 있다. 즉 문(文)은 푸른색과 붉은색의 음양을 교차한 그림이라는 것인데, 그 그림은 태극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전거를 통해보면 신비롭게도 문(文)은 처음부터 도(道)를 상징하는 뜻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무늬를 형상했던 문(文)은 오래지 않아 글자의 뜻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는 한자가 상형문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자를 익히는 것을 학문(學文)이라고 했는데, 성인들의 말씀이 글자로 기록되어 경전이 만들어지면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글을 배우는 것, 즉 학문은  필수적이 되었다. 이것은 결국 학문을 ‘성인들의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라는 뜻으로 확장시켜 수도(修道)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수도가 진리를 깨닫기 위한 수행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즉, 학문(學文: 文을 익힌다)의 文[글]은 수도(修道: 도를 닦고 익힌다)의 도(道)와 동일하게 이해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문(文)이 도(道)와 동일하게 이해되었음은 자전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문(文)이 법도(法道), 예의(禮義), 결[理], 조리(條理)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04 결국 이는 도(道)가 천지와 인간 세계에 펼쳐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모습, 즉 도의 무늬를 문(文)이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상과 같이 문(文)은 도(道)를 의미하는 글자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문(文)이 모인다[會]는 뜻의 회문(會文)은 유불선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도(道)가 모여 있는 곳임을 암시하는 비결로 풀이할 수 있다. ‘회문’은 도의 주인이 되실 도주님께서 탄강하시는 장소임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말인 것이다.
 

 
대구에서 영산·창령·남지에 이르러
 
『전경』이 정산(鼎山) 도주님의 탄강지를 설명하면서 그 지맥을 대구부터 시작함은 대구의 뜻이 큰 언덕, 즉 큰 산(山)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큰 산, 산 중에서 가장 큰 산은 시루산(시루는 구멍이 뚫려 있어 삼라만상을 모두 담아낼 수 있다)이며, 그 시루는 솥이 있어야 쓰임을 다할 수 있으니 곧 증산과 정산의 양산(兩山)이 큰 산이다. 상제님의 도는 도주님을 통해 이 땅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도주님 탄강지의 지세 출발점은 큰 산인 양산(兩山)을 상징하는 대구로부터 설명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구의 진산(鎭山)은 거북을 잇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연귀산(連龜山)이고05 거북이 북방의 신인 현무(玄武)를 상징하니06 『현무경(玄武經)』으로 상징되는 구천상제님의 도를 이으신 도주님의 탄강지 지세가 대구에서 시작되는 것은 여합부절이다.
아울러 대구는 최수운[최제우]이 처형당한 곳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최수운은 도주님보다 먼저 상제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아[奉天命 奉神敎] 동학을 폈지만 유교의 전헌을 넘지 못해 제세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했다. 결국 그는 관의 지목을 받아 경주에서 체포되었고 대구의 경상감영 안에서 심문 받다가 ‘삿된 도로써 바른 도를 어지럽혔다는 죄목[左道亂正之律]’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당 형장)에서 효수형에 처해졌다. 즉 대구는 최수운이 금불문고불문(今不聞古不聞)07의 도(道)를 받드는 데 실패하고 생을 마감한 곳이요, 아울러 상제님의 천명과 신교를 받들어[奉天命 奉神敎] 50년 공부로써 완성하여 펼쳐내실 도주님께서 탄강하실 지세가 출발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대비된다. 하늘의 도를 꽃 피우지 못하고 스러진 곳이 대구였으나, 이제 다시 거기에서 지세가 발원하여 새로운 하늘의 도가 성공적으로 펼쳐지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대구 팔공산 파계재의 아침 / 사진: 안상혁, 대구광역시 시정홍보관, 사진으로 보는 대구
 

대구를 기점으로 한 지맥은 비슬산과 화왕산, 영취산을 타고 창녕과 영산, 남지로 이어진다. 창녕은 원래 이름이 빛고을이라는 뜻의 ‘비사벌’, ‘빛벌’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화왕(火王, 火旺)으로 되었다가 고려 태종 때 지금의 창녕(昌寧)이 되었다고 한다. 창녕은 빛나고 밝으며 편안하게 창성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08
영산(靈山)의 원래 명칭은 산 아래에 들판이 있다는 뜻의 ‘들뫼’였으며, 들판 위에 있는 산의 이름은 ‘수리뫼[취산(鷲山),739m]’였다. 취산 즉 독수리[鷲]산은 옛날 사람들이 높고 험하며 신령스러운 산을 부를 때 쓰는 이름이었는데, 산에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석가가 『법화경』을 설했던 장소로 유명한 영취산(靈鷲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는 서역의 한 승려가 이곳에 와서 산 모양이 인도의 영취산과 닮았다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09 산 아래의 지역임에도 ‘신령스러운 산[靈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인상적이며, 근방에 있는 산의 명칭으로부터 불교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추해 보게 된다. 
남지는 원래 남쪽 마을이라는 뜻의 남마, 남촌으로 불리던 곳인데, 마을을 한자로 표기하기 위해 지(旨)를 차자(借字)하여 남지(南旨)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지(旨)는 언덕이라는 치(峙)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10 문자로 볼 때 지(旨)는 뜻, 의향이라는 의미가 있고 그때의 지(旨)는 지(指)와도 통용된다.11 지(指)는 원래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남지(南旨)는 남지(南指)라 하여 남쪽을 가리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고, 그렇다면 탄강지의 맥이 창녕과 영산, 그리고 남지에까지 이르렀지만 낙동강에 가로막혀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을 때, 가야할 곳은 바로 강 건너인 남쪽이라고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지가 가리키는 방향인 남쪽, 즉 동서로 길게 놓인 낙동강 너머에는 함안의 회문리가 있다.
이곳 남지는 도주님을 찾아가야 함을 비결로 전한 『채지가』에 등장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의심 말고 따라서라 등 들고 불 밝혔네
어주자(魚主者)를 다시 만나 무릉도원 찾아가니
남해(南海) 남지(南旨) 지남지(知南旨) 대강철교 높았구나.
12
 
 
▲ 낙동강 남지철교
 
 
여기에서 어주자(魚主者)는 속에 을(乙:생선창자)을 간직함으로써 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도(道)를 찾으려면 남해지방의 남지를 알아야 하며, 그 남지에서 철교를 건너야, 즉 낙동강을 건너야 진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채지가』가 하는 말이다. 또 대강철교는 큰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를 의미하기도 하고, 대강철교(代姜哲敎)라 하여 상제님[姜]을 대신[代]하여 도주님[哲]께서 가르침[敎]을 펴신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천계산·안국산·여항산·삼족산·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에는 영취산을 타고 온 백두대간의 줄기가 그대로 이어지면서 회문리를 주변으로 한 몇몇 중요한 산들을 이루었다.
그 첫 번째가 회문리 북쪽에 위치한 천계산(天界山)이다. 이 산의 의미는 말 그대로 인간계가 아니라 천상계라는 것이니, 진인이 계시는 곳이 바로 이 곳임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산은 닭의 울음소리가 산을 넘어 들려온다는 이유에서 계명산(鷄鳴山)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채지가』는 항우가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포위당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역발산기개세는 초패왕의 위풍이라, 대사성공 하잤더니 천지망아(天地忘我) 할 일없네, 계명산(鷄鳴山) 추야월(秋夜月)에 옥소성(玉簫聲)이 요란터니 팔천제자 흩어지니 우혜우혜(虞兮虞兮) 내약하(奈若何)오13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항우가 하늘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음을 애통해했던 바로 그 곳이 계명산이었다. 항우는 어쩔 수 없이 오강(烏江) 가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후 구천에 하소연을 하여 후천의 해원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14 상제님께서는 그 사실을 의미하는 ‘오강록(烏江錄)’이라는 글자를 당신의 뒤를 이으실 진인에게 전하셨으니,15 이로 보면 도주님께서 탄강하시는 함안 땅의 첫 지맥이 천계산이자 계명산이 됨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회문리를 휘감는 산줄기는 천계산에서 안국산으로 이어진다. 안국산은 원래 안곡산(安谷山)이라고 불렸는데, 임진왜란 당시 관군들이 이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왜군의 동태를 알리고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나라를 안정시켰다 하여 안국산(安國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산에는 산성과 봉수대가 남아있다.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 안국산은 구세제민과 보국안민이라는 도주님의 창도 이념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안국산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16㎞ 지점에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여항산(770m)이 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동쪽과 북쪽이 높고 남쪽과 서쪽이 낮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천도 한강이나 낙동강과 같이 동과 북에서 발원하여 서와 남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함안은 여항산으로 인해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 하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옛날 천지가 개벽했을 때 물이 이 산 꼭대기까지 차올랐으며 산 정상의 상여바위와 배넘기 도랑 사이로 배가 넘어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산의 이름이 산을 배로 넘어간다는 의미인 여항산(餘航山)인 이유이다. 원래 ‘여(餘)’는 남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뛰어 넘는다는 의미의 사투리를 표현하는 말로 차용해서 쓰였다고 한다. 이처럼 회문리의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여항산은 개벽 때 배를 타고 넘어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시기 얼마 전에 백지에 24방위를 돌려쓰신 뒤 한 복판에 ‘혈식천추도덕군자(血食千秋道德君子)’라 쓰시고 “천지가 간방(艮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24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워졌느니라.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천추도덕군자가 배를 몰고 전명숙(全明淑: 전봉준)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고 하신 적이 있으셨다.17 후천으로 가는 과정을 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비유한 것과, 여항산의 전설이 서로 맞닿아 있는 듯하여 자못 신비롭게 느껴진다.
 
▲ 도장벽화: 혈식천추 도덕군자
 

여항산에서 배를 타고 넘어오면 부봉산과 삼족산에 닿는다. 부봉산(釜峰山)은 산이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삼족산(三足山)은 그 부봉산 가마솥을 떠받치고 있는 세 발 모양이라 하여 생긴 명칭인데, 이 두 산을 합하면 정(鼎: 다리가 세 개 달린 솥)이 되므로 도주님의 존호가 정산(鼎山)이심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자고산의 아래로
 
이 두 산 옆으로는 칠서면과 대산면, 산인면을 연결하는 좁고 긴 고개인 도덕골[道德谷]이 있다. 도덕골은 개벽 때 출항하는 후천행 배를 모는 혈식천추 도덕군자를 떠 올리게 한다.
도덕골을 옆으로 끼고 있는 산은 문동산과 자고산이다. 문동산(問童山)은 문동재로도 불리는데, 옛날 문씨 일가가 고개 밑에 살았다거나 또는 문씨가 이 고개를 넘어가면서 동자(童子)에게 길을 물었다[問]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18 수많은 도교 이야기 속에서, 산 속에 사는 동자는 단순히 나이 어린 아이가 아니라 도력이 높은 신선을 옆에서 시종하는 특별한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문동산은 진인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동자에게 진인의 거처를 묻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고산(紫皐山)은 함안 시가지의 동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해가 뜰 때 해가 걸리는 모습 때문에 자줏빛[紫] 언덕[皐]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명칭이 도주님 탄강 전인 1870년대 즈음부터는 자양산(紫陽山)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자양(紫陽)은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자(朱子)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자는 무이구곡 중 다섯 번째 굽이[五曲]인 은병봉(隐屏峰) 아래에 자신의 호를 딴 자양서당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했고, 그것을 기려 많은 자양서원이 한국과 중국에 세워졌다. 따라서 앞에서 기술한 영취산이 불교와 밀접한 용어라면, 자고산(자양산)은 유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 회문리와 그 주변의 지형 (지도출처: Google Earth)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
 
안대(案對)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뜻이다. 아쉽게도 회문리와 마주 보고 있는 구미산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다음 세 곳 중의 어느 하나일 가능성이 높은데, 향후 더 많은 자료 분석을 통해 밝혀져야 할 일이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회문마을 입구를 휘둘러 감싸고 있는 작은 야산이다. 이 산은 도주님 탄강지에서 정면으로 직선거리 약 200m 정도에 위치한다.(지도의 A 위치) 회문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똥메(똥뫼)’라고 부르는데, 원래 똥메란 마을 앞에 홀로 서 있는 자그마한 야산(野山, 獨山)을 일컫는 말이다. 대개 똥메라고 불리는 산들은 그 모습이 거북이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양인 듯하다고 하여 한자로 표기될 때 거북이[龜]라는 글자가 쓰이는 경우가 있었다.19 특히 이 똥메는 우뚝 솟은 데다가 길게 늘어선 형상이어서 거북[龜]과 그 꼬리[尾]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도주님 탄강지를 바로 정면에서 마주보는 이 야산이 구미산으로 표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다음 후보지로 삼을 수 있는 곳은 도주님 탄강지에서 남동쪽 약 3.3㎞ 거리에 있는 칠원면 용전리 석전동의 구석(龜石)마을 뒷산이다.(지도의 B 위치) 지역민들은 이 산을 거북[龜]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 산이 구미산으로 표기되었을 수 있다.20 마지막 후보지는 도주님 탄강지에서 북동쪽 약 3.4㎞ 거리에 있는 칠서면 구포리의 구곡(龜谷)마을 앞산이다.(지도의 C 위치) 이 산도 자라 모양으로 생겼다고 불리기 때문에 구(龜)를 활용한 구미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21
어쨌든 도주님의 탄강지와 마주 보는 곳이 구미산(龜尾山)이란 데에는 무언가 중요한 뜻이 있다. 구(龜), 즉 거북은 많은 것을 상징하지만22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밝힌 현무(玄武)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주님 강세지의 지맥 설명이 대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대구의 진산(鎭山)이 거북을 잇는다는 뜻의 연귀산(連龜山)이고, 그 지맥 설명의 끝은 ‘거북의 꼬리’라는 뜻의 구미산(龜尾山)이다. 이것은 연귀(連龜), 즉 현무경[龜]으로 함축되는 상제님의 도를 이어서[連] 구미(龜尾), 즉 그 도[龜]의 대미(大尾)인 진법을 세우시는 도주님의 50년 공부종필을 상징하는 듯하여 신비롭기만 하다.
그리고 앞서 지맥 설명의 시작 부분에, 대구가 최수운이 생을 마감했던 곳이라는 것을 덧붙였는데, 그 지맥 설명의 끝 역시 최수운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묘하게도 지맥의 끝인 구미산은 최수운의 묘소가 있는 경주 현곡면의 구미산(龜尾山)과 그 이름이 똑같다. 상제님의 재세대도를 펴는 데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던 최수운이지만, 최수운 자신이 펼치지 못했던 제세대도가 향후 도주님께서 이 땅에 강세하시어 활짝 열리게 됨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구미산은 은연중에 알려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한편 『전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도주님 탄강지 주변에서 눈여겨 볼만한 산이 두 개 더 있다. 그것은 회문리에서 동쪽으로 우뚝 솟은 작대산(爵大山)과 무릉산(武陵山)이다. 해발 687m 높이의 작대산은 천지개벽 당시에 온 천지가 물에 잠겼을 때 이 산이 작대기만큼 남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채지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어렵더라 어렵더라 이 배 타기 어렵더라.
찾아가세 찾아가세 회문촌을 찾아가세. …
죽실에 부는 바람 경운춘색(慶運春色) 분명하다.
삼태삼경 응기하니 작대산이 높았구나. …
23
작대산에 달이 떠서 봉 나루에 비쳤구나.
성주사 늙은 중이 문안차로 내려올 제    
일월가사 떨쳐입고 총총걸음 바쁘도다.
24
 
 
이처럼 『채지가』는 진인이 탄강하시는 회문촌으로 찾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회문촌은 작대산 아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작대산 옆에는 달이 떠서 비치고 봉황이 나는 나루터도 있다고 한다. 또 진인의 탄강을 축하할 노승이 사는 성주사를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회문리와 작대산 사이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광려천(匡廬川)이 흐르고 있어 나루터가 있음직하고, 작대산 너머 큰 도시인 창원에는 신라 때 만들어진 고찰인 성주사(聖住寺)가 있으니, 『채지가』의 내용은 이렇듯 한번 소개해 볼만한 것이다. 
작대산은 개벽 때 창일하는 홍수 전설로도 주목을 끈다. 작대산 옆에는 무릉산이 있고, 그 무릉산과의 사이에 높이 약 400m의 배넘이 고개가 있다. 말 그대로 선천 개벽 때 큰 홍수가 났을 때 배가 넘나든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25 앞서 말한 여항산처럼 개벽의 홍수전설을 담고 있는 곳이기에 후천으로 가는 뱃길을 만드실 도주님을 상징해주고 있는 듯하여 흥미롭게 느껴진다. 더구나 무릉산은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라는 뜻을 함축하는데, 주지하다시피 무릉도원은 선가(仙家)의 이상세계이다.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회문리를 중심으로 하여 조금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위를 조망해보면, 북쪽에는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영취산이, 서쪽에는 유교와 관련 있는 자양산(자고산)이, 동쪽에는 선(仙)과 관계있는 무릉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글[文] 즉 도(道)가 모이는 곳인 회문리(會文里)에 유불선(儒佛仙)이 집결하고 있는 형국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01 도주님 탄강 당시는 경상남도가 아니고 경상도였다.
02 『함안군지』 1 (2013), pp.110-111.
03 행록 2장 4절.
04 『논어』나 『순자』와 같은 책에서 그 용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듯이 문(文)에는 ‘예악제도’ 혹은 ‘예절이나 의식’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한 여기에서 발전하여 법도(法道), 예의(禮義), 결[理], 조리(條理)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05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귀산은 대구부 남쪽 3리에 위치한다. 진산(鎭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처음 이룰 당시, 돌 거북이를 만들어 머리는 남으로 꼬리는 북으로 향하게 묻어 두어 지맥(地脈)을 이으려고 한 탓에 연귀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지』를 보면 연귀산이 성불산(成佛山, 지금의 앞산을 말함)에서 뻗어 내린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연귀산에 묻어 둔 돌로 만든 거북이가 북쪽의 팔공산, 남쪽의 앞산을 연결해준다는 의미에서 연귀산이라고 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귀산[連龜山, Yeonguisan]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12, 국토지리정보원)
06 《초사(楚辭)》 원유(遠遊) 보주(補注)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는 현무의 모양과 그 이름을 붙인 까닭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모인 것을 이른다.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현(玄)이라고 이르고, 몸에 비늘과 두꺼운 껍질이 있으므로 무(武)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현무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오방대제),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07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옛날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뜻으로, 상제님의 제세대도를 계시 받은 최수운이 한 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도를 훼방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대답하기를 혹 그럴 수도 있느니라; 묻기를 어찌하여 그럴 수도 있습니까; 대답하기를 나의 도는 지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한 사리요, 지금도 비할 데 없고 옛날에도 비할 데 없는 도법이니라. 닦는 이는 헛된 일 같지만 알참이 있고, 듣기만 하는 이는 알찬 것 같으나 헛된 일이 되느니라.(曰毁道者何也 曰猶或可也 曰何以可也 曰吾道 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修者 如虛而有實 聞者 如實而有虛也)” 『동경대전』, 〈논학문〉.
08 『창녕군 지명사』 (창녕: 비사벌신문사, 2003), pp.16-17, p.30, pp.66-67; 『한국지명총람』 10 (1988), p.89.
09 『창녕군지 하권』 (2003), pp.378-380; 『창녕군 지명사』, p.667.
10 『창녕군지 하권』, p.345, p.438.
11 『중한사전』 (서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6), p.2620.
12 『채지가』 (1978), 「뱃노래」, p.7.
13 『채지가』, 「뱃노래」, p.3.
14 『채지가』, 「뱃노래」, p.3.
15 상제님께서 동곡약방을 설치하시면서 만드신 둔궤(遁櫃)는 종도들 사이에 상제님의 도지(道旨)와 도통(道通)의 비밀이 담긴 귀중한 성물(聖物)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둔궤 안에는 ‘오강록(烏江錄)’이 적혀 있었고, 도주님께서는 그 둔궤를 받드시고 공부하심에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고 굳게 닫혀있었던 둔궤가 저절로 열리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16 『함안의 지명유래』, p.40, pp.252-253.
17 예시 50절.
18 『함안의 지명유래』, p.213.
19 『창녕군지 하권』, p.446 참조. 『창녕군 지명사』, p.191; 『함안의 지명 유래』 pp.86-87. 물론 장군산(將軍山)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었기에 충분한 조사가 더 필요할 것이다.
20 『함안의 지명 유래』, p.220 참조.
21 『함안의 지명 유래』, p.180 참조.
22 예로부터 거북은 장수(長壽)의 동물로 여겨져 왔으며, 거북의 등은 둥글고 배는 평평하다는 점 때문에 그 몸체가 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생각되어 왔다. 아울러 고대에 거북이 껍질로 점을 쳤다거나 낙서(洛書)가 그려진 곳이 거북이 등이었다거나 하는 사례에서 보듯이, 거북은 하늘과 인간을 매개해주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라는 위상도 가지고 있었다. 『한국문화 상징사전』 1 (서울: 동아출판, 1996), pp.38-42. 참조.
23 『채지가』, 「뱃노래」, p.7.
24 『채지가』, 「달노래」, p.17.
25 『함안의 지명 유래』, pp.226-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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